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농민항쟁에 참가하는 계층은 신분적으로는 평민이고 소빈농의 처지에 있는 일반농민이었다. 당시 농민항쟁의 참여자에 대하여 姜瑋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난은 良民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窮民이 일으킨 것이다. 양민은 토착자이고 궁민은 떠돌아다니는 자이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백성은 이미 의존하여 생활할만한 자산이 없으므로 밤낮 원망하고 난을 생각한지 오래되었다. 비록 의리로써 그들을 타일러도 따르지 않는다. 요사이 남쪽 농민들의 民擾는 대개 이들이 주동한 것이며 양민은 단지 협종자일 뿐이다(姜瑋,≪古歡堂收草≫<擬三政捄幣策>).

 말하자면 이들은 농민층 분해가 진전함에 따라 배출된 경제적으로 열악한 빈농이며, 자소작이나 소작을 붙여 가계를 끌어나가거나 소작지조차 없는 농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적은 토지수입으로 고율의 지대나 이자 지불을 감당할 수 없어서 농번기에 고용노동을 하거나 농한기에 땔감 판매 등으로 생활하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이들은 당시 조세제도가 차등적인 신분제에 기반하여 운영되었기 때문에 조세제도의 운영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부세가 집중되어 징수되거나 토지에 부과된 조세조차 작인에게 떠넘겨지고 있음을 알았다.

 1862년 농민항쟁에 관한 기록들에 樵軍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대체로 소빈농의 범주에 속하는 자들로서 생계유지를 위해 나무를 베어다 땔감으로 팔아서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초군은 생계가 어려워 대체로 머슴이나 婢夫로 살고 있었다.

 당시 농촌사회 안에서 계층을 나눌 때 토지를 가진 농민, 토지를 가지지 못했으나 병작하는 농민이나 상공업에 종사하여 먹고사는 자, 그 다음으로 나무하고 임노동을 하는 자로 분류하여, 의지할 곳이 없어서 빈사할 지경에 있는 자보다 바로 위에 놓고 있다.631)≪賑恤謄錄≫奎古 5127-5.

 초군들의 생활수준은 빈농층과 다름없었지만 생업이 없는 자 또는 생산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진휼 대상자와는 엄연히 구분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영세한 토지를 가진 자가 있거나 또는 남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도 있었다. 따라서 초군들은 “산에 오르면 초군이고 들에 나가면 농부”632)≪壬戌錄≫咸鏡道, 101쪽.라고 규정하는 것처럼 ‘半農半樵’의 형태로 생활을 하였으며 부세 수취의 대상으로 파악되었다. 삼남지역에 주로 해당하는 것이지만 토지에 부과된 전세들이 작인에게 전가되는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져야 할 부세부담은 매우 컸다. 따라서 빈농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 초군들은 부세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초군들의 생활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토착적인 생활을 하는 자 외에도 流民적인 성격을 지닌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여 생활을 하였으므로 자연히 다른 집에 머슴 또는 일시적으로 고용되었다가 조건이 맞지 않는 때는 다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그런데 항쟁에는 소빈농에 준하는 자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었다. 철종 13년(1862) 당시의 상황을 체험한 강위는 난민들을 분류할 때 유민, 뜨내기, 짐장사꾼, 날품팔이 등을 거론하고 있다. 그 밖에도 수공업자와 일반 상인들도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우두머리인 접장의 지도 아래 항쟁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진주농민항쟁의 과정을 보면 元世官은 골짜기의 구석진 곳에 살면서 籠匠으로 생업을 하였고, 許正太는 상인으로 항쟁에 참여한 자였으며, 金成實은 소금과 탄을 판매하였다. 그 밖에도 賤類라고 일컬어지는 金世業은 진주농민항쟁 과정에서 主論에 속하였다고 주목받고 있는 자였다.633)≪壬戌錄≫晉州按覈使査啓跋辭.

 이들 소빈농적인 여러 계층의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억압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처한 갈등관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이들 초군을 포함한 소작농민들은 지주와 갈등이 있었다. 초군들은 半農半樵로 생활하였으며, 19세기 중반에 부세와 지대에 대한 拒納이 빈발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지대를 둘러싼 지주와의 갈등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초군들의 특성상 생활의 자료를 토지와 산림에서 찾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생활을 꾸리려고 나무를 벤다든지 또는 산림에서 나오는 것들을 채취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입산을 금지하는 지주들과는 자연히 마찰을 빚게 되고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양반가의 산림에서 산림주가 노비를 시켜서 나무베는 일을 금지하는 사건들이 빈번하였다.

