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1)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가. 서북지방의 사회사정

 星湖 李瀷은 “關西는 우리 나라 인민이 처음 시작된 곳이나, 聖朝에서 殷頑과 같이 여겨 물리쳐버렸으므로 인재가 꺾였다”443)李重煥,≪擇里志≫星湖 李瀷 序.고 하였고, 李重煥도 서북지방에 사대부, 즉 사족이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는 ‘서북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 까닭으로 평안·함경 두 도에는 삼백 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 혹 과거에 오른 자가 있다 하여도 벼슬이 수령 정도였고, 가끔 臺諫과 侍從 망단자에 오른 자가 있었으나 또한 드물었다. … 또 나라 습속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서 서울 사대부는 서북지방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서북 사람도 또한 감히 서울 사대부와 더불어 동등으로 여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서북 양도에는 드디어 사대부가 없게 되었다(李重煥,≪擇里志≫八道總論 咸鏡道).

 이와 같이 서북지방은 중앙정부의 정치적 차별로 인하여 관직 진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사족층은 형성될 수 없었고 설사 사족이 있다 하더라도 지배세력을 형성할 만한 양적 수준을 이룰 수는 없었다. 따라서 “西土는 진정으로 토착적 기반이 있는 士夫가 없고 다만 군포를 납부하는 자와 불납하는 자 사이에 약간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444)金祖淳,≪楓皐集≫권 10, 書, 上金領相載瓚.라고 하듯 사족적 기반이 뚜렷하지 않았다.

 한편 ‘儒’와 ‘鄕’ 즉 士族과 鄕品의 구분은 사족지배체제 내의 지배계층의 존재양태를 설명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고 양자의 향권을 둘러싼 갈등은 체제의 유지와 동요를 결정하는 계기로 설명되고 있다.445)金仁杰,<朝鮮後期 鄕權의 추이와 지배층 동향>(≪韓國文化≫2, 1981). 그런데 이와 같은 유향의 분기도 서북지방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龍城誌≫에 따르면 유임을 지낸 자는 향임에 나갈 수 있으나 향임을 지낸 자가 유임에 들어오는 것은 격례에 크게 어긋난다고 하여 경계를 정해야 한다고는 하였지만, 그것은 다만 이상적인 원칙일 뿐 실제로 儒와 鄕은 나누어지지 않았고 그것이 이 지역의 옛부터의 풍속이라고 지적되고 있었다.446)≪龍城誌≫(≪朝鮮時代 私撰邑誌≫51, 平安道篇 7, 韓國人文科學院) 古今事蹟, 219쪽.

 이처럼 서북지방에는 사족의 존재가 뚜렷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배세력의 구성이 삼남지방의 사족지배체제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족이 없었던 서북지방에서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고의 지배계층은 향인층이었다. 향권이란 궁극적으로 경제적 지배를 의미하고 향권의 행사는 부세운영권의 장악을 통해 실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의 부세운영을 주도하던 계층은 향인층이었다. 따라서 향인층이 이 지역 최고의 지배계층인 셈이다. 그러면 향인층이 지배하는 서북지방 향권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제 부세운영의 내용을 통해 향권의 성격을 살펴보기로 하자.

 평안도 지역의 부세운영의 특징은 ‘邊邑無王稅’447)≪正祖實錄≫권 45, 정조 20년 8월 임진.란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大典會通≫에 “서북의 稅穀은 본도에 놓아두고 함부로 옮기지 못하도록 한다”448)≪大典會通≫戶典 收稅.라는 규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지역이 국가수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다만 그 수세의 최종적 주체가 중앙정부가 아니고 지방관아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북지방은 세는 거두지만 그 양이 적을 뿐 아니라 그것이 중앙정부로까지 올라오지 않고 자체 처리되고 있었다. 중앙재정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독립성이 국가수세의 집중적 대상이었던 삼남지방에 비하여 서북지방의 부세운영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한 일차적 원인이었다.449)高錫珪,<18세기 말 19세기 초 평안도지역 鄕勸의 추이>(≪韓國文化≫11, 1990), 346∼347쪽. 더구나 앞서 보았듯이 이 지역에는 사대부가 살지 않기 때문에 사대부가 사적으로 운송하는 것도 거의 없었다.450)李重煥,≪擇里志≫ 卜居總論 生利. 따라서 사족의 향권에 대한 간섭은 본래부터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의 부세운영권 즉 향권은 향임층이 잡고 있었으며 향임층은 이서층과는 부세운영에서 상하의 수직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부세행정에서 향임층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향임층 곧 향인층이 어떻게 부세조직을 장악하여 운영하고 있었는가는 江界府의 功曺所 운영에 잘 나타나 있다. 숙종 18년(1692) 부사 裵正徽 때 작성된 규정에 따르면 공조소의 임원 및 그 담당업무는 다음과 같았다.

