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다음은 항쟁의 직접적 계기에 대하여 살펴보자. 항쟁의 직접적 계기가 부세문제임은 중앙에서도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진주농민항쟁이 발생하기 직전에 경상감사 이돈영이 부임할 때 왕은 이 지역의 삼정의 폐단이 심하므로 그에게 이를 해결하도록 당부하고 있다.621)≪承政院日記≫2648책, 철종 13년 2월 20일.

 먼저 환곡의 실태를 살펴보자. 항쟁이 일어난 지역 가운데서는 환총이 많은 지역이 눈에 띈다. 가령 단성(10만 석) 군위(87,000석) 함평(11만 석) 등이다. 장성도 各穀 13만 석이 되어 限年排捧을 하고 있었다. 연산도 충청도에서 환총이 가장 많아서 15만 석인데 모두 虛留라고 하였다. 還摠이 많으면 자연히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盡分이 일반화되면서 환곡 부담은 한층 늘어났다. 단성의 경우에도 耗條가 結當 20냥, 포흠의 강제 충완 27,000석, 移貿에 대한 부담 등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환총과 관련하여 포흠이 과다하여 문제가 된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흠은 환총이 많은 경우와 직결되었다. 단성·군위·함평의 경우도 대부분 포흠이 문제가 되었다. 그 밖에도 경상도의 상주·성주, 전라도의 흥양·진안·무주 그리고 충청도의 회덕·임천·정산·은진 등도 포흠이 많은 지역이었다.622)특히 충청도는 전체적으로 포흠이 많았다. 충청도는 전체 70여만 석의 대부분이 포흠되었으며 실제로 남은 액수는 약 3만 석 정도였다(≪壬戌錄≫<釐整廳謄錄>임술 8월 2일).

 포흠의 주체는 吏胥였고, 이를 邑民에게서 징수하여 문제가 발생하였다. 환곡의 포흠문제는 단성·진주·성주·군위·인동·부안·화순·진안·흥양·고창·은진·공주·회덕·임천 등에서 제기되었고 그 밖에 밀양·순천·옥과 등에서는 환곡의 폐단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 경우도 포흠과 관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이들의 요구 조건에서 절실하게 드러난다. 가령 진주에서는 읍을 공격하면서 ‘吏逋徵民’을 첫째로 거론하였고, 인동에서도 12개 요구조항 가운데서도 첫번째가 이 문제였다. 지배층도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음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포흠을 징수하는 방법으로는 토지에서는 結斂(군위·진주·화순·공주·은진), 都結(진주·익산), 호구에서는 統還(右兵營) 등이 이용되었다. 토지에서는 처음에는 결렴의 방식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것 같다. 화순은 결당 2냥씩을 추가로 부과하여 吏逋를 충당하였다고 하며, 진주도 본래 2냥 정도를 거두어 이포 등의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용도에 따라 징수하였으므로 1년에 여러 차례 징수하는 경우도 생겼다.

 다음으로는 환곡의 이무가 많이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액수가 드러나는 지역의 사례를 들면, 성주는 1860년 2,000석, 1861년 2,000석, 1862년 6,073석이었으며, 상주는 1860년 1,600석, 1862년 5,000석이었고, 창원은 1859년 4,845석, 1860년과 1861년에 4,000석에 달하는 많은 양이었다.623)≪日省錄≫철종 13년 7월 8일.

 이무는 모조를 채우거나(단성) 여타 재정을 마련하는 방법으로(진주) 관에서 많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여 헐한 가격으로 立本하고 나머지는 사적으로 사용하였다. 이같은 이익을 남기기 위하여 이무를 하였던 것이다. 대체로 환곡 1석을 5전에서 1냥 정도의 낮은 액수로 입본하고 나머지 액수는 사적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이무는 사적인 포탈의 방법이기도 하였지만 그 결과 읍간의 환총이 불균등해지고 한편으로는 포흠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토지에서는 結價의 액수와 관련하여 생겨난 문제들을 들 수 있다. 결가는 正供이라고 부르는 중앙 상납분을 일률적으로 돈으로 환산하여 수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戶首가 책정하든 관에서 책정하든 일단 관에서 간여하게 되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재정에 보용하거나 사사로이 착복하기 위하여 높은 결가를 매기기도 하였다. 이 시기 경상도에서는 결가 책정 초기에는 8∼9냥 정도였는데 이제 보통 14, 15냥이 되어서 처음의 결가의 배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624)≪日省錄≫철종 13년 6월 1일. 심지어 20냥까지 올라가서 3배에까지 이르는 지역도 있었다.625)≪備邊司謄錄≫226책, 헌종 4년 정월 10일. 이것이 이 시기 공통적인 문제가 되었으므로 한 지역에서 저항하자 다른 읍에서도 호응하여 농민항쟁이 번져나가는데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는 환곡의 포흠분이라든가 軍錢補弊條가 포함되었다. 邑民들은 결가를 중앙 상납액으로 계산하자고 요구하였는데 7∼8냥이 가장 많이 제시되었다. 인동·공주에서는 7.5냥, 상주·선산·성주에서는 8냥을 요구하였다. 그 밖에 금구·장흥에서 田稅·大同稅에 해당하는 액수가 높았다고 하여 부당 징수분에 대한 환수를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도결을 시행하면서 결가를 높여서 取剩하는 것은 일상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와 같이 결가나 도결은 토지에 매겨짐으로써 대부분 토지소유자 계층인 사족들도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들은 부당한 수취 부담에 항의하여 읍내에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가령 익산의 진사 洪正은 도결세 2,800냥의 수세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다가 옥에 갇혔으며 진주의 전교리 李命允도 도결 책정에 반발하여 항쟁 초기에는 참가하였다.

 그 밖에도 항쟁의 계기는 삼정에 관계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전세와 관련하여 전세목가가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된 데 대한 불만(함양), 군정과 관련하여 군역 부과에 대한 부당함을 시정(문의)하려고 하였다. 기타 조선 후기 문제가 컸던 산림을 둘러싸고 무단세력들이 농민들의 벌채를 금지한 조치에 대한 반발(회인)이라든가 화전세 부당 징세(제주도) 등이 있었고, 그리고 잡세에 관련하여 숫돌 비용을 호당 수취하는 것(연일)이라든가 無名戶斂錢(장성)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이처럼 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시기에 주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환곡을 둘러싼 폐단으로 그 가운데는 吏逋의 부당한 징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또 하나는 結價의 액수와 명목을 둘러싼 폐단인데, 높은 결가가 책정된 이유로는 還逋라든가 부족한 軍錢에 대한 보충 등 부당한 부담을 결가 속에 포함시켰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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