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2) 항쟁의 과정
  •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평안도지역에서는 18세기 중엽에 경제적 성장에 기초한 신향층의 대두로 인하여 기존의 향촌지배질서는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향권은 原鄕이라 불리는 기존의 향인층에서 신향층에게로 옮겨가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신향층을 이루는 모집단인 부민층이 수령권에 의한 주요한 수탈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수령권과 그에 기생하는 일부 원향층에 의해 주도되는 향촌지배질서는 부민층의 지속적 성장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본다면, 부세수탈을 자행하는 수령권과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던 기존의 향촌지배질서에 대하여 부민층을 중심으로 한 서북민이 저항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저항의 궁극적 목표는 수령권에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官家는 부민들이 원망하는 곳이다”506)≪日省錄≫순조 11년 윤 3월.라 함은 부민층 일반이 관가 즉 수령권에 대하여 심각한 불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었다. 따라서 18세기 중엽 이후 수령권에 대한 여러 형태의 저항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몇몇 사례들을 통해서 그 구체적 양상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정조 14년(1790) 4월 평안도관찰사 심이지의 장계에 따르면, 渭原의 읍민이 관아의 뜰에서 칼을 빼들었다는 사실을 들어 막대한 변괴라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일이 여기에 이른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라고 하면서 전위원군수 柳增萬의 위법 사례를 지적하였다. 즉 천여 결의 田摠에 대해 200결의 俵災를 내려 주었는데도 把束조차도 민에 나누어 주지 않은 채 防役이라 하여 모두 사사로이 써버렸고, 아래 사람들의 급료를 엄하게 깎아 관용에 보탰고, 倉監을 차출하면서 많은 賂錢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해가 환곡을 받는 백성들에게 미쳤다는 등의 일을 지적하였다.507)≪日省錄≫정조 14년 4월 17일. 즉 田政이나 賣鄕 등으로 인한 수령권의 대민 침탈 또는 관속에 대한 억압 등이 위원 읍민의 저항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 19년(1795)에는 楚山府 阿耳鎭에서 鎭卒인 崔奉德이 僉使 李信馨을 구타한 일이 발생하였다. 즉 최봉덕은 本城의 里長이었는데 그 여동생이 淫奔의 죄를 지어 鎭婢가 되었다가 도망가자 첨사가 그에게 잡아올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응하지 않자 이에 곤장을 치고 가두려 하였으나 곤장을 빼앗아 부러뜨리고 칼을 뽑고 몽둥이를 휘둘러 첨사를 구타하고 도망쳤지만, 곧 잡혀서 효수된 일이 있었다. 이는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나 영조 50년(1774) 會寧府民이 아버지가 부사 趙圭鎭에게 매맞아 죽었다고 하여 복수하겠다고 부사에게 덤벼든 일과 함께 “민이 관을 범했다(以民犯官)”는 차원에서 논의되었다.508)≪日省錄≫정조 19년 7월 8일.
≪正祖實錄≫권 43, 정조 19년 7월 무오.
이는 그만큼 수령권에 대한 저항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수령권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는 사건들이었다.

