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영조 4년(1728) 3월 초순부터 근기지방과 전라·경상도에서는 외방기병을 위한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정세윤 등은 김수종·성득하 등 부안세력의 거병을 지휘하기 위하여 부안(변산)으로 내려갔으며, 안동·상주에는 이인좌의 동생인 이웅보(이능좌)와 표종제인 조세추 등이 파견되었다. 이인좌 자신은 안성·양성·진위 등지에 양반과 마병 50여 명을 포함하여 약 300여 명의 군사를 몇 군데로 나누어 집결시켰다.409)≪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16일 金重萬供. 영남과 호남에서의 군병이 오기를 기다려 합세하기 위함이었다. 한세홍은 평안병사의 거사 상경을 촉구하기 위해 평양병영으로 떠났다.

 양성·진위 등지에 모인 녹림당은 노속, 협호(리하인), 화전민, 전호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는 변산적과 통하던 세력도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칼 등의 무기를 가진 자는 10명 중 1명 정도이었고 나머지는 장대를 들고 있는 정도였다.410)≪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16일 莫實·金重萬供 및 3월 17일 安簿供. 근기의 반군은 고변의 징후가 있자 몇 곳에 분산되어 있던 군사를 素沙坪으로 집결하였다. 이 때 다소 군기와 마필이 보충되면서 대오를 정비할 수 있었던 素沙陣은 청주로 진격하였다. 당색이 다른 병사가 청주병영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영남과 호남의 군사가 오기 전에는 도성으로 진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411)≪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26일 李麟佐供. 그러나 녹림당이 주축이 된 반군의 규모나 전력으로 청주성 점령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반군측의 선전선동은 이를 수월하게 하였다. 이 때 선전선동은 일부의 소론·남인·소북 등의 지방관이 모두 거사에 가담하였으며 해서 관서지방도 모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전라도에서는 태인의 박필현과 담양의 심유현이 기병하여 李明誼가 전라도 도원수가 되고 전라병사 趙儆이 후원이 되며, 또한 경상도에서는 이현좌(이인좌)가 장차 8만병을 몰고 온다”고 하고, 나아가서는 “도성은 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잠입하여 내응을 하는데 각창과 군기고가 하룻밤 사이에 불탄다”는 등의 내용이었다.412)≪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16일 金玉成供·4월 25일 張欽供 및 권 2, 4월 1일 李光積供. 지리산·변산의 屯聚賊이 의병이 되어 근기로 몰려오며 이 때에는 鄭都令의 편에 서야 살 수 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413)≪勘亂錄≫권 5, 5월 신유 湖西按撫使金在魯狀啓.

 이런 상황에서 근기 호서의 행정·치안이 마비되어 吏民이 도산하고 모두 도피하는 형국이 되었는데 이 틈을 이용하여 반군은 청주성의 장교와 향리를 포섭하고 민가와 상통하여 쉽게 청주를 점령하였다.414)≪勘亂錄≫권 1, 3월 을축. 다음날부터 청주와 인근 지방의 사태는 급변하였다. 연기군에서는 파옥사건이 일어났고, 청주 북면에 거주하는 유학 柳海는 명화적으로 체포되어 있던 중에 방면되자 기꺼이 반군에 가담하였고 문경의 적수 李奉春도 감옥을 빠져나와 청주의 반군에 가세하였다.415)≪戊申別謄錄≫1책, 3월 17일 忠淸監司權詹狀啓.
黃翼再,≪華齊集≫권 5, 素患錄 戊申日記.
근기·호서의 200여 명에 이르는 남인·소론계 사족이 청주의 반군진영에 합세하였다.416)≪南征日錄≫권 1, 3월 19일. 그리고 좌수를 지내고 향교의 수임을 지낸 자를 비롯하여 향임층과 군관층이 대거 합세하였다. 당시 반군에는 “양반과 서얼을 칭하는 자들이나 교활하여 군역을 피하고자 하는 白民”이 많이 참여하였고, “적도에 들어간 자들이 새로 이방이나 사령·급창이 되었고 서얼들은 이 때를 맞이하여 어깨를 으쓱대며 적진에 투입하였으며” 좌수를 지내고 향교의 수임을 지낸 자, 그리고 향임층과 군관층이 대거 합세하였다.417)≪戊申別謄錄≫2책, 3월 27일 南漢巡撫使 金東弼狀啓·3책, 4월 22일 忠州牧使金在魯狀啓. 반군에는 피역층과 서얼 그리고 양반을 모칭하는 세력을 비롯하여 향임, 관임을 얻으려는 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반군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면서 인근의 황간·회인·청안·목천·진천 등지에 반군측 수령이 파견되었다. 반군측도 “살인하지 않으며 재물을 빼앗지 않는다”라거나, “군역과 신역을 제감한다”는 등의 민정책을 반포하기도 하고 또한 민심을 회유하기 위하여 전곡과 포목을 나누어주었으며 또한 관노비에 상급을 내리고 환곡을 분급해주었다.418)≪英祖實錄≫권 19, 영조 4년 10월 무자.
≪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2, 4월 5일 李廷說供.
당시 민의 자발적인 참여는 매우 광범하였다. 당시 공주에 퇴거한 양반은 일반 행인이나 상인 등이 기꺼이 참여하는 것을 보고 그 형세를 이렇게 적고 있었다.

