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1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중앙의 정치집단에는 京華巨族이라는 서울에 근거를 둔 명문벌족이 대두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나갔다. 이는 부의 비중이 농업에서 점차 상업을 바탕으로 한 유통경제로 옮아가고 이에 서울이 그 중심지로 되고 있었음과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었다.482)高東煥,<18·19세기 서울 京江地域의 商業發達>(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이제 지방에 근거를 둔 정치집단이란 중앙정치의 역학관계에서 더 이상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한편 吏曺 郞官權의 폐지를 계기로 명예를 바라는 마음들이 없어지고 오로지 사리만을 쫓기 때문에 외직을 중히 여기고 내직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 모두 감사나 수령이 되고자 하며 염치 따위는 아주 버려서 뒤돌아보거나 꺼리는 일이 없었다.483)李重換,≪擇里志≫ 卜居總論 人心. 名州 饒邑의 수령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乞郡’의 폐라든가,484)≪英祖實錄≫권 65, 영조 23년 6월 경자. 朝士들이 ‘군읍을 다투는 일(郡邑之爭)’이 근래의 고질적 폐단이 되었다든가 하는485)≪英祖實錄≫권 67, 영조 24년 4월 병자. 지적들은 이제 지방사회가 이러한 중앙정치집단의 침탈에 무방비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하여 준다.

 중앙권력으로부터의 침탈은 수령권을 매개로 구조적으로 자행되었다. 따라서 수령권은 중앙권력으로부터 비호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령권은 관주도 향촌통제의 매개로서, 강화의 측면에서 논의되었다. 정조 19년(1795)에 수령권 남용이 문제가 되었던 창원부사 李汝節 사건의 경우에 ‘수령의 권한이 없어짐(命吏無權)’을 우려하여 가벼운 형벌에 그치고 있었음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령권의 남용은 정조대에만도 여러 차례 지적되고 있었을 만큼 일상적 현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와 같이 수령권 강화의 이면에 존재하던 수령권 남용현상은 19세기에 들어 왕권이 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자 더욱 왜곡되어 나타났다.486)金仁杰,<19세기 전반 官主導 鄕村統制策의 위기>(≪國史館論叢≫6, 1989), 172∼173쪽.
高錫珪, 앞의 글(1989b), 90∼93쪽.

 순조 16년(1816)에는 고창현감 徐良輔가 官廳의 吏胥와 그 아버지를 때려 죽이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좌의정 韓用龜는 선조대 함경남도절도사 蘇潝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북도의 官奴 2인을 죽였을 때 李珥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인다(殺人者死)”는 법에 따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되었는데, 서양보의 경우도 거기에 해당하지만 그가 지금 죽인 자는 官長을 詬罵한 下吏이기 때문에 ‘傷命’으로 처리한다면 官과 吏의 위계가 무너질 것이라 하여 次律로 처리할 것을 청하여 그렇게 되었다.487)≪純祖實錄≫권 19, 순조 16년 3월 기해. 여기서도 수령권 보호가 우선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수령의 고과에 대한 평가도 문란해졌다. 그 중에서도 재상들의 자제나 豪富世族 출신의 수령들에 대하여는 臺臣들도 공격하지 않았고 형법도 미치지 않았다. 따라서 이익은 오로지 이들 勢家에게만 돌아가고 있었다.488)≪正祖實錄≫권 3, 정조 원년 4월 기미.

 수령은 권문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서북지방이 그러하였다. 영조 51년(1775) 9월에 대사헌 李溎는 “大臣들이 수년 동안 일삼은 것은 貨利의 문을 크게 열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여 그 탐학을 비난하고, 이어서 그 근거로 대신이 강계부사에 武臣 李達海를 천거해 줄 것을 이조판서에게 청탁했던 사실을 지적하였다.489)≪英祖實錄≫권 125, 영조 51년 9월 신해. 또 정조는 평안도관찰사 沈頤之를 불러 자리에 합당치 못한 수령이 많이 있다고 하면서 “경은 수년 동안 正卿의 지위에 있으면서 어찌하여 이러한 무리들을 두려워 하는가. 迎送의 폐를 염려하지 말고 반드시 懲礪의 道를 생각하라”490)≪正祖實錄≫권 29, 정조 14년 2월 갑인.고 할 정도로, 관찰사는 수령에 대한 견제 역할을 거의 방기하고 있었다. 정조 원년(1777) 6월에는 평안도관찰사 徐命膺이 寧遠郡守에 대한 殿最를 잘못했다고 하여 파직되는가 하면,491)≪正祖實錄≫권 3, 정조 원년 6월 기미. 순조 5년(1805)에 평안감사 李勉兢은 전최에서 수령의 경우 下로 평가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邊將의 경우도 中이나 下로 평가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여 추고되었다.492)≪日省錄≫순조 5년 12월 15일. 평안도청남암행어사 洪秉喆은 미친 도깨비와 같은 행위를 하였다고 비판받기도 하였고,493)≪純祖實錄≫권 7, 순조 5년 11월 신축. 청북암행어사 李元八과 함께 뇌물을 받았다는 죄로 논박되었다.494)≪純祖實錄≫권 9, 순조 6년 11월 경신.

 그 이듬해에는 前博川郡守 白東脩와 前江西縣令 金基彦이 賣鄕과 民庫의 일로 贓律을 범했는데도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이 일은 그로부터 평안도의 탐묵한 수령들이 이를 응당한 예로 삼아 거리낌없이 수탈을 자행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495)≪純祖實錄≫권 9, 순조 6년 6월 신사. 그러한 수탈행위는 끝간데 없이 자행되었고 심지어 좌의정의 지위에 있던 김재찬이 스스로 ‘貪吏는 民國의 원수’라고 하면서, 그 폐해를 지적하였다.

