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무신란은 당론으로 국왕을 선택하는 정변차원의 반정운동에서 발단하였다. 이를 초기부터 주도한 무신당은 조선 후기 격화일로의 붕당대립의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무신당에 참가한 세력은 갑술환국·신사옥·병신처분·을사반옥 등을 거치면서 노론측으로부터 ‘干犯名義’로 지목되었으며, 또한 반노론의 당론 때문에 관직 진출이 여의치 않았거나 뜻을 펴지 못하는 교목세가의 후손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老論이 아니면 남으로 가던지 북으로 건너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여 노론정권 아래서는 宦路가 막혀있던 세력이었다.430)≪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5, 5월 7일 趙觀奎供. 따라서 이들의 경제활동이 권력층의 그것에 비해 원활할 수도 없었다. “우리 친구들은 가난하다”고 하였던 이유익은 ‘청탁·수뢰·구걸·방납’을 생활수단으로 삼고 있었다.431)≪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5, 5월 2일 洪啓一供. 이인좌는 “협민의 鐵治의 이익을 강탈한다”는 비판을 들었는데 광산업에 종사하였을 것이다.432)≪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2, 4월 6일 金弘壽供. 이런 과정에서 경제적 몰락이 심하여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신당에 가담한 이인좌·이호를 사위로 맞이한 까닭에 국청에 잡혀온 尹鑴의 넷째 아들 尹景濟는 그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다.

갑술년에 경중에서 임천으로 이사하여 7, 8년을 지낸 후 다시 선세의 분총이 있는 공주로 옮겨갔습니다. 그것은 약간의 묘토를 경작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수년 전에 장녀를 칠곡 양반가에 시집보내고 또한 칠곡인의 딸을 처로 삼은 관계로 두 군데로 姻家가 되었는데, 아들과 사위 등이 그 土俗이 淳厚하고 전토가 또한 비옥하니 2, 3인가로 경작하고 남은 땅을 병작을 주면 百口의 배고픔을 면할 것이라고 누누이 말했습니다. 가난하여 멀리 이사감이 심히 어려웠는데, 옮겨가려고 할 때에 이 몸이 妻喪을 당하여 객지에서 喪葬의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워 墓下의 논을 전부 팔아 장사를 지냈던 것입니다(≪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8, 7월 1일 尹景濟供).

 당대의 명가였던 윤휴 후손의 경제적 몰락상은 초년에는 직접 농사를 짓지 않아도 가마와 마차를 부릴 정도로 여유가 있었으나 말년에는 입추의 땅도 없이 궁벽하게 되었음을 한탄한 李瀷의 처지를 연상하게 한다.433)韓㳓劤,≪星湖李瀷硏究≫(서울大 出版部, 1980), 26쪽. 이러한 상황에서 이유익은 “성인이 못될 바에야 차라리 임꺽정과 같이 되어야 하겠다”고 하면서 기존 질서에 강한 반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434)≪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5, 5월 20일 洪啓一供. 또한 여주의 조덕규 같은 사족은 강변의 漁箭 등은 1인이 세습하거나 혼자서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고 강변인 모두의 公共의 물건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 역시 독점 운영의 주체가 바로 집권 사족층이라는 점에서 느끼는 비판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435)≪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0, 12월 26일 丁錫震供.

 경종의 즉위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정치진출의 호기가 되었다. 이인좌는 생포된 이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평생 술을 좋아하였는데 경종을 위하여 일을 도모한 8년간 술을 끊었다”고 한 것은 바로 경종 즉위를 정치권에의 진입의 기회로 포착하려는 염원이 그만큼 절실하였음을 토로한 것이다.436)≪南征日錄≫권 2, 3월 24일.
≪湖西散人實記≫권 1 年譜.
그러나 경종 즉위 이후에도 소수 준소를 제외한 다수의 소론은 ‘간범명의’로 지목된 남인(탁남)이나 소북에 대하여 가혹한 경계를 긋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세력에 더하여 남소탕평을 주도한 김일경 등의 준소는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을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혈통에 따라 반정의 목적을 가지고 무신당을 결성한 것이다. 무신당은 선대로부터의 당론에 의한 정치적 경험의 공유 내지는 가문간의 세교와 인척으로서의 유대 등을 매개로 결성되었다.

