•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무신당은 외방 사족 및 도성에 “선왕을 잊을 수 없으며 많은 사람이 슬퍼한다”는 내용을 전파하였다.389)≪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2, 4월 3일 任瑞鳳供. 이것은 영조가 왕위를 불법으로 계승하였으며 경종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점을 은연중에 암시함으로써 자파세력의 명분과 기반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영조 원년(1725)의 李天海 사건은 이러한 흉언이 빚어낸 사건이었다.390)≪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5, 5월 2일 任還供. 영조 2년 2월 경종 재위기간을 亂世로 단정한 노론 任徵夏의 상소로 인하여 파문이 크게 일어났으나 그 형벌이 유배에 그치자 무신당의 선전과 조직화는 유리한 국면을 맞기도 하였다.391)≪英祖實錄≫권 9, 영조 2년 2월 무인. 무신당은 소현세자의 증손인 密豊君 坦을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노론이 효종의 혈맥을 강조하였다고 한다면 무신당은 소현세자의 적통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신당은 “도적이 외방에서 일어나면 경중에서 내응한다”고 하는 外起內應의 기본전략을 확정하였다.392)≪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9일 韓世弘供. 이러한 외방기병·경중내응 방침은 당시 삼남에 편만한 유민과 그에 기반을 둔 녹림당을 적극 끌어들이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각 도를 주관하는 인물이 선정되었다.

충청·경상·전라도의 파는 서로 다른데 전라도 괴수는 成玉이며 경상도 괴수는 鄭桐溪의 증손이며 충청도의 괴수는 權道衡으로 자를 伯升이라 하는데 처음에는 청파에 살았다가 流寓하여 청주에 있으면서 소북을 칭한다(≪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7일 羅崇大供).

 여기에서 나머지 두 사람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鄭桐溪의 증손은 정희량의 부가 되는 정중원이었던 것으로 보면 ‘괴수’는 단순한 명화적수가 아니고 인근의 사족·토호의 움직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가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인근 사족에 반정명분을 전파하고 또한 녹림당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정도령’을 자임하던 정세윤은 일찍부터 변산적을 중심으로 호남 녹림당과 체결하고 있었으며, 정희량은 영남에서 병사를 일으켜 상응하기로 하고 祖墓를 천장한다는 구실삼아 전곡을 비축하고 가동과 民丁을 모으기 시작하였다.393)정석종, 앞의 글(1994), 148쪽. 이인좌는 “지금이 말세인데 儒生, 業武라 하더라도 어찌 무릎을 궤고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안동, 상주 사족의 궐기를 촉구하고, 그 매부이던 나숭대를 통하여 호남 녹림당과도 연결을 맺었다.394)≪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11일 權榘供·권 4, 4월 25일 李燾供. 근기에서는 소론계 御醫 출신 任瑞鳳의 동생 任瑞虎가 정세윤을 도와 동병을 주관하였다. 외방에서의 거사준비가 진행되면서 외방 지휘권을 둘러싼 분란이 있기도 하였으나 이인좌가 이를 주관하도록 결정되었다. 그는 남인 명가의 후광을 배경으로 근기·호서·영남 세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자임할 수 있었다. 무신당의 반정시도는 이인좌·정세윤 및 정희량 등이 체결한 재지토호 및 녹림당의 동원 및 기병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서울의 주도층은 영조 3년(1727) 6월이 되어 경중내응을 위해 군사와 군자를 동원하고 모집하는 회합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던 차에 다시 소론정권이 들어섰다. 을사반옥으로 정권을 잡기는 하였으나 신임옥으로 그 세가 크게 위축되었던 노론은 이미 權相夏系가 정치권에서 떨어져 있었으며 또한 閔鎭遠의 洛黨과 李宜顯의 花黨으로 분립하였는데, 삼남의 대흉황으로 각처에 유민이 분출하는 상황에서도 영조가 “사사로운 복수를 앞세우고 국사를 뒤로 한다”라고 하였듯이 민정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였다.395)≪英祖實錄≫권 6, 영조 원년 6월 정묘·권 12, 영조 3년 7월 무오. 소론으로부터도 “사무에 능숙하고 거관중의 처사가 본받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緩老의 洪致中이 좌의정으로 있었지만 민심을 안정시키고 사회불안을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396)≪景宗實錄≫권 10, 경종 2년 12월 무진. 정미환국은 영조 3년 7월 초하루에 있었다. 그것은 서울의 주도층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노론이 그대로 있다면 일은 용이하겠건만, 지금 소론이 천만 의외로 다시 들어갔으니 비록 완소가 들어갔다고 하나 준소에도 희망이 있게 되었으니 무릇 인심이 조금이라도 느슨해 질 때 자못 영도(관직)로 부추기면 악심은 모두 해산하는 법이니 지금 洛中의 우리는 斂手觀望해야 후일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5, 5월 1일 任環供).