 초군들이 부근에 있는 양반가의 산림 근처에서 나무와 낙엽을 채취하다가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주는 초군들이 자신의 토지에 침범하여 생산물을 절취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초군들은 생계를 위하여 확보해야 하였다. 따라서 지주와 초군들 간에 항상 이러한 갈등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초군들이 산림에 들어가서 나무를 채취할 때는 무주지가 아닐 경우에 산림주들은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냈다. 산림주들은 산지기를 파견하여 산림을 지키면서 입산하는 초군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입산한 초군들에게 과도하게 松價를 징수하거나 또는 초군들이 채취한 나무의 반을 대가로 요구하고 도끼나 낫을 빼앗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주들의 지나친 행패 때문에 초군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초군들이 다른 지역에서 작업을 하려고 할 때 그 지역의 초군들에 의해 저지되기도 하였다. 이는 초군 사이에도 작업장을 사이에 두고 갈등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당시 농민들은 체제모순을 직접 겪는 층이었지만 이 단계까지는 아직 계급투쟁을 주도할 만한 힘을 지니지 못하였다. 또한 정치권력에 대한 계급적 이해조차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봉건체제를 구체적인 타도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신분적으로 본다면 평민뿐 아니라 노비계층도 함께 참여하였다. 진주의 私奴 儉同의 집에서 모의가 있었고, 역시 사노 孟乭과 貴大 등이 동리인 30여명을 이끌고 나섰다. 상주에서 앞장섰던 조두꺼비·김말대 등 인물들도 천인 신분으로 보인다.

 한편 이같은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봉기를 주도한 자들은 별도의 계층이었다. 이들은 일부 양반이나 농촌지식인 등을 들 수 있다.634)박규수가 양반호 가운데 지망이 있는 자와 민호 가운데 사리를 아는 자라는 표현도 이와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다(≪壬戌錄≫到晉州行關各邑, 5쪽).

 당시 정부는 명망있는 양반을 주도층으로 지적하였다. 진주안핵사 박규수는 농민항쟁이 일어날 때 항상 통문이 돌고 집회가 개최되었던 점을 주목하고 이는 문자를 아는 자의 소행이라 하여 그 지역 士民父老 가운데 명망이 있는 자를 의심하고 있다.635)朴珪壽,≪瓛齋集≫권 8, 書牘. 또한 호남좌도 암행어사 金元性은 봉기주도층을 出派, 坐派로 나누었는데 그도 또한 지방의 유생들을 주목하였다. 그는 유생 가운데 문자에 밝고 권력을 지닌 자들이 관을 사찰하고 그 득실을 논하며 와언을 만들어 지시하기도 하고 경향을 출몰하면서 일을 꾸민다고 하였다.636)≪日省錄≫철종 13년 7월 2일.

 이들이 실제 각 지역에서 등소운동을 주도하였고 봉기 때에는 호장, 이방, 좌수의 협조뿐 아니라 각 면의 면임들의 협조 아래 조직적으로 농민을 동원하고 항쟁에 필요한 자금을 읍민에게 거두는 등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양반층의 주도 아래 빈농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형태가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중앙에서 중요한 관직을 지냈거나 지방관을 지낸 적이 있는 명망있는 인물들이 적극 참여한 사례가 있다. 사례에 의하면 단성의 전정언 金麟燮 부자, 진주의 전교리 李命允, 인동의 전정언 張膺杓, 장흥의 전보성군수 高濟煥 등 전직 관리가 봉기에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단성의 김인섭 부자와 장흥의 고제환의 경우 직접 봉기의 전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진주의 이명윤은 도회를 결정하는 과정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뒤 이탈하였으나 농민군이 목사로부터 도결 혁파를 받아내는 과정에서 목사를 설득하는 역할을 하였다.637)망원한국사연구실, 앞의 책, 151쪽. 인동의 장응표도 향회에 참석한다든가 봉기가 일어난 날 읍내에 들어가는 등 어느 정도 활동하였다.

 대체로 이들이 앞장선 것은 중앙의 권력체계와 그에 따른 운영실태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중앙정부는 전직 관료를 지냈는데도 반관운동에 앞장선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하였다. 이처럼 이들이 반관투쟁에 앞장서게 되어 농민들의 계급투쟁을 자극하거나 이들과 서로 결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신분으로 볼 때 그 한계가 뚜렷이 드러났다. 곧 이들이 저항하고자 하였던 것은 삼정의 모순이나 관속의 탐학과 같은 현상적인 행정 통치상의 폐단이었을 뿐 봉건체제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적 기반 또한 성리학적 질서체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사회 전체가 아직은 유교교리에 의해서 지배되고, 체계화된 교육 자체가 봉건 양반들에게 독점되는 조건에서 이들의 정치적 이념도 한낱 유교교리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이들은 당시 항쟁에 참가한 일반 농민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거나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터져나온 농민들의 변혁의 열기를 효율적으로 결집시키고 조직적인 역량으로 묶어내기에는 역량이 부쳤다. 그러므로 이들이 농민항쟁에서 보여준 지도력은 부세에 대한 투쟁을 위해 읍민의 의견을 모으고 동헌 습격을 감행하는 단계까지로 한정되었다. 봉기가 한 단계 고양되어 계급투쟁적인 성격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더 이상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다음으로는 몰락양반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부패한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었다. 특히 몰락양반의 경우 신분적으로는 양반이라 하여도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직접 농민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비참한 생활과 지배층의 착취를 몸소 체험하였으며 농민들의 생활에 공통적인 이해를 절실히 느꼈던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계급적 처지에 있어서는 비록 봉건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수탈과 착취에 대한 공동적인 대응이 요구될 때 농민층의 이해를 부분적이나마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때문에 주도자들이 관리 출신이 아니었지만 지방사회 안에서 나름대로 지도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진주항쟁의 최고 지도자인 柳繼春도 몰락양반 출신이었다. 그는 본래 진주 원당면 출신이었는데 그가 3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원당에서 축곡면 내평촌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신분은 본래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재지기반이 거의 없었고 토지도 전혀 없었으므로 몰락양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농촌지식인으로서 글을 이용하여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는 이전부터 환곡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향론을 주도하였고 여러 차례 집회를 열어서 읍과 감영, 그리고 나아가 비변사에까지 등소를 올렸다. 또한 진주항쟁 때 읍내의 논의를 이끌었고 그의 주변 인물들을 모아서 실질적인 항쟁준비를 하였다.