 경종 2년(1722) 간행된≪錦城三稿≫에 의하면 나주의 나만치·나숭대 등의 선조인 나덕명 3형제는 鄭介淸의 문인으로, 鄭汝立 사건으로 일어난 己丑獄에 연루되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광해군과 鄭文孚를 도와 함경도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나씨 3형제는 이덕형·한백겸과도 절친하였는데 바로 나만치 등도 그 혈손들인 이지인·한세홍 등과 세교를 맺고 있었다.≪금성삼고≫의 서문은 鄭重元과 閔昌道가 썼다. 나만치 등의 나주세력과 이지인·한세홍 그리고 정중원과 민창도의 아들인 정희량과 민원보도 모두 무신당에 들었던 것이다. 갑술옥 당시 감사를 지낸 李雲徵의 손자이며 기사대신의 1인이었던 李義徵의 종손으로 숙종 21년(1695)에 출생하였던 이인좌의 경우도 제(이능좌) 재종형(이일좌) 표종재(조세추) 4촌동서(이호) 매제(나숭곤) 등이 무신당에 가담하였다.

 무신당이 당론에 따른 반정을 기도함에 있어서 외방에서 기병하고 서울에서 내응한다는 기본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음은 지방사족·토호층이 가세하고 녹림당이 이에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토호는 지방의 상권과 수공업을 장악하고 많은 토지를 소유하면서 노비와 협호(籬下人)를 적지 않게 거느리고 있었던 鄕曲의 부자였다.437)≪備邊司謄錄≫85책, 영조 5년 4월 8일. 이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은 있었을지라도 노론세가와 연계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집권관료에 의하여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처분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괴산의 李時薰, 공주의 李之時 등은 노론계 관료 때문에 노비소송에서 낭패를 당하고 산소를 탈취당하기도 하였으며 노론 李縡가 대사성이었을 때 과거에 합격하고도 낙방으로 처리되었다. 또 이들은 治盜과정에서 적도의 누명을 쓰기도 하고 변산적간에서는 수령에 대항한 죄로 유배당하기도 하였다.438)≪繡衣錄≫갑오 10월 9일 京畿暗行御史魚有龜書啓 振威.
≪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2, 4월 2일 李檉供·4월 6일 金弘壽供 및 권 4, 4월 25일 李之時供.
이러한 세력이 외방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군자를 제공하였던 것이며 각처의 녹림당과 체결하여 이를 동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사회경제적으로 몰락하여 儒醫·地師로 각처를 유랑하거나 “매우 가난하여 땅과 노비도 없이 고역에 종사하거나 薪木을 파는 일”을 하였던 몰락양반도 가세하였다.439)≪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2, 4월 2일 朴天齊供. 이들이 거사에 적극 가담한 것은 “무신년에는 素服이 일어나는 해이다”라거나, “무신년에는 白衣書生이 조정을 채울 것이다”와 같이 무관사족을 벗어나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440)≪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3, 4월 15일 安錠·李聖·李謚一處面質 및 권 4, 4월 23일 蘇檉供·4월 30일 羅斗多供 및 권 5, 5월 10일 朴美龜·柳晉禎面質.
관작은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역할과 위치에 따라 제시되기도 하였는데 지방토호에게는 대체로 수령이나 만호 등의 직책이 약속되었다.
그들은 국왕선택으로 빚어진 권력투쟁을 “남아가 때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441)≪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1, 3월 20일 安樞供.