座首 1인은 禁蔘都監을 겸하고 各倉·軍器·常平·六房 및 제반 邑事를 관장한다. 別監 3인 중 1인은 官廳·禮房 등을, 1인은 府倉·兵房·刑房·司獄 등을, 1인은 營繕·工房·田案 등을 각각 담당한다. 다만 지금은 전안의 경우 例兼을 罷하고, 都監을 따로 정하되 좌수를 거친 부류 가운데에서 擬望하여 差出한다(≪七郡圖經≫江界誌 功曺所(≪朝鮮時代私撰邑誌≫55, 平安道篇 11, 62쪽).

 여기서 좌수와 별감이 부세행정 전반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좌수와 별감의 차출 규정을 보면, 좌수는 향사당 執事가 좌수를 望報하는데 鄕先生에게서 추천을 받은 후 時任鄕長 및 都公司員과 상의하여 차출토록 하였다. 별감은 좌수가 망보하는데 역시 鄕執事가 향선생의 추천을 받은 후 향장 및 도공사원이 재결하여 首·副·末·從으로 순서를 정한 망단자를 공조소로 이송하면 공조소는 官家에 轉報하여 차출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좌수의 차출은 전적으로 향인층의 자율적 결정에 따르고 있으며, 별감의 경우만 부분적으로 지방관의 통제를 받아 차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좌수와 별감이 일읍의 부세행정을 모두 관장하고 있었다. 이처럼 부세권을 조직적으로 확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향인층은 거의 절대적인 향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족이 거의 없었던 서북지방의 최고의 지배계층은 바로 이 향인층이었다. 丁若鏞이 田政 운영으로 井田九一法에 다음가는 좋은 법으로 들고 있는 이른바 ‘西北之法’451)西北之法에 대해서는 고석규의 앞의 글, 349∼350쪽 참조. 역시 이서층보다는 마을의 호걸로 표현되는 향인층에 의한 부세운영방식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쪽지방의 아전들은 교만하고 사치하고 방자하여 아전 자리를 대대로 전하는 일이 드물어서 오히려 북쪽의 아전이 그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니 역시 아전에게도 복된 일이 아니다”452)≪牧民心書≫戶典 稅法.라고 하여, 아전 즉 이서층이 향인층의 통제 아래 부세운영에 종속적으로 참여하여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이서층 스스로에게도 좋다고 하였다. 鄕人-吏胥의 계서적 관계가 서북지방의 부세조직의 특징이며 이는 향촌지배의 바람직한 질서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갖는 서북지방의 지배질서 곧 향인층에 의한 지배질서는 16세기 중반경 율곡향약의 시행을 계기로 서북지방 일대에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특히 평안북도 지역은 임진왜란 때의 군공을 계기로 그들을 중심으로 확고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을 고비로 그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유지되어 왔던 향인들의 지배질서에 동요가 나타났다. 즉 영조 35년(1759)에 도신 閔百祥이 그 폐단을 지적하여 新鄕의 許錄을 금지시켰다는 것은 그 동요의 증거였다. 新鄕許錄의 금지에 따라 ‘鄕廳’이란 이름도 혁파되었다. 더구나 정조 14년(1790) 정주에서의 新鄕濫錄의 일, 이른바 정주매향사건으로 인하여 용천부의 鄕錄은 벽 속에 넣어 봉해버리고 감히 追錄하지 못하게 하였다.453)≪龍城誌≫(≪朝鮮時代私撰邑誌≫51, 平安道篇 7) 留鄕, 158∼160쪽. 정주의 향사당도 신향들의 紛拏 때문에 營門의 分付에 따라 혁파되었다.454)≪定州邑誌≫(≪朝鮮時代私撰邑誌≫48, 平安道篇 4) 公署, 286쪽. 다만 그 후 순조 2년(1802)에 의주의 경우, 부윤 任焴에 의해 향사당이 개건되었고,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된 읍지≪龍灣誌≫가 순조 10년에 간행되었으며, 정조 20년(1796)에 간행되는≪龍城誌≫에서는 향록이 봉해진 후 기존의 鄕班들이 ‘留鄕先生案’이란 것을 읍지에 신설하여 향안에 대신하려고도 하였다.455)≪龍城誌≫ 留鄕. 이는 기존의 향인층이 신향의 성장에 따라 상실하여 가던 그들의 지배력을 명분적으로나마 만회해보려는 시도들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신향층에 의한 향촌질서의 재편은 되돌릴 수 없는 추세로 진행되어 나갔다. 다만 신향층의 성장에 따른 향권의 동요는 이들에 의한 지배질서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洪景來亂을 일으키게 되었고, 난이 실패로 끝난 결과, 향권의 주도세력이 전면적으로 재편됨에 따라 또 다른 변동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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