밭가는 자에게 애휼을 베풀고 행인을 죽이지 않으니 思亂의 백성과 怨國의 무리가 모두 흥이 나서 용감하게 적진에 들어갔다. 적세는 날로 치열해지니, 행로에서 투입한 무리는 죽을 각오를 한 군졸이 되었다(≪戊亂錄≫3월 22일).

 호남에서 금위영과 어영청으로 번상하기 위해 도성으로 가던 5哨에 달하는 군병이 반군에 들었는데 그를 만류하는 양반에게 이렇게 항변하였다.

進士같이 국가의 은혜를 입고 국가의 養育을 받으면 국가가 이렇게 되었을 때 힘을 다하겠지만 우리 옷 우리가 입고 우리 음식 우리가 먹는 우리 ‘꾼’(軍)에게 국가는 무엇이겠습니까(≪戊申勘亂日記≫권 1, 3월 18일).

 여기에는 국가에 대한 강한 불신과 부정의식이 깔려 있음을 보겠는데 이리하여 불과 2, 3백 명으로 시작한 반군의 세력은 각처·각층의 이반세력의 궐기를 유도하며 청주를 점령한 이후에는 처음의 10여 배로 늘어났다.419)≪湖西散人實記≫권 1, 年譜 本邑趙僉正某戊申日記. 이처럼 반군세력은 근기·충청지방의 민심이반을 기반으로 청주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그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남과 호남에서의 거병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안동·상주의 사족층은 피난하거나 협조하지 않았으며 좌수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다른 향임층도 가담하지 않았다. 반노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경상좌도의 사족은 거사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론에 기대한 거병은 실패하였던 것이다.420)≪勘亂錄≫권 4, 4월 병신, 曹世樞供. 결국 안동이나 상주에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능좌·정희량은 경상하도를 중심으로 기병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안음현의 50여 호의 鄕品의 협조를 얻어 안음현감을 구축하고 곧 거창현도 점령하였다. 합천 굴지의 大姓이었던 曹聖佐도 향청의 전폭적인 협조를 이끌어내고 합천군을 장악하였다. 삼가·함양 등에서는 수령이 정희량과 조성좌의 기병 소식에 접하고 방비를 서둘렀으나, 오히려 향청 등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반군측에 가담하고 말았다. 이 형세는 실로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수령들이 도망가서 피흘리지 않고 석권함”과 같았다.421)≪南征日錄≫권 2, 3월 27일 沃川郡守林世濂諜報 嶺南大元帥檄文. 이같은 순조로운 거사는 상주 안동과는 달리 향청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여기에 흉년을 당하여 제반 부세의 납부를 강요당하던 민인들이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성은 해마다 흉년으로 기갈이 들었는데 춘궁을 당하여 미포의 독납이 있으니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차에 적의 무리가 창곡을 분급하고 그 마음을 기쁘게 하며, 소를 잡고 술을 빚어 배를 채워주니, 오로지 양민이 본심을 잃고 투입하였다(≪南征日錄≫권 2, 4월 2일 慶尙監司黃璿牒報).

 그러나 이 지방에서의 거병이 성공하였다고 하여도 안동·상주의 기병이 성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라좌도와 연계되지 않고서는 다른 지방으로 그 세력을 확산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전라도에서의 기병도 주도층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필현의 관군 중심적 거병은 실패하였다. 그는 태인군을 이끌고 전주로 향하였으나 전라감사가 거부하자 곧바로 도망하고 말았다.422)≪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9, 8월 5일 李長郁供. 녹림당과 연결하여 오랫동안 양병하며 이인좌·이호 등과 체결하였던 나주세력도 가문 내의 일부 반대가 있자 거사에 참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423)≪戊申別謄錄≫2책, 3월 29일 南漢巡撫使金東弼狀啓內 尹熙慶招辭. 고부·순창 등지의 녹림당을 지휘하였던 송하세력은 박필현과 협력하여 괘서를 살포하기는 하였으나, 군사적인 행동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무릇 임실 回美山 속에는 많은 도적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 때를 틈타 작변하고자 하였습니다. … 그런데 필현의 무리와는 계략과 모의가 다른 듯 하였는데 아마 필현의 무리가 기병하여 팔로가 소란하면 저들은 그대로 호남에서 할거하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勘亂錄≫권 4, 4월 정유)

