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5) 항쟁조직

(5) 항쟁조직

 처음에는 지도 인물들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몇 차례 회합을 통하여 당쟁이 논의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里會로서 里의 일상적인 집회가 아니라 일종의 모의 단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공개적인 모임이 아니라 주도층이 조직되는 과정이었다. 이를 초기조직화 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여기서 읍의 폐막이 거론되고 그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으며 항쟁이 결정된 뒤에는 대중을 모으고자 통문을 작성하는 등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었다. 진주의 경우를 보면 공식적인 대중집회를 갖기 전에 朴守益家, 私奴 儉同家, 朴肅然家 등 여러 집을 전전하며 모의를 하였다.

 이 때까지의 이회는 등소를 목표로 읍회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이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곧 초기주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지도부와 이웃하거나 인척관계 등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진주의 경우 이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유계춘, 이계열을 비롯하여 姜承白·姜快·姜守福·鄭致會·鄭弘八·鄭順季·鄭之愚·鄭之九·朴守堅 등이 보인다. 곧 대부분 정씨와 강씨로 이루어졌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유계춘과 친척관계가 아닐까 한다. 강씨의 경우 그 가운데 강쾌가 유계춘과는 異姓四寸이었으므로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정씨의 경우에는 유계춘의 외가성이란 점이 주목된다. 유계춘은 아버지의 고향인 원당면을 떠나 어머니를 따라 축곡 내평촌에 이거하였다. 이는 이 곳이 외가이기 때문에 여기서 새로이 기반을 얻으려고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회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정씨가 가장 많을 뿐 아니라 몇 사람은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같은 관계 때문이 아닐까 한다. 강씨의 경우도 비슷하리라 여겨진다.639)당시 내평촌은 진양 정씨 殷烈公派 후손과 忠莊公派 후손이 살고 있었다. 유계춘의 어머니는 은렬공파에 속한다. 그리고 진주 강씨들도 이곳에 많이 살고 있었다(金俊亨,≪진주신문≫진주농민항쟁, 1994년 6월 6일자).

 유계춘으로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웃 또는 인척 등 가능한 모든 계기와 조건을 이용하여 초기의 은밀한 모의, 그리고 준비작업을 끌어나갔던 것 같다. 아직 뚜렷한 세력이 없는 시점에서는 이같은 방법이 당연하리라고 여겨진다.

 다음으로는 이미 준비되었던 읍회를 대중집회로 확산하기 위하여 준비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을 의식화시키고 앞으로의 읍회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농민항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역량을 바탕으로 삼아야 하였다. 이를 위하여 농민대중이 공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대중집회가 필요하였다. 대중집회를 통하여 읍사를 함께 논의하고 의견을 수렴하며 여론을 확산시키고 나아가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이것을 대중조직화 단계라고 일컬을 수 있다.

 지도층들은 항쟁과정에서 향회를 열어 농민들을 동원하였다. 대체로 부세 결정과정은 향회를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차츰 관에서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린 뒤에 그 결과를 향회에 통보하는 형태로 바뀌어갔다. 따라서 이러한 결정에 불복할 경우에는 새로이 향회를 열어서 대소민들의 의견으로 이의를 제기하였다. 실제로 향회는 민의를 대변하는 회의였다. 관의 부세 운영에 불만을 가졌던 일부 사족들도 참여하였다. 진주의 전교리 이명윤이나 인동의 장응표의 경우도 관에서 연 향회에는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이같은 민회에는 참석하였다.

 이들이 농민을 동원하는 방식은 우선 통문을 돌린 뒤 향회를 소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향회의 소집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향회를 개최하는 과정에도 여러 가지 비용이 들었으며, 그 비용은 주로 향촌민에게서 거두었다. 보은·진천·영동·연풍에 파견된 암행어사 金益鉉의 별단에서는 주로 폐단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으나 향회를 여는 과정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폐단을 없앤다고 하여 呈訴와 향회 때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고자 통문을 돌려 돈을 거두는 폐단은 엄하게 금할 것이다. 근래 삼남이 소란스러운 것은 이들 무리들이 길러낸 것이다. 과도한 세금으로 관의 침탈에 힘이 빠져 있으며, 술과 밥을 마련하는 데 향회의 독촉으로 피곤한 상태이다. 불쌍한 소민들은 어디에서 이를 마련할 것인가. 또한 집을 헐어버린다고 협박하여 벌전을 내도록 하니 이들이 힘써 노력을 하여도 위험에 빠지고 스스로 커다란 살륙에 빠지게 되었다(≪承政院日記≫2652책, 철종 13년 6월 28일).

 이처럼 농민동원에는 강제성이 많았다. 향회 소집과정에서 토호들은 농민을 동원하기 위하여 불참한 경우에는 집을 파괴하겠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물리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을 이용하거나, 벌전을 부과하겠다는 등의 경제적인 제재로서 참가할 것을 요구하였다.