 그런 중에서 정조 21년 价川郡에서 있었던 鄕任과 武任 간의 싸움은 향권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평안도안핵어사 呂駿永의 장계에 따르면 사건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509)≪日省錄≫정조 21년 10월 6일. 4월에 장교 金晦恒이 군수와 함께 外倉에 나갔다가 본읍의 軍器에 관한 일로 推考의 명을 받아 황송하게 여기면서 관아에 돌아왔는데 鄕廳의 임원들이 나와 맞이하지 않았다. 김회항이 이로 인하여 향임들을 비난하였다. 그러자 향임들은 “양반이 상한에게서 욕을 당했다”고 관에 고하였고, 이에 김회항은 “너희들이 비록 양반이라 칭하나 향임자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비록 武列에 있으나 본시 사족의 소생이니 어찌 凌踏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여 상호 쟁변을 벌임으로써 鄕·武 간에 쟁단이 일어났다. 이에 향임측에서는 玄在黙 등의 주장하에 玄在欽이 통문을 돌려 향인 800여 인을 이끌고 綸音을 받들고 와서 향회를 열었다. 향인들은 거의 玄哥 세력이었다. 그 향회의 목적은 향인들의 세력을 과시함으로써 김회항을 관에 일러 죽이고자 하는데 있었다. 그러자 장교배들이 윤음은 事體가 지극히 敬謹하니 무단히 받들고 올 수 없다고 하여 빼앗아서 東軒에 奉安하였다. 그러자 향인배들이 관정에 돌입하여 김회항을 죽일 기세로 덤벼들었다. 관가에서 이를 물리치자 김회항의 집을 부숴버리고 장교배들을 구타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營門에 呈訴하여 군수를 誣告하였다. 6월 기묘에510)≪正祖實錄≫권 46, 정조 21년 6월 기묘. 올린 평안도관찰사 朴宗甲의 馳啓에서 현재묵이 一邑의 巨猾로서 예전의 직함을 믿고 官庭에 作拏하고 民家를 사사로이 부수며 土主를 誣辱하였다고 하여 엄하게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呂駿永이 안핵어사로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현재묵은 일찍이 登科하고 典籍511)≪正祖實錄≫권 40, 정조 18년 7월 무신., 外臺(都事) 등을 거치는 등 관서지방에서는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朝官의 세력을 믿고 鄕議에 간섭하고 주장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512)≪日省錄≫정조 21년 10월 6일.라고 하듯이, 중앙권력과의 연고를 배경으로 향권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일종의 토호였다. 그리고 이들 현가 세력을 중심으로 鄕案入錄을 허락하여 뇌물을 받는 등 평일의 기세가 대단하였다.513)위와 같음. 안핵어사도 현재묵에 대해 “조관이라 칭하면서 향권을 손에 쥐고 몰래 일을 도모함이 극히 낭자하다”514)위와 같음.고 하였듯이 현가들은 곧 원향들로서 향권을 장악하고서 매향 등을 주도하는 등 각종 비리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鄕武爭端은 장교배들이 수령권에 접근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자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그 쟁단의 성격은 여준영이 “처음의 뜻은 수령을 죽이고자 한 데서 나왔는데 마침내는 향전으로 돌아간 듯하다,”515)≪日省錄≫정조 21년 10월 28일.고 하였듯이, 향전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수령권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성격이 앞서 있었다. 정조 14년(1790) 정주 매향사건의 경우라면 결탁했을 두 세력 즉 수령권과 원향세력이 여기서는 대립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수령권을 매개로 한 중앙권력의 수탈이 심화됨에 따라 토착적인 현재묵 세력의 이해와 충돌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과는 현재묵이 絶島에 刑配됨으로써 중앙권력의 비호 아래에 있던 수령권의 승리로 끝났다. 현재묵은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여 곧 죽고 말았다.

 이는 수령권 대 원향층 간의 대립의 한 사례이며 수령권이 향촌사회의 어떠한 재지세력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원향층마저 배제할 정도로 수령권의 자의적 수탈이 행해지고 있었음도 보여준다. 이는 곧 수령권에 대한 향촌 사회세력들의 종속이란 결과를 이끌었겠지만, 역으로 수령권에 대한 저항이 있을 때 수령권은 향촌의 모든 세력들로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평안도의 인접 지역인 함경도의 단천·북청에서 1808년에, 황해도의 곡산에서 1811년에 각각 나타나고 있었다. 단천·북청의 작변과 곡산지방 농민항쟁은 홍경래 난과 시기적으로 이어지며 사건의 전개에서도 유사한 세력배치를 보인다.

 단천과 북청의 경우는 양자 모두 그 주도세력은 다르지만 수령권의 향권침탈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516)≪日省錄≫순조 8년 3월 22일. 먼저 단천의 경우를 보면, 순조 8년(1808) 정월 3일에 본읍의 노소 향인들이 향청에 전례대로 모여서 民事를 논의하는데 거기서 지난번에 허물이 많았다고 하여 좌수 沈趾源을 몰아냈다. 그러자 좌수의 편을 들어 수백의 향인이 몰려들어 다툼이 일어났고 公堂에 올라가 부사 金錫衡을 몰아내기까지 하였다. 부사는 처음에는 書室에 숨어있다가 다시 將廳으로 도망하여 5일 동안이나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 후 부사는 향전이라 하여 이를 주동한 金亨大 등을 着枷하여 嚴囚하였다. 이는 단천부사 김석형이 향권을 천단하고자 향회를 구실로 좌수를 몰아내었고 그러자 기존의 향인층이 이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역시 수령권 대 향인층 간의 대립의 한 양상이었다.

 그런데 6월 17일 함경도관찰사 曺允大의 謄報에는 부사 김석형의 탐학불법한 죄를 상세히 보고하고 있어 작변의 원인을 보다 정확히 규명할 수 있다. 그 죄목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座首·鄕所·倉監·中軍으로부터 千摠·哨官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임에 대한 賣任과 津浦 船舶의 商稅에 대한 科外疊徵, 그리고 公稅를 무시한 礦銀의 勒奪 등이었다. 이는 곧 수령권에 의한 수탈의 대상이 신향층과 상업, 광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민층 일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향인층을 중심으로 한 작변은 바로 이러한 수탈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북청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부사 沈厚鎭이 부임한 후 倉穀 500여 석과 大同別需錢 만여 냥이 流來의 포흠으로 그 때까지 덮어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首鄕(좌수) 金元厚와 倉監(鄕所) 李仁赫을 시켜 그 수를 조사케 하여 逋欠穀을 거두어 들이고자 하였다.517)≪日省錄≫순조 8년 4월 11일. 그러자 利를 잃게 됨에 원한을 품은 吏輩들이 吏案에서 이름을 지우고, 3월 5일에 본부의 백명 가까운 이배들이 결당하여 향청에 돌입하여 좌수 김원후와 향소 이인혁을 나체로 구타한 다음 불태워 죽이려 하였고 나아가 부사 沈厚鎭까지 모해하고자 하였다.518)≪日省錄≫순조 8년 4월 9일. 이것은 부세 징수과정에서 있었던 수령권의 침탈에 대응한 이배들의 저항이었다.

