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3) 항쟁의 결과
  •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이상에서 홍경래 난을 전후한 서북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사정을 검토하면서 서북지방 민중항쟁의 추이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서북민항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살필 차례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항쟁의 배경, 특성을 알아보고 거기서 나타나는 한계와 동시에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18세기는 농업 생산력 증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신분제 동요 등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중세사회가 해체되는 여러 모습들이 드러나고 동시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하던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상품화폐경제가 전체 사회로 확산되면 공동체적 기반이 흔들리게 되어 농민층 분해의 계기가 마련된다. 이러한 향촌사회의 분화과정 속에서 봉건모순은 심화되었다. 토지소유가 집중되면서 지주제는 강화되기도 하였다. 사족지배체제 아래에서는 지주-전호 간의 계급대립이 신분제를 매개로 하여 兩班士族 대 鄕村民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신분제가 동요하고 아울러 양반사족에 대한 官權의 우위가 점차 확고해져감에 따라 부세제도 운영을 둘러싸고 수령과 이서·향임층으로 이어지는 수탈층 대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피수탈층 간의 대립관계가 봉건모순을 총체적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이래 관이 주도하여 향촌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일련의 시도는 19세기 세도정권 아래에서는 수령권을 매개로 한 부세수탈의 강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때 정립된 수령과 이서·향임층 중심의 향촌지배체제는 세도정권의 지원 아래 중층적 수탈체계를 이룸으로써 사회모순을 심화시켜 나갔다. 더욱이 발달된 화폐경제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됨에 따라 수탈의 강도는 이전 시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이것이 19세기 농민들의 항쟁을 유발시키는 근원이었다.

 이처럼 19세기는 사회모순이 깊어지면서 사회적 갈등도 심해져 갔다. 그러므로 사회를 구성하는 각 계급·계층들은 각자의 위치에 서서 사회모순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다양한 저항을 통하여 스스로 각성하면서 봉건사회를 해체시켜 나갔다. 19세기 농민항쟁은 바로 이러한 조건 아래서 봉건적 사회관계를 변혁하려는 하층농민들의 반봉건항쟁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아울러 봉건사회모순의 담지자인 농민층이 그 모순을 해결하면서 스스로를 변혁주체세력으로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이러한 대립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가시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농민층은 분해하고 있었지만 아직 재편방향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립하는 세력의 양편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고 개별적인 지위상승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동목표를 가지고 공동투쟁에 나설 수 있는 저항세력의 결집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또 영·정조대 왕권강화에 기반한 개량화정책이 비교적 효율적으로 사회통합을 유지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사회모순의 심화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저항에 그쳐, 유리·도망하거나 도적집단이 발생하는 등의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 이전과는 달리 농민들의 직접적이고도 집단적인 봉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세기의 농민봉기는 18세기 농민저항이 토대가 되어 일어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저항이라는 공동경험의 결과, 농민들의 의식은 점차 성장해 갔다. 그리하여 농민들의 계급의식은 구체적인 저항을 거치면서 그들의 적이 누구인가를 규정함으로써 증오의 단계에 머무는 소극적 수준으로부터 자기들 스스로를 계급으로 결집하여 행동의 단계로 나아가는 적극적 수준으로 발전한다. 또한 농민들의 저항은 개인적·합법적 투쟁에서 점차 집단적·폭력적 투쟁으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전의 운동에 비하면 많은 촌락을 포함하는 하나의 군현 전체가 연루되었고, 홍경래 난의 경우는 수개의 도가 연계되어 일어났다. 이처럼 홍경래 난은 단순한 계급적 저항으로부터 계급의식에 기초한 집단봉기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이 시기를 특징짓는 저항은 국가-농민의 대립을 주요모순으로 하여 일어난 항쟁들이었다. 이는 다시 ‘變亂’과 ‘民亂’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581)‘변란’과 ‘민란’의 구분에 대하여는 고석규,<19세기 농민항쟁의 전개와 변혁주체의 성장>(≪1894년 농민전쟁연구 1≫, 1991), 332∼335쪽 참조. 변란은 혁명가적 성격을 갖는 자들에 의해 주도되며, 혈연이나 친분 등과 같은 개별적 이해기반에 기초하여 조직되었다. 鄭鑑錄 등과 같은 이상주의적 혁명이념에 의해 지도되며 중앙권력의 쟁취를 목표로 내걸었다. 홍경래 난은 변란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 作變들은 이를 모형으로 삼고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서북지방 출신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홍경래 난은 농민저항의 성장 위에서 서북지방의 지역적 특성이 결합되어 일어났다. 홍경래를 비롯한 ‘저항 지식인’들과 壯士층이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농민과 다를 바가 없었고 의식과 행동면에서 농민들과 강한 친화력을 가졌다. 또한 飢氓이라 불리던 빈민층의 자발적 참여는 이후 전개될 민란 단계에서 농민층의 적극적 참여를 예고하는 현상이었다. 장기간에 걸쳐 정주성에서 벌인 농민들의 치열한 투쟁은 농민들의 항쟁에 많은 기억을 남긴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만 농민 일반의 주체적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농민층 분해의 결과 대규모로 양산되고 있었던 빈농하층민들은 아직까지 독자적으로 반봉건항쟁을 일으킬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홍경래 난은 봉건사회 내에서 새롭게 성장한 신흥 상공업세력과 기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양반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반봉건투쟁이었다. 홍경래 난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재력을 가지고 농민출신의 광산노동자를 끌어들이고 훈련시켜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이씨왕조’를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지도부는 아직까지 상당 부분 봉건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홍경래 난을 정치·군사적으로 조직하고 지도한 명실공히 최고지도자였던 홍경래는 가난한 농민의 처지에 있었으나, 그의 신분계급적 처지로 보아 정치적 이념에서는 평안도의 신흥지주나 상인들의 입장에 있었다. 우군칙과 김창시는 평안도의 지주 입장에 있었으며, 이희저는 부상대고로서 향임층이었다. 또 내응세력이나 유진장의 성격을 통해서 볼 때, 봉기군의 상층부는 鄕武 중에서 富戶層 즉 新鄕層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신흥 상공인세력과 함께 향촌사회 내의 재지중간층으로서 부농적 입장을 대변하였다.