 농민항쟁의 또 하나 중요한 조직은 樵軍이었다. 초군들은 개인적으로 작업할 경우도 있으나 일정한 집단을 이루고 작업하였다.640)梁晉錫,<1862년 농민항쟁의 배경과 주도층의 성격>(≪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이들의 규모는 대체로 10∼20명 정도라고 생각된다. 진주지역에서 항쟁이 끝나가는 8월경에 진주 관내의 道洞 草田村 洞長의 手本에 의하면 읍의 초군이 300여 명에 이르고 있다.641)≪矗營民狀草槪冊≫1862년 8월 24일. 대규모의 집단적인 활동은 대체로 장시간에 걸쳐서 다른 지역까지 가서 활동을 하는 경우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특성으로 초군들은 대규모의 공동노동조직을 통하여 집단화하고 세력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인근 지역과 연계할 수 있었다.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초군들의 경우에는 소위 樵魁·座上·頭目 등으로 불리는 자들이 초군을 지휘하였다. 보통 때 초군조직은 이러한 우두머리들을 중심으로 생계를 보충하기 위해 일하는 자들이 모인 조직이었다. 초군들은 이러한 측면을 토대로 집단화하고 있었으며 농민항쟁기에는 이러한 초군조직들이 봉기를 목적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따라서 항쟁조직으로서의 초군조직은 역할을 분담하면서 이루어졌다.

 한편 초군 조직들은 집단적인 일체감을 보이려고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서 통일하고 나무 몽둥이를 무기로 들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하여 항쟁을 직접 경험한 강위는 “수만의 무리들이 갑자기 몰려오고 흰 수건을 두르고 막대기를 들어 그 모습이 위험스럽고 두려워 순종하고 거스르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들의 행색은 농민들이 일상적으로 작업할 때 입고 있는 복장 그대로였고 작업할 때 사용하던 수건을 머리에 둘러맨 것이라고 생각된다. 단 농민들은 복장을 통일함으로써 집단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초군들이 중심이 된 지역에서는 이들이 직접 等狀을 제출하기도 하였는데 그 등장의 내용을 통하여 봉기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나무하고 소를 기르는 무리로서 오래된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기약하지 않았어도 모인 자들이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맹호(이서배)를 잡기로 하고 갑자기 불을 질러서 부모(수령)의 안전을 놀라게 하였으니 우리들의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吏鄕들은 일을 만들고 획책한 자이며, 한 고을의 영웅이며, 읍내의 세력있는 자입니다. 우리(초군)들은 낫을 지고 지게를 지는 자들로 산에 오르면 초군이고, 산야에서 일하면 농부입니다. 어찌 事體를 알겠으며 의리를 알 것입니까. 단지 주부군현에서 마련할 때 각양 公貨는 다른 현과 같게 하여도 대저 移貿하는 것은 小吏들에게는 가시이며 농민들에게는 눈서리와 같습니다. 수령에게 엎드려 비오니 호랑이를 잡고 불을 지른 죄는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 생사는 스스로 처치할 것이므로 우리처럼 나무나 하고 무지한 무리들이 안도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랍니다(≪壬戌錄≫咸鏡道, 101쪽).

 당시 초군들은 이서와 향민들이 移貿를 이용하여 농간을 부리게 되면서 그 폐해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농민들은 등장을 냈으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자, 결국 폭력을 동원하여 吏胥와 鄕民의 집을 습격하고 태워버렸다.

 그러나 1862년 농민항쟁 단계에서는 이들의 조직은 단순히 초군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곧 항쟁조직으로서의 초군조직에는 순수한 초군이 아닌 소빈농적 처지에 있는 다양한 층까지 포함하여 동원되었다.

 진주농민항쟁에서 주동적인 인물인 유계춘이나 또는 千늣쇠 등의 供草를 보면 초군뿐만 아니라 다수의 농민을 포함한 다양한 층의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다. 유계춘은 항쟁을 전반적으로 조직한 자로서 농민층의 호응을 얻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진주의 농민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동원 책임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천늣쇠는 큰 길가에서 왕래하는 자들까지 동원하였다. 그리고 匠人 원세관은 이미 德山 장시에서 철시할 때 활동하고 있었고, 초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농민 이외의 층들이 다수 동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층들이 조직적인 활동에 적극 가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 전개과정을 살펴본 강위의 언급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당시 조정에서 마치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계획을 벌이거나 도술을 부리는 등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선동을 해서 크게 일어난 것처럼 보는 것을 부정하고, “집도 없고 입을 것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는 무뢰지도들이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여 서로 모여 이러한 짓들을 하였다”고 하였듯이 그들의 열악한 처지에서 빚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농민층 분화에 따라 유민·뜨내기·짐꾼·날품팔이 등의 숫자가 매우 많았으며 여러 지역에 널려 있어서 쉽게 모여 행동으로 나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혹한 통치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것은 빨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조직을 이끄는 지도부와 생사를 함께 각오할 정도였다.642)姜 瑋,≪古歡堂收草≫擬三政捄弊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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