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전국적인 농민항쟁은 봉건체제를 유지하는 데 큰 타격을 주었다. 여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농민항쟁을 막으면서 그 책임을 물어 해당 지역의 관리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각 지역의 농민항쟁 소식은 곧바로 감영에 보고되고, 감사는 장계를 통해 중앙에 보고하였다. 2월 29일 진주 농민항쟁에 대한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장계가 중앙에 보고되자 비변사에서는 이 사건을 전에 없는 변고로 규정하면서 농민들에게는 고을이나, 감영, 또는 심지어 비변사에 소를 올리거나 격쟁과 같은 합법적인 방법이 있는데도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651)≪承政院日記≫2648책, 철종 13년 2월 29일.

 비변사에서는 항쟁이 일어난 데 대한 책임을 물어서 지방관에 대해 처벌하였다. 경상우병사와 진주목사를 파직하고 이들을 의금부에서 체포하여 처리하도록 하였고, 전보 명령을 받고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던 전감사 金世均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물어 삭직하였다. 그리고 사건을 엄중하게 처리하기 위해 朴珪壽를 안핵사로 파견하도록 하였다. 왕은 이 사건의 본질이 농민에 대한 과도한 수탈에 있음을 인정하고 서리에 대한 처벌 및 부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을 부탁하였다. 박규수가 출발할 때 내린 교서에서 형식적이지만 왕의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영남은 이전부터 鄒魯之鄕이라고 칭해지고 많은 현인들이 배출되고 풍속이 순후한데 이번과 같은 일은 어찌 본심에서 하고자 한 일이겠는가. 첫째는 내가 부덕하여 잘못 다스린 까닭이고, 둘째는 목사와 병사가 조정의 이와 같은 뜻을 헤아려서 다스리지 못한 까닭이다. … 만일 무절제한 수탈이 없었더라면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을까. 목사와 병사를 잡아들인 후 엄중하게 처벌하여 남쪽 백성들을 위무하라. 그러나 진주민으로 말하자면 이미 죄를 저지른 즉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주모자와 추종자를 구분하여 법대로 처리하라(≪承政院日記≫2649책, 철종 13년 3월 10일).

 여기서 보듯이 국왕은 지방관에 대한 처벌과 항쟁을 일으킨 자에 대한 처벌을 명하고 있다. 당시 중앙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영중추부사 鄭元容은 “진주의 경우는 드러난 일례일 뿐이며 진주와 같은 곳이 매우 많다”652)≪承政院日記≫2649책, 철종 13년 3월 22일.고 하면서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안동 김씨의 최고 권력자인 영의정 金左根은 당시 가장 큰 폐단이었던 환곡의 加作을 엄금하고 이서의 포흠을 줄이기 위해 군현의 이서 정원을 축소할 것과 적격자를 뽑아 암행어사를 파견할 것 등 당시 폐단을 교정하는 선에서 대안으로 제시하였다.653)위와 같음. 좌의정 趙斗淳도 농민항쟁이 발발하는 것은 명분 기강이 없기 때문이며 이는 수령이 失政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654)≪承政院日記≫2650책, 철종 13년 4월 26일.

 이처럼 조정에서는 위기의식을 느끼면서도 농민항쟁의 원인을 체제보다는 지방관의 실정이라든가 부세제도 운영상의 모순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곧바로 처벌받았다. 진주의 농민항쟁에 대해서는 경상우병사 백낙신과 진주목사 홍병원이 처벌받았다. 전라도 익산의 농민항쟁의 경우는 매우 격렬하게 일어났다는 점에서 감사에게까지 책임을 물어서 金時淵의 관직을 삭탈하였다.655)金時淵은 위리안치를 당하는 등 농민항쟁 때문에 가장 큰 처벌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던 것같다. 그는 순조말 세자의 대리청정 때 세도를 부리던 金鏴의 아들이었다. 김로는 세자가 죽은 뒤 안동김씨에게 제거당하였다. 고종 초에도 김시연을 제주목에 위리안치시키면서 왕은 “김시연은 바로 김로의 아들이다. … 김시연은 그런 사람의 아들로서 연전에 호남지방을 맡았을 때 마구 탐욕을 부렸으니 … 나의 마음이 통탄스럽기가 다른 사람에 비해 배는 더하므로 이런 下敎를 내린다”고 하였다(≪承政院日記≫고종 원년 정월 10일). 한편 농민항쟁이 일어난 군현의 수령은 즉시 파직되었고 여죄에 따라 의금부에 나문되어 처벌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는 농민봉기를 미리 단속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과 더불어 이들을 신속히 처벌함으로써 농민들의 항쟁 열기를 군현 차원에서 차단시키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중앙에서는 농민항쟁의 원인을 체제의 모순보다는 일부 수령의 失政에서 찾고 있었다. 따라서 부패한 일부 수령을 제거함으로써 체제가 흔들리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당연히 봉기 농민의 처벌도 비교적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조정에서는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안핵사, 선무사, 암행어사 등 중앙관리를 파견하였다.