근래 듣건대 수령이 개인적인 일로 인하여 말미를 얻어 서울에 와 있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도신들이 용이하게 말미를 허락하여 주고 수령 또한 어렵지 않게 서울에 머무릅니다(金載瓚,≪海石日錄≫4책, 순조 8년 5월 22일).

 이러한 지적은 京華巨族-道臣-守令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수탈체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령은 경화거족의 대리자로서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의 일선에 나서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순조 연간에도 수령권을 옹호하는 정부의 입장은 계속되었고 이는 수령권을 매개로 한 무절제한 수탈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평안도 지역은 앞에서 보았듯이 상업적 발달로 인해 주목되고 있었고, 또한 사족과 같은 견제세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价川郡守 田德顯과 같은 경우는 암행어사의 보고에서 “이익이 있는 곳에는 禮義를 가리지 않고, 재물이 모이는 곳에는 生死를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지적되기까지 하였다.496)≪日省錄≫순조 5년 12월 16일. 循吏라고 하여도 기껏해야 잘못을 가리는 것을 능사로 여길 뿐 전임자들의 행위를 그대로 답습할 뿐이었다.497)≪日省錄≫순조 11년 4월 22일.

 비변사의 議薦대상 관직 가운데에서도 서북 양도의 관찰사와 의주부윤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양도에서의 대외무역의 활성화는 그 통로에 있는 이 지역들의 경제적 비중을 한껏 높여주었다. 비변사가 이들의 인사에 주요하게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이들을 통한 경제적 부의 실현이란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498)오종록, 앞의 글, 558쪽.

 평안도 지역이 세도정권의 물질적 기반이 되고 있었음은 평안도관찰사 자리의 위상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조 22년(1798) 3월에 閔鍾顯이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499)≪正祖實錄≫권 48, 정조 22년 3월 을유. 정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정에 규모가 없음을 꾸짖었다.

箕藩(평안도관찰사)은 비록 중요한 자리이지만 대개 亞卿(종2품∼3품)으로 差定하여 보낸다. 그런데 이번에 廟堂에서는 冢宰(正卿:종1품∼정2품)를 첫번째 후보자로 천거하였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은가. 時任 총재는 비록 大司馬의 重任일지라도 擬望할 수 없는데 方伯이 비록 중하다 하지만 대사마에 비교하면 오히려 가볍다. 뿐만 아니라 이번의 廟擬는 ‘亞卿 중에서 擬望하는 예’에도 크게 어긋난다(≪正祖實錄≫권 48, 정조 22년 4월 임인).

 이는 이조판서로서 총재의 자리에 있던 민종현이 곧바로 평안도관찰사로 부임되어 감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러나 그 임명이 번복되지는 않았다.500)민종현은 그 해 12월에 평안도관찰사로서 임지에서 죽었다(≪正祖實錄≫권 50, 정조 22년 12월 무오). 여기서 우리는 평안도관찰사 자리에 ‘亞卿 중에서 擬望하는 例’를 어겨가면서까지 時任 이조판서가 기꺼이 나가려고 했다는 점에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평안도관찰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經世遺表≫에 따르면 황주목사의 연봉이 3만 냥이었던 데 비하여 평안감사는 연봉만 해도 무려 24만냥에 이르렀다.501)丁若鏞,≪經世遺表≫권 7, 地官修制, 田制 9. 이는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평안도 지역의 경제적 성장과 그에 따른 이원의 확대라는 조건이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평양은 지방관 자리 가운데 ‘第一의 腴邑’이라 불리게 되었다.502)≪正祖實錄≫권 49, 정조 22년 8월 기해.

 순조 연간의 대표적인 세도가 金祖淳이 “관서는 大藩이다. 재부와 화려함이 나라에서 최고이다. 옛부터 재상들이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에 나가고자 하는 자는 항상 이 자리를 배회한다”503)金祖淳,≪楓皐集≫권 15, 記, 挹灝樓重修記.라고 하여, 평안감사 자리가 재부와 화려함으로 인하여 재상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평안도가 중앙권력의 가장 주요한 수탈 대상이었고 중앙권력의 사적 경제영역을 뒷받침하는 물적 기반이었음을 고백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중앙권력에 의한 집중적 수탈대상이 되고 있었던 평안도 지역에서 그 수탈을 담지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은 사회적 잉여를 창출하던 부민층이었다. 수탈의 수단이 삼남지역과 같은 농업지대에서는 都結의 형태로 귀결되었다면504)安秉旭,<19세기 賦稅의 都結化와 封建的 收取體制의 해체>(≪國史館論叢≫7, 1989). 평안도 지역에서는 환곡에서의 ‘大中小排戶之法’ 즉 ‘擧給’과 군정에서의 戶布法, 그리고 민고에서의 富民都監 등으로 나타났다.505)고석규, 앞의 글(1990), 368∼377쪽 참조. 그런데 이런 운영방식들은 부민층에게 보다 많은 부담을 지우고 있었다. 물론 부민층의 부담이 크다는 것은 부세부담의 균등이란 점에서 보면 진보적 의미를 갖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부민층은 그 진보적 의미를 수용하기보다는 사유재산에 대한 침탈로 인식하고 있었다. 수령의 입장에서도 균등한 수세보다는 부민층을 일차적 수탈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부세징수의 임무를 용이하게 처리하고 아울러 사적인 부를 늘리는 수단으로까지 이용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조치들의 진보성은 전혀 의미를 지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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