 일부 서울의 주도층은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인좌·정세윤 등의 지방 주도층은 그 계획을 밀고 나갔다. 다만 반정계획을 다소 수정하였다. 서울의 주도층 일부가 소론정권 아래에서 외직에 보임된 까닭이었다. 무신당은 녹림당을 기반으로 한 외방거사에서 관군까지 동원하기로 하였다.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박필현은 담양부사 심유현, 무장에 정배된 전참판 박필몽과 함께 관군을 동원하는 호남기병을 추진하였다.397)≪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4, 4월 24일 李之時供. 그는 평안병사 이사성이 기병하면 포도대장 남태징이 그에 응하고 또한 전라감사 정사효를 포섭하여 호응하도록 하여 호남기병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398)≪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5, 5월 8일 朴美龜供·권 3, 4월 14일 朴師寬供. 평안병사 이사성은 평안병영에서 쌀을 징수하였을 뿐인 ‘收米軍’을 실제 동원하여 전투할 수 있는 정병으로 만들고 그 習陣을 강화하는 한편 鐵車의 제작을 시도하는 등의 군비 강화를 꾀하고 있었다. 그는 병사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관군을 동원한 거사를 준비하였던 것이다.399)≪英祖實錄≫권 13, 영조 3년 10월 임인.
≪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25일 李思晟供·권 5, 5월 8일 趙東奎供.

 한편 호남 및 경상좌도의 토호는 자파 수령의 부임과 함께 그들과 접촉하여 외방거사 준비에 적극 참여하였다. 고부의 송하, 부안 김수종, 진주 李德一, 순창 梁翼泰 등은 박필현·심유현 등과 접촉하면서 그들 휘하의 가노와 녹림당을 시켜 전주·남원·옥구·임피 등 전라도 각처에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내용의 괘서를 살포하고 호남 유민이 근기로 유입되는 길목인 여산의 산에 올라 같은 내용의 구호를 크게 부르짖기도 하였다.400)≪英祖實錄≫권 14, 영조 3년 12일 정유.
≪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8, 7월 10일 姜渭徵供.
정희량의 심복인 鄭倬도 괘서사건에 가담하였다. 또한 도성에서 동원할 장사를 무장하기 위하여 담양관고의 화약을 빼내서 포도대장 南泰徵의 집으로 운반하였다.401)≪英祖實錄≫권 15, 영조 4년 정월 무인.
≪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권 5, 5월 10일 朴美龜結案·권 10, 기유 정월 19일 李命根供.
‘변산적’의 소문은 더욱 널리 유포되었다.

이른바 邊山賊의 소문은 역시 苗脈이 있습니다. 金守宗은 집안이 부유하고 奴僕이 많았는데, 그 집은 변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먼저 朴弼顯이 50여 인을 이끌고 黔毛浦로 가서 그를 만나고, 弼夢도 茂長에서 재차 수십 인을 이끌고 배를 타고 김수종의 집에 모여 모의를 하였는데, 이로 인해 변산적의 소문은 더욱 퍼지게 되었습니다(≪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7, 6월 21일 高應良結案).