 단천과 북청에서 있었던 이 두 사건은, 언뜻 보면 단천은 향인층간의 대립으로, 북청은 향인층 대 이서배의 대립처럼 보여진다. 즉 외형적으로는 향전의 성격을 지니나 단천의 향회나 북청의 좌수·향소는 이미 독자적인 세력집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령권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작변의 원인이 바로 탐묵과 다름없는 수령의 吏鄕差任에 있었다는 지적은519)金載瓚,≪海石日錄≫권 7, 순조 8년 4월 30일. 역시 대립의 성격이 향인층이나 이서층간에 있었던 향전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하여 준다. 따라서 향인층이나 이서층이 향회나 좌수, 향소 등을 공격하였다고 하여 저항의 최종적 목표가 바로 그들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이들에 대하여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수령권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난민들의 세만 강하였다면 그 저항의 목표가 수령을 넘어서 곧바로 감사와 병사에까지 미쳤을 것이라는 김재찬의 우려에서도 확인되며, 그러한 우려는 바로 홍경래 난에서 중앙권력에까지 확대되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520)金載瓚,≪海石日錄≫권 4, 순조 8년 4월 12일.

 특히 순조 11년(1811) 황해도 곡산농민항쟁의 경우는 부민층 일반이 수령권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521)곡산지방 농민항쟁에 대하여는 한상권,<1811년 황해도 곡산지방의 농민항쟁>(≪역사와 현실≫5, 1991)에서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전개과정이나 참가계층 분석 등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였다. 곡산에서는 관속과 부민, 상인들이 상호 결탁하여 상품경제를 통한 부의 축적을 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부사 朴宗臣이 이를 제어하고, 나아가 이러한 제어를 틈타 사적 이득을 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상업적 이해를 둘러싼 수령 대 관속·부민·상인의 연대세력간의 대립이 항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한 모순관계였다. 결국 관속·향인층의 농업세력과 邑里富民 또는 倉底富民이라 불리는 상업세력이 상호 연대로 수령권에 대한 저항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 점은 난의 전개과정에서뿐 아니라, 난이 끝난 후 곡산민들이 부사 박종신을 가서 죽이자고 도내에 발통하였을 때 鄕品官輩들이 착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522)≪日省錄≫순조 11년 4월 7일. 바로 수령권에 대하여 향인층을 중심으로 한 사회세력 일반이 함께 저항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업적 이해관계의 확대, 그 실현을 둘러싸고 결탁한 사회세력들과 이들을 수탈대상으로 하는 수령권과의 대립, 이것이 이 지역에서 당시의 주요한 대립의 내용이었다.

 저항의 궁극적 목표는 이처럼 수령권에 모아지고 있었다. 그 저항의 주체들은 향인층, 이서층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어느 층이든 이들이 수령권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그들의 이권이 침탈되었을 때였음은 물론이다. 이들의 이권의 공통적 기반은 앞서 경제적 성장 부분에서 상업의 발달이 두드러졌음을 보았듯이 상업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상업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이들은 하나의 세력집단을 이루어 수령권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북민에 대한 차별이라는 서북민 공통의 피해의식 역시 중앙권력의 대리자인 수령에 공동으로 저항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서북민 차별의 정도를 정조∼철종 연간의 문과 급제자의 분포를 통해 살펴보면, 민심수습책 정도의 형식적 의미만을 갖는 式年試의 경우에는 평안도가 전체의 26.2%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서울거주 京華子弟를 대상으로 하는, 따라서 중앙권력으로의 진출 집중도가 높은 別試의 경우에는 5.9%로 줄어들고, 더나아가 문신 가운데서 당상관의 일차적인 후보집단을 선정하는 都堂錄의 경우를 보면 함경·황해도와 함께 평안도에서는 단 한 사람도 오르지 못하는 기만적인 차별성을 보였다.523)남지대,<중앙정치세력의 형성구조>(≪조선정치사 1800∼1863 상≫, 청년사), 147∼159쪽.

 이러한 사정에서 중앙권력의 대리자인 수령권에 대항하여 서북민 일반의 반봉건적 저항이 일어났고, 이는 순조 11년(1811) 홍경래 난에서 농민들에 의한 거센 항쟁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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