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3) 항쟁의 전개과정

(3) 항쟁의 전개과정

 경제적 여건이나 계기가 비슷하더라도 농민항쟁의 전개과정은 지역, 발생 시기, 조직 구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대부분의 읍에서는 준비단계로 통문 발송과 집회의 과정을 밟아 나갔다. 이는 읍민의 여론을 활성화하고 의사를 집약시키는데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 과정 또한 몇몇 개인의 우연적인 주도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촌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토론이 조성되고 주도층의 일정 기간 모의 단계를 거치면서 표면화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때 里會라고 표현되는 것은 里의 일상적인 집회라기보다는 이러한 모의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공개적인 모임이 아니라 주도층이 조직되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읍의 폐막이 거론되고 그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으며 항쟁이 결정된 뒤에는 대중을 모으기 위한 통문 작성 등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었다.

 일단 집회를 열기 위해서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항쟁의 주도자가 작성하여 면리별로 돌려 관심을 환기시켰다. 특히 일반 농민들을 모으기 위하여 한글로 통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집회를 통해서 제시되는 해결책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 첫째는 법 테두리 안에서의 지방관이나 감사에게 호소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이와는 달리 이러한 방법으로는 제대로 해결된 적이 없었음을 경험하면서 이 시기에는 다수의 농민들이 집단의 힘으로 관청에 몰려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이 농민봉기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뒤 항쟁의 전개과정은 일반적으로 여러 단계를 밟아 나갔다.626)송찬섭, 앞의 글, 333∼357쪽.

 첫째 항쟁을 결의하면서 농민들이 집결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농민동원이 필요하였다. 일단 통문이나 지도부의 동원에 따라 집결한 농민들은 외곽지역에서 부호가를 공격하는 등 행동으로 표출하면서 대중 참여를 확대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읍내로 진출하였다. 때로는 읍내 근처에 집결하여 바로 관가 공격에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다. 이처럼 농민들을 모으고 항쟁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지도부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였다. 이를 위해 回文·通文이나 한문을 모르는 대중들을 위해 한글로도 선동자료를 작성하여 결집시켰다.

 둘째 읍을 공격하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 오면 읍의 여러 면리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였다. 농민들은 읍내에 들어가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를 내세우면서 항쟁을 벌여나갔다. 이를테면 진주에서는 “吏逋를 백성에게 징수말라”, “都結과 統還을 혁파하라”고 외치면서 당시 가장 큰 폐단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미 농민들의 반관의식이 매우 고조되었으므로 관으로서는 이들에 맞서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주에서는 경상우병사를 둘러싸고 횡렴과 이포 늑징에 대해 거리낌없이 지적하였다. 그들의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병사가 이서들에게 죄과를 돌리고 처벌하면서 이들을 달랠 정도였다.627)≪壬戌錄≫嶺南, 1쪽.

 그리고나서 곧 읍내 지배층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수령에 대해서는 동헌에서 끌어내어 위협하고 강제로 가마에 태워 경계 밖으로 추방하였다. 이서들에 대해서는 더욱 가혹하여 이들의 집을 부수고, 방화·약탈하였으며 심지어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그 밖에도 수세와 관련이 있던 경저리나 대상인 등도 공격 대상이었다. 이들을 공격하여 이들이 머물던 가옥을 부수고 재물을 빼앗았다.

 읍내공격을 끝낸 뒤에는 한동안 읍내에 둔취하면서 읍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단성인데 여기서는 읍권을 장악하고 통치기구를 정비하였다. 이들은 좌수와 이방을 선출하고 鄕將에서부터 官奴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차출하였다. 또한 이전의 관문서와 마찬가지로 새로이 수취장부를 작성하였고 활동에 필요한 비용은 차출하거나 토지에 부담시켰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읍정에 반영시키고 스스로 읍정에 참여하려는 기대를 담았다.

 관군에게 직접 저항하기도 하였다. 거창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여기서는 감영에서 포졸을 풀어 주모자 李時奎·崔南紀·李承文 등이 체포되어 대구부로 이송되었는데 농민들은 읍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압송하는 중도에 호송행차를 습격하였다. 그들은 호송장교를 구타하여 쫓아버리고 주모자들을 구출하였다. 암행어사 이인명이 곧바로 각 진영에 연락하여 포졸을 풀었으나 오히려 농민들에게 잡혀 향소의 옥에 갇혀있다가 4, 5일 동안 애걸하여 풀려나올 정도였다.628)≪矗營錄草≫按覈使答札 7월 2일.

 농민들은 읍내 공격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外村으로 항쟁을 확대시켜 가는 경우도 있었다. 첫번째 단계에서도 외촌에 대한 공격이 있었지만 그것은 특정 지역에서 주로 나타났으나 읍내에서 활동을 끝마친 뒤에는 전지역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일단 읍에서 활동을 마친 농민들은 외곽으로 나아가 평소에 농민들을 괴롭혔던 세력에 대하여 공격을 계속하였다. 지주·부호가·고리대금업자 등이 그 대상이었다. 진주의 경우 읍의 공격을 마친뒤 외곽으로 나아가 22개 면에 걸쳐 부호가를 부수고 재물을 빼앗았다. 공격받은 자 가운데는 院宇를 지으려고 농민들을 무절제하게 동원한 자, 도결과 통환을 농민에게 분배하여 징수할 책임을 진 訓長, 무단 토호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인접한 召村驛과 玉泉寺까지 들이닥쳤다.

 이러한 공격을 벌인 뒤 농민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민들은 이러한 일회적인 공격으로 끝내지 않고 지역에 따라서는 계속 점거하며 투쟁을 계속하였다. 진주에서도 그 뒤 다시 진을 쳤다고 한다.629)≪龍湖閑錄≫권 3, 三南民鬧錄 상, 51쪽. 안핵사 朴珪壽가 내려왔을 때도 70여 개 지역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630)≪龍湖閑錄≫권 3, 按覈使曉諭,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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