 그런데 지방관으로 내려가 있던 무신당은 관군 등이 중심이 되어 거병하기로 하고, 지방 토호와 녹림당을 그 후원 내지는 거병의 보조세력으로 편제하려 했다. 나주세력이나 근기세력도 그들이 동원한 녹림당은 박필현 등이 거사하면 그 후원이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李昈가 말하기를 박필현이 泰仁軍을 이끌고 전주를 함락하면 이호 자신은 그 후원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몸에게는 성 안팎의 촌민 백여 명을 이끌고 이호와 같이 또한 후원이 되어 범궐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7일 羅崇大供).

 그러나 근기 및 변산세력과 긴밀하게 결탁한 정세윤은 녹림당 세력을 주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는 금위영의 조총 수백 자루를 모르게 매입하여 근기지방의 녹림당을 무장하도록 조치하였다.402)≪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15일 安炡·李檉·李溢面質.
≪南征錄≫(계명대학교 소장) 3월 24일.
또한 부안의 김수종 등으로 하여금 태인현감 박필현과 합세할 수 있으면 합세하지만 독자적으로 거병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김수종은 그 휘하의 노속 50여 명을 편대하는 한편 부안·고부의 진사·유학 및 파총·초관 등을 동원하기로 하였다.403)≪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7, 6월 21일 高應良供. 한편 정세윤은 이사성의 평안병영을 찾아가 군사를 모집할 수 있는 군자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 때 이사성은 그 계획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많은 군병을 얻을 필요는 없다. 만약 적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있으면 국가는 반드시 나를 장수로 삼아 격퇴하게 할 것이다. 이 때를 틈타 군병을 합하면 수월하게 힘이 될 것이다(≪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14일 安煌供).

 그는 녹림당의 독자적 거병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호남과 근기의 녹림당을 불신하였다.

사람들이 저처럼 忙迫하니 골칫거리이다. … 전라도에 도적이 있다 하나 壯士 4, 5백 인이고 陽城의 도적도 4, 5백 인을 넘지 못해 허술함이 막심한데 이로써 무엇을 족히 하겠는가(≪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9일 韓世弘供).

 이처럼 지방에서는 토호 및 녹림당이 주도가 되어 거병하려는 움직임이 계획되는 속에서 외직에 복귀한 일부 무신당이 관군을 중심으로 거병을 계획하면서 적지 않는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다. 일면 “정해진 계략이 없고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왔다”고 하는 한계가 내포된 것이었다.404)≪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9일 韓世弘供. 그러나 지방에서는 관군 중심인가 녹림당 중심인가의 차이는 있지만 거사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변산적의 존재는 호남유민이 근기로 대거 몰려듦에 따라 더욱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영조 4년(1728) 정월까지도 서울의 주도층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정미환국 이후 서울 주도층은 정세의 변화를 관망하고 더 이상의 활동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인좌 등의 지방 세력과의 마찰도 일어났는데 그는 “일은 끝이 없는데 同黨은 매우 적다”는 말을 듣고 “어찌 在鄕者를 속이며 일을 꾸몄느냐”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405)≪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26일 李麟佐供. 서울 세력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더욱이 정세윤 등이 녹림당을 주도로 외방기병을 구체화하는 이상 “가만히 있어도 화를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406)≪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10일 韓世弘供·권 5, 5월 1일 任還供.

 먼저 서울 주도층은 도성의 여론과 인심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主上이 弑逆을 하였다”는 내용의 괘서를 종루와 서소문에 살포하였다.407)≪英祖實錄≫권 15, 영조 4년 정월 무진·2월 무술.
閔鎭遠,≪丹岩漫錄≫(≪稗林≫9), 188쪽.
탕평파 조현명의 집에도 흉서를 보냈다. 그리고 외방기병이 이루어지면 서울과 여주 이천에서 사노층, 전호 그리고 향도군을 매수하여 군사를 삼아 성중을 교란시키고 이 틈을 이용하여 소론 당국의 핵심 인사들인 李光佐·李森 등을 살해하기 위한 장사를 모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密豊君 坦의 4촌으로 禁軍의 별장으로 있던 李思周나 좌포도대장 南泰徵, 그리고 지평현감 南壽彦을 포섭하여 관군을 동원하고자 하였다.408)≪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18일 愼光遠, 金重萬面質·3월 25일 李有翼供 및 권 3, 4월 9일 韓世弘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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