 상품화폐경제의 농촌침투는 소수의 농민을 부농으로 성장시킨 반면, 대다수의 농민을 빈농으로 몰락시켰다. 봉건적 생산관계는 부르주아적 성장을 지향하는 부농층에게는 타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질곡이었으며, 빈농에게도 최소한의 재생산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 관계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기 조선사회에서 부농층은 봉건권력의 강고한 탄압 속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계층이었다. 그들이 부를 축적하는 기반은 자본주의적 상품경제에 뿌리를 대고 있기는 하였지만, 봉건적 수탈관계에 편승한 부의 축적도 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반봉건투쟁은 봉건적 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농에게 향해진 일부의 봉건적 수탈체제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도한 홍경래 난에서는 봉건적 사회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이념을 제시하지 못한 채, 봉건권력의 교체에 항쟁의 우선 목표를 두었다. 다시 말하면 홍경래 난의 지향점은 반봉건성이라는 계급대립의 측면보다는 지방행정권, 나아가 세도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반정부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봉건항쟁으로서의 의미는 제한된 측면에서만 나타났다. 그래서 난의 와중에서 토지개혁, 신분제 폐지, 삼정개혁 등 빈농하층민을 위한 아무런 개혁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난을 패배로 이끈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한편 봉건사회모순을 서북민에 대한 정치적 차별로 왜소화시킴으로써 당시 봉건적 수탈에 허덕이고 있었던 삼남지역 농민들의 반봉건항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했다는 점도 난이 가진 한계라 할 수 있다. 다만 홍경래 난에는 신흥 상공업계층의 참여라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기적 현상도 내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홍경래 난은 이와 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봉건제의 위기가 점차 심화되는 가운데서 봉건정부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4개월 동안 항쟁을 지속함으로써 봉건권력의 도덕성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였다. 이는 그 후 반봉건항쟁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 핵심 주체세력의 역량이 당시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사회변화의 보편적 양상이 항쟁의 구도에도 반영되고 있는 증거로 홍경래 난은 체제 내부의 갈등이 아니라 체제 변혁의 시발점이란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582)吳洙彰,<洪景來亂 봉기군의 최고지휘부>(≪國史館論叢≫46, 1993), 260쪽.