 이 시기 지배집단에서 탈락한 몰락양반들은 이미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거의 상실하였다. 곧 그들은 중앙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으며 경제적 위치도 농민층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왕조의 봉건적 신분질서가 해체되어가는 한 측면이다. 그 결과 몰락양반들은 생계가 곤란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던 만큼 당연히 현체제에 대하여 불만과 그 변혁에 대한 갈망이 컸다. 또한 그들은 어느 정도 학문적 소양이 있어서 농민층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함평의 정한순은 중앙에서 안핵사가 내려오자 스스로 자수를 하면서 봉기의 목표가 ‘輔國爲民’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유교적 용어이기는 하나 민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의식을 가졌다고 하겠다.

 농민층 가운데서 지도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농민은 당시 파행적인 부세체제에 의하여 가장 고통을 받는 계층이었다. 이들은 ‘無識無賴之輩’라고 일컬어지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기보다는 주동자의 사주에 의해 움직인다고 간주되기도 하였다.638)이를테면 진주농민항쟁을 조사한 박규수가 사족에게 끝까지 혐의를 두었는데(≪壬戌錄≫ 到晋州行關各色, 4쪽) 이는 농민들이 주체로서 성장할 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성장하고 있던 농민층의 의식수준을 간과하였다고 여겨진다. 이 단계에서는 이미 농민들의 항쟁 참여는 상당히 자발적이었다. 읍폐와 그에 대한 끈질긴 저항을 통하여 농민들의 의식은 성장하였고 집단화되어 갔다.

 가령 진주에서도 李啓烈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생활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언행에 있어서도 한글조차 모르는 무식한 농사꾼이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유계춘과 차이가 있었다. 유계춘이 가난한 지식인이라면 그는 보다 순수한 농민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초군의 座上이었으며 항쟁에 있어서도 전과정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안핵사 박규수도 “공초에 의거하여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번 사건의 중요성은 이계열에게 달린 것 같다”고 하였듯이 이계열은 항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유계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다. 유계춘의 주장에 동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유계춘에게 전달하였다. 그가 항쟁과정에서 한 활동이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초기 모의과정에서부터 읍회, 읍내 활동까지 모두 참가하였으며 항쟁시 주체세력인 초군의 좌상이었다는 점에서 진주항쟁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선산의 全範祖도 신분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몰락양반이 아니면 평민 출신으로 보인다. 그는 농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하였는데 그 자신은 스스로 ‘농민을 위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봉건 양반에 비하여 농촌지식인, 농민층으로 구성된 지도부는 한층 강경한 대응을 하였다. 가령 처음의 집회에서 사족들은 대체로 감영에 호소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유계춘 등은 더욱 강화되는 환포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층 강경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앞의 주장과는 달리 읍내에서 집단 시위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미 水谷都會를 개최하기 전부터 철시 등 적극적인 항쟁을 계획하였다. 곧 유계춘은 수곡도회에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모은 뒤에야 읍폐를 가히 고칠 수 있으니 굳게 맹세하자”고 참석자들을 열심히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유계춘의 주장은 집단시위를 꾀하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首吏와 향임들 가운데 일부는 항쟁에 가담하였다. 이 때문에 지방 사회 내부의 복잡한 부세체계와 부정의 양상을 알 수 있었다. 선산의 향리를 지냈던 金龍集은 관가문서를 검토하고 나서 결가를 산출하여 농민들의 주장을 대변해 주었다. 면임들은 장정을 선발하고 식량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으로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들은 정치적·사회적 신분으로 볼 때 말단의 봉건 지배층이었다. 그렇지만 농민봉기 때에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적이 반드시 같지 않았는데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커다란 세력으로 단합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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