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2) 항쟁의 과정
  • (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가. 지도부의 결집과 봉기 준비

 524)홍경래 난에 관한 주요한 연구로는 다음의 논저들이 있다. 이 중에서 전개과정의 전반부에 대해서는 오수창의 글을 주로 참고하였다.
小田省吾,≪辛未洪景來亂の硏究≫(小田先生頌壽紀念會, 1934).
홍희유,<1811∼1812년 평안도농민전쟁과 그 성격>(≪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이조편)≫과학원 역사연구소, 1963).
鄭奭鍾,<洪景來亂의 性格>(≪韓國史硏究≫7, 1972;≪傳統時代의 民衆運動≫하, 풀빛, 1981).
―――,<洪景來亂과 內應勢力>(≪嶠南史學≫1, 1985).
河原林靜美,<1811年平安道における農民戰爭>(≪寧樂史苑≫19, 1973;≪封建社會解體期의 社會經濟構造≫, 청아, 1982).
鄭昌烈,<조선후기 농민봉기의 정치의식>(≪한국인의 생활의식과 민중예술≫大東文化硏究叢書 I, 1984).
鶴園裕,<平安道農民戰爭における參加層>(≪朝鮮史叢≫2, 1979;≪傳統時代의 民衆運動≫하, 풀빛, 1981).
―――,<平安道農民戰爭における檄文>(≪朝鮮史硏究會論文集≫21, 1984).
高錫珪,<18세기말 19세기초 평안도지역 鄕權의 추이>(≪韓國文化≫11, 1990).
吳洙彰,<‘홍경래 난’의 주도세력과 농민>(≪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洪景來亂 봉기군의 최고지휘부>(≪國史館論叢≫46, 1993).
홍경래 난은 10년여의 오랜 기간 동안 준비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봉기의 준비 과정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洪景來였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같이 그는 家産을 돌보지 않고 집을 떠난 후 10년 만인 봉기 직전에야 돌아와 봉기지역으로 가족을 데리고 갔다. 이 10년이 곧 봉기가 구체적으로 준비되는 기간이었다. 홍경래와 禹君則이 처음 만나 친교를 맺은 것은 정조 24년(1800)이었으며 그 다음해인 봉기 10년 전에는 이미 兵亂을 함께 논의하였다. 봉기군으로 정주목사가 되었던 최이륜도 홍경래를 안 것이 7, 8년 전이었다고 진술하였다. 이와 같이 그 기간에 홍경래는 주도자들을 규합하는 한편, 중간 지휘층도 평안도 및 황해도를 중심으로 널리 포섭하였다. 진압군 左硝官 方禹鼎은 정주성 농성 중에 성 밖에 나와 싸운 신체 장건한 무리에 대해서 홍경래를 10여 년 동안 따른 善騎輩라고 설명하였는데, 그것은 주위에 널리 알려졌 있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어느 시점에선가 홍경래·우군칙 등의 주도자와 嘉山의 부호로서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 되는 李禧著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이희저를 끌어들인 인물은 우군칙이었다. 이희저는 봉기 수년 전에 多福洞에 기와집을 짓고 우군칙과 서로 어울리면서 준비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홍경래와 우군칙이 몰래 광산을 채굴하고 잠상을 했다는 진압군측 기록은 그들이 이희저의 자금을 기반으로 봉기를 준비하던 때의 행적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봉기를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때는 순조 10년(1810) 11월 무렵이었다. 우군칙의 공초에 의하면, 이 때에 홍경래를 다시 만나 그의 봉기 준비와 鄭眞人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화를 피하고자 이희저와 함께 영변 묘향산 아래 百寧村에 가서 피할 곳을 찾았다고 하였다. 이는 말을 바꾸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뒤 영변에 가서 봉기군의 새로운 기지를 물색하였다는 뜻이 된다. 이듬해인 순조 11년 정월에 곽산의 진사 金昌始가 나서면서 청북지역의 유력가와 부민들에 대한 우군칙과 김창시의 포섭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우군칙은 4월에 이르러 다복동에 30칸의 瓦家를 마련하였고 이희저의 사촌 李明云도 새로 집을 구입하여 중수하였다. 이리하여 가산 大定江邊의 요지인 다복동의 군사기지는 한층 강화되어 봉기의 본부가 되었다.