 무신당은 이같은 토호 및 몰락 양반을 통하여 녹림당을 동원하고 당색이 같은 사족들의 궐기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신당에 의한 사족의 궐기와 외방토호의 거병계획은 그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외직에 나가있던 반노론 사족 관료는 그들 대부분이 이를 회피하였으며 퇴거하였거나 유배된 경우에도 그에 응하지 않았다. 부안의 토호와 변산적의 일부 동원이 있었으며 경상하도에서의 몇 개 군에서의 동참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청주 점령 이후 반정세력의 규모는 크게 확대되고 안성, 죽산전투로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에는 향촌사회에서 많은 민중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처의 향족, 향품 등의 재지세력을 비롯하여 군관, 교생, 서얼 그리고 私奴, 婢夫, 通引, 官奴 그리고 군역을 지고 있는 일반민이 가세하였던 것이다. 피역층도 다수 가담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군관·교생은 정부에서 명호를 인정한 대신 1필을 납부하도록 하는 조치에 대하여 이를 군역민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혐오하였다.442)≪英祖實錄≫권 7, 영조 원년 8월 갑술·권 11, 영조 3년 정월 기해. 또한 일반 농민은 인징, 첩징의 중압을 당하고 있었다. 한 반군 참가자는 그에게 부과된 군역세의 가중함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이 몸의 사촌되는 敏悌는 騎兵이고 그 두 아들은 砲保軍과 軍餉保였습니다. (그들이 도망하여) 이 몸이 그들의 일족이라고 하여 3명의 身役과 還上을 납부하였던 것입니다(≪推案及鞫案≫戊申逆獄推案 권 2, 4월 6일 林益齊供).

 조선사회 신분제와 군역제에서의 피해계층이 대거 참여하였던 것인데,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 농민은 흉년을 당한 상황에서 각종 부세의 독려에 고통을 당하던 차이었다. 정부와 지배층은 그다지 효과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당시 정부도 이런 사정을 인정하였다.

해마다 흉년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정령은 고식에 머무니 부세가 백골에 사무치며, 조정은 서로 창칼을 드리대고 수령은 탐학하여 더욱 곤궁하게 되는데, 사무는 완고하여 날을 보내고 풍속은 날로 사치해졌다(≪勘亂錄≫권 4, 4월 임인).

 李瀷도 무신란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병란의 배경을 설명한 적이 있다.

오로지 문벌을 숭상하면 才能人이 思亂하고 나라에 罪籍이 많으면 坐罷人이 사란한다. 政刑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忿嫉者가 사란하고 濟活이 제 때를 맞추지 못하면 困窮者가 사란한다(李 瀷,≪星湖僿說≫권 7, 人事門 衰季思亂).

 그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광범한 이반계층의 결합에 의하여 병란이 일어남을 암시하고 있다. 국가의 민정, 형정의 실패에 따른 민심이반과 저항에서 병란의 주체적 한 조건을 찾았던 것이다. 당시 중세적 신분제와 국가정책으로 인하여 민생의 곤란을 겪거나 상승과 성장에 장애를 당하게 되었던 여러 사회계층이 지배층의 권력투쟁을 기화로 그들의 이해를 관철하고자 그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아직은 민중 스스로의 주도성에 바탕한 주체적 운동을 펼쳐나간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무신란은 비록 정변차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지만 17세기 후반 이래의 하층천민 및 상민층의 운동과 상공인 세력의 움직임, 실세한 양반층의 움직임, 그리고 여기에 ‘극적’의 존재가 영향을 끼치며 가세하여 거대한 병란으로 폭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신란은 어느 한 세력의 독자적이며 자기 완결적 체계 안에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 계층 내면의 취약성을 잇고 있는 여러 세력간의 상호 연대 복합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무신란은 조선 후기 정치체제·권력구조의 내부갈등에서 발단되었지만, 유명 사족이 민중을 동원하여 감행한 최대 규모이면서 최후의 권력투쟁인 동시에 16, 17세기 이래의 고립적·국부적 민중운동의 흐름을 수용하고, 당시 각 사회계층의 이반행동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었던 데에서 조선 후기 민중운동의 질적 비약의 계기를 조성하였다고 하겠다. 이후 조선 후기 민중운동이 사족층의 탈락과 배제를 수반하면서 殘班·향임층을 주도층으로 하여 하층민을 여러 형태로 동원하였던 발전단계를 거쳐 잔반과 하층민의 일체성을 바탕으로 성숙단계로 이행한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볼 때 무신란은 민중운동발전의 필연적 통과점으로서 과도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李鍾範>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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