 홍경래 난이 지닌 보다 중요한 의의는 피지배층으로서 통치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였던 하층농민들이 봉건왕권과 지배체제를 부정할 수 있는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농민들은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 홍경래이다. 진짜 홍경래는 살아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언젠가 올 봉건정부타도와 사회변혁의 기회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대중의 정치적 각성이야말로 농민항쟁의 수준을 결정적으로 높여 혁명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었다. 정치적 각성이란 계급의식의 성장을 뜻한다. 계급의식은 현실의 지배질서 자체에 대한 회의나 비판 또는 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계급적 저항행위의 정당성, 나아가 승리에의 확신은 계급의식을 확산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저항행위의 정당성, 승리에의 확신을 심어주는 역할은 鄭鑑錄이나 海島眞人說, 彌勒信仰 등이 맡았는데, 홍경래 난 이후에는 洪景來不死說이 강력한 대안으로 유행하였다. 홍경래불사설은 억압당하는 농민사회에서 스스로를 탈출시키기 위한 자기구제의 한 형태로 농민들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었다.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믿음은, 정의는 가능하며 가난한 인간도 무기력하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의식의 존재를 받쳐주었다. 특히 정감록을 이용하여 농민대중을 반봉건항쟁에 끌어들이려는 수법은 그 후 봉건정부를 타도하려는 각종 정치적 변란, 괘서, 흉서사건에 이용되었다.

 다만 이와 같은 것들은 농민들을 뭉치게 할 뿐이지 농민들을 조직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권력이전과 조직체계에 관한 이론까지를 제시해 주는 근대적 의미의 세속화된 혁명주의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에 기초한 운동은 혁명단계로까지 직접 내달을 수는 없었다.583)고석규,<18·19세기 농민항쟁의 추이>(≪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24∼25쪽.

 홍경래 난에서 농민들은 아직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스스로의 힘만으로 강력하게 실현시킬 능력이 없었다. 홍경래 난 때의 수동적 농민들은 정주성 내에 고립되어 항전하는 가운데 오히려 계급적 경험을 공유하면서 능동성의 단초를 보였다. 즉 민중이 형성되어가는 초보적인 단계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홍경래 난은 평안도 지방의 지역적 특성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올바른 이해가 어렵다. 평안도에는 일찍이 중앙정부의 차별로 인하여 사대부 즉 사족층의 형성이 어려웠다. 따라서 사족보다는 향인층이 향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을 지나면 중국과의 무역이나 수공업, 광산경영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나타나 신향층을 이루면서 이들 신향층에 의한 향촌질서의 재편은 되돌릴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그러나 신향층의 경제적 상승을 전제로 한 신분상승 욕구는 수령의 부민에 대한 수탈행위로 왜곡되면서 수령권 대 부민층의 대립이라는 갈등구조를 낳았다. 이런 구도 속에서 부민층을 중심으로 한 서북민의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1808년 함경도 단청과 북청의 작변, 1811년 황해도 곡산에서의 봉기에 이어서 그 해 12월 홍경래 난에서 수령권은 서북민 일반에 의한 거센 항쟁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순조 14년(1814)에 평안감사 정만석이 홍경래 난의 원인으로 부세문제 일반을 거론하면서 특히 軍政·田役·庫債 등을 시급한 것으로 들었다.584)≪純祖實錄≫권 17, 순조 14년 2월 무오. 이는 홍경래 난의 원인이 수령권에 의한 부세수탈에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한편 홍경래 난은 동시에 수령권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던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홍경래 난에서 봉기군이 타도대상으로 당시 세도가였던 金祖淳과 朴宗慶을 지적하고 있었음은 그 점을 명백히 하여준다.585)≪洪氏日記≫(≪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1811∼1812年의 農民戰爭篇 5>, 驪江出版社) 12월 30일 西賊檄文, 18쪽. 따라서 홍경래 난은 다분히 정변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난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이후 평안도 지역의 향촌사회 지배구조는 ‘의병’출신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의병’세력이 봉기군과 구별되는 점은 관권과의 결탁여부라고 할 때 이렇게 정립된 지배구조는 수령권과 유착관계를 이루었을 것이며 나아가 중앙권력으로부터 비호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의병’세력이란 테두리 내에서 향권이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상업도 관권과의 결탁을 전제로 한 특권적 독점을 지향하는 상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령권과의 결탁이란 측면은 순조 12년(1812) 이후 평안도지역에 자리잡은 ‘의병’세력 중심의 지배질서가 그보다 먼저 삼남 일대에 자리잡은 수령과 이·향 중심의 지배구조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양자 모두 국가-농민간의 모순을 부세수탈을 통해 심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반봉건항쟁은 전국적으로 19세기 내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高錫珪>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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