 홍경래는 그 해 7월 이후로 평소 포섭해 둔 각지의 장사들과 함께 다복동 우군칙의 집에 머물렀다. 8월에 황해도 船商을 칭하는 무리가 津頭 상인 김혜철의 집에 와서 며칠씩 묵으면서 주야로 상종하였다는 것은 각처의 장사들이 모여들고 있었음을 뜻한다. 한편, 부원수가 되는 金士用이 봉기군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었다. 김사용이 언제 봉기 세력에 가담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순조 11년(1811) 11월에 영변 김우학의 집에 가서 그의 참여를 끌어내었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다복동 우군칙의 집에서 봉기의 군사력을 다듬는 작업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홍경래가 모은 여러 인물들은 다복동 밖에서도 청천강 이북의 넓은 지역을 무대로 회합하면서 봉기에 대비하였던 듯하다. 朴三玉은 洪二八·金昌始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薪島 모의에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그 신도가 봉기군의 비밀 기지 중의 하나였다면, 그것은 용천 해상에 있던 섬이었을 것이다. 또 대동찰방 朴鳴和가 수집한 첩보에는 9월부터 홍경래·崔天杓 등이 선천의 劒山城에서 회합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창시가 이미 9월에 곽산의 金大薰(金大勛)에게 가서 봉기의 준비 상황을 선전하고 12월에 기병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못박은 일이 있었음을 볼 때, 적어도 그 시점에서는 12월에 기병하리라는 계획이 확립되고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는 남진군 선봉장으로 활동한 洪總角도 확실한 주도자로 활동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도 9월에 집을 떠나 한 번도 돌아가지 않으면서, 다복동의 우군칙 집에서 각 읍 용사들을 모아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10월에는 주요 참여자들이 모두 다복동에 모이면서 준비가 더욱 활발하여졌다. 11월 이후에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진두 대정강의 추도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康守興 父子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鑄錢 작업을 벌여 자금을 마련하였다. 이희저는 虎皮·鉛鐵 등의 軍需를 사들이고, 선천의 劉文濟·崔鳳寬이나 정주의 鄭振喬, 철산의 鄭復一도 무기와 軍旗 등을 다복동에 수송하였다. 김창시는 임신년에 기병이 있을 것이라는 妖言을 유포하여 민심을 교란하기도 하였다.

 참여할 군사력을 준비하는 일도 활발히 행하여졌다. 勇力이 있는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자원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그것은 공개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거사가 실행 단계에 들어갈 즈음인 10월에는 우군칙과 金惠喆이 박천 진두의 상인 姜得璜 등을 거느리고, 우군칙이 서울 물주의 자금을 받아 雲山 燭臺峰에 금광을 연다는 소문을 내어 광부들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농민 군사력을 다복동으로 불러들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다복동에서 봉기의 주도자 79명이 서로 서명하여 약속을 맺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정부측에 압수되어 ‘賊黨都錄’이라고 일컬어진 그 문서에 오른 사람들을 모두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에 부원수 김사용을 從事官으로 수행한 金大勛과 같이 봉기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의 이름이 들어 있던 것으로 보아 ‘적당도록’은 봉기의 일급 주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문서였음이 틀림없다. 동시에 이 ‘도록’에 이름은 올랐으나 참여한 혐의가 없거나 정도가 미미하여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는 사람들도 12명이 있다.525)≪關西平亂錄≫(亞細亞文化社, 1979) 3, 56∼66쪽의 劉碩·金龜郁供招.
≪純祖實錄≫권 16, 순조 12년 9월 기축.
도록에 오른 79인 중에서 이 12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봉기의 전개과정에 깊이 참여하였던 사람들이었다.≪陣中日記≫의 첫머리에 봉기 주체와 ‘渠帥’, ‘善騎’ 그리고 내응자들의 이름을 적고 있는데,526)≪陣中日記≫(≪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1811∼1812年의 農民戰爭篇 3>, 驪江出版社) 권 1, 신미 12월 18일, 131∼134쪽. 그 사람들의 수가 모두 59명인 것으로 보아 준비단계 및 봉기 당시부터 군사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60명 내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가 주모자 몇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계기만 주어진다면 농민들의 항쟁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였다. 홍경래 난에 몇 달 앞서 황해도 곡산에서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치열하게 저항했던 것이 바로 그 예이다.527)한상권, 앞의 글, 192∼202쪽. 실제로 홍경래의 거사는 당시 그 지역 기층민의 저항 분위기가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봉기는 12월 18에 있었지만 이미 10월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며, 적어도 11월에 이르러서는 시장에 출입하는 일반인들 사이에도 병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528)≪關西平亂錄≫4, 임신 2월 11일, 218쪽·≪關西平亂錄≫2, 임신 정월 29일, 524쪽 및≪關西平亂錄≫3, 임신 정월 2일 朴光有供招, 23쪽. 이러한 사실은 그 거사가 주도자 몇몇의 내밀한 음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정세와 민의 광범위한 공감 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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