 정세윤과 직접 체결하고 있었던 변산의 金守宗·成得夏 세력만이 적극적으로 거사에 들어갔다. 관군 중심의 전주 점령이 실패하였음에도 그들은 청주 반군과 합세하여 안성과 죽산의 전투에 참여하였다.424)≪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7, 6월 21일 高應良供.

 평안병사의 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기에서 모군이 한창 진행되는 3월 6일 평양으로 떠난 한세홍은 평안병사 이사성으로부터 가을을 기다려 거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평안병사 이사성은 움직이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근기의 반군은 청주를 점령하여 근거를 확보하였지만 부안·변산의 일부 세력을 제외하면 영남과 호남의 반군과 합세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정부는 용인 어비곡에 퇴거하고 있던 奉朝賀 崔奎瑞가 급변을 알림에 따라 서울에 그 내응세력이 있을 것임을 간파하고 내응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였다.425)≪英祖實錄≫권 16, 영조 4년 3월 갑자·병인. 정부는 궐문과 성문의 파수를 강화하고, 각 진에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를 증파하여 외방인이 성내에 유입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그리고 도성에 살고 있는 김일경 등의 가속이나 己巳大臣의 자손을 투옥하여 내응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검속하였다. 또한 쌀값이 등귀하면 민심이 동요한다는 이유로 세곡을 성내로 운반하였고, 재정난을 이유로 체불된 공인의 역가와 관료의 삭료를 미리 지급하였다. 이러한 치안·사회정책과 함께 都城死守論과 漢江守備令이 하달되었다. 무신당의 경중내응도 정부측의 효과적 대응으로 좌절되었다. 황해도와 강원도에는 향병징발령을 발동하였다. 그리고 소론 오명항을 도순무사로 삼아 관군을 남파하였다.

 청주 반군은 각처의 동조세력에 飛檄을 띄우면서 도성으로 진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도 각처의 유민·상인·화전민이 새로이 합세하여 일단 진천을 경유하여 안성·죽산에 이르렀으나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주하게 되었다.426)≪英祖實錄≫권 16, 영조 4년 3월 계유. 이로부터 반군에 동조하였던 향촌의 사정은 크게 변하였다. 반군에 가담하였던 군관·장교층은 반군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반군의 지도자를 체포하고 그를 토벌하는데 가담하였다.427)≪湖西散人實記≫권 1, 年譜. 각처에서 ‘倡義軍門’이 결성되고 이들이 반군을 색출하는데 앞장섰다. 청주성은 사족 朴敏雄이 결성한 창의군문에 의하여 수복되었다. 창의는 주로 향소를 중심으로 속오군을 단속하고 노비층을 동원하는 차원에서 퇴각하는 반군세력의 색출 등을 담당하였다. 여기에는 경리청의 차인으로 興販料理로 민생을 침학하였거나 향임으로 荒政에서 죄를 얻어 정배된 자들도 창의에 적극 참여하였다.428)≪景宗實錄≫권 15, 경종 4년 8월 정사.
李匡德,≪冠陽集≫권 9, 湖南御史書啓別單.
≪戊申別謄錄≫4책, 6월 21일 忠淸兵使趙儆狀啓·23일 湖西按撫使 金在魯狀啓.

 경상도에도 소모사가 부임하고 행정기구가 정상화되면서 사족층은 ‘義兵軍門’을 결성하였다.429)黃翼再,≪華齊集≫권 5, 素患錄 戊申日記. 3월 말경부터 서원과 향교가 중심이 되어 가솔·가노를 징발하여 대오를 편성하였다. 서원·향교·서당·부민 등은 군자를 기부하였다. 경상좌도의 ‘의병군문’은 거창·안음의 경상하도 반군세력을 군사적으로 토벌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방행정의 공백을 메우고 치안상태를 유지하는 한편 관고를 단속하고 백성이 무단으로 이탈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수준이었다. 경상하도의 진주·거창 등지의 창의는 관군의 군사행동에 따라 군량를 보조하며 첩보활동을 수행하였다. 창의는 소수의 향리가 향소를 중심으로 가솔을 동원하는 수준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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