 안핵사는 봉기에 참여한 농민의 처벌과 제반 폐막을 조사할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경상도에서는 진주와 개령에 파견되었다. 진주는 항쟁이 처음 일어난데다가 규모가 컸기 때문이고, 개령도 이서 등 5명이 타살될 정도로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진주는 박규수가 파견되었으며 개령에는 처음에는 박규수로 하여금 이곳까지 조사하도록 하였으나 연락이 닿지 않자 안동부사 尹泰經이 대신 파견되었다. 전라도에서도 봉기 규모가 큰 익산과 함평에 李正鉉이 안핵사로 파견되었으며, 제주에는 李健弼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연말에 일어난 함흥에는 경상도 선무사로 다녀온 李參鉉이 안핵사로 파견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활동이 활발하였던 박규수는 유화책으로 폐단을 해결하려고 하여 안핵과정도 신중하게 했다. 이것이 오히려 반대세력에게 구실을 주어 그가 뒤에 파직당하게 되었다.

 선무사는 국왕의 선덕을 표방하는 것과 함께 농민들의 요구 사항에 부응하는 조치를 취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무사라는 직책은 조선에서 그때까지 파견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이 무렵 정부의 위기의식이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경상도에서는 이삼현이 10여 읍이나 다니면서 선무활동을 하였고, 전라도에서는 趙龜夏가 선무를 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수령의 부정 사실을 조사하고 농민들의 폐단을 시정하도록 하였다. 경상도에서는 趙秉鈺·李寅命·朴履道·任承準이, 전라도에서는 趙秉式·李後善·趙性敎·金元成이 충청도에서는 金益鉉·鄭基會가 파견되었다(<표 6>).

 안핵사는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맡았으므로 항쟁지역이 중심이지만, 선무사와 암행어사는 반드시 항쟁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도 항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포함하여 다녔다.

지 역 임 무 성 명 활 동 지 역




안 핵 사 박 규 수 진주(단성)
안 핵 사 윤 태 경 개령
선 무 사 이 삼 현 상주 선산 인동 현풍 창녕 의령 진주 단성 함양 거창 성주 대구 등
우 도 어 사 이 인 명 진주 함양 거창 창원
우 도 어 사 조 병 옥 상주 선산 성주 개령
좌 도 어 사 박 이 도 경주 안동 청송 비안 울산 인동
좌 도 어 사 임 승 준 위와 같음




안 핵 사 이 정 현 익산 함평
안 핵 사 이 건 필 제주
선 무 사 조 구 하 익산 금구 부안
우 도 어 사 조 병 식 익산 고산 임피
우 도 어 사 이 필 선 태인 장성 영광 진주
우 도 어 사 조 성 교 전주
좌 도 어 사 김 원 성 화순 흥양 진안
충청도 좌 도 어 사 김 익 현 연풍 보은 진천 영동
우 도 어 사 정 기 회 임천 은진 정산
기 타 안 핵 사 이 삼 현 함흥

<표 6>파견관리 일람표

 조정에서는 항쟁의 초기에는 대체로 조심스럽게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앙관리가 계속 파견되는 상황에서도 봉기는 그치지 않았다. 박규수는 “얼마전에 감사가 새로 부임했고 안핵사가 내려왔으면 진정을 올리고 호소하는 것이 백성이 당연히 해야 할 바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봉기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아침에는 이 현에서, 저녁에는 저 군에서 봉기했다는 소식이 들린다”고 우려하였다.656)≪壬戌錄≫到晉州行關各邑, 5쪽.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수령들은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것을 꺼려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지방관이 자리를 비운 군현이 늘어나고 농민들은 이를 좋은 기회로 삼아 봉기하기도 하였다.

 전라도 함평에서 일어난 격렬한 항쟁은 조정의 대처 방안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당시 전라감영의 假都事 閔世鎬는 함평사건을 稱兵召亂, 世變이라고 규정하면서 조정에서 대응책을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657)≪日省錄≫철종 13년 4월 21일. 여기에 대해서 국왕도 “법을 쫓아 난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하여 단호하게 대응할 뜻을 밝혔다.658)≪承政院日記≫2650책, 철종 13년 4월 22일.

 이에 따라 비변사에서는 각 진영에 대해 봉기의 진압과 주동자의 체포를 명하였다. 좌의정 조두순도 “도내 포교, 포졸이 힘을 합쳐 노력할 것이며 營將 가운데 물러나 관망만 하는 자는 監營에서 군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고 하여 강경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하였다.659)≪承政院日記≫2650책, 철종 13년 4월 25일.

 그러나 5월 들어 농민봉기는 전라도내 각지로 파급되고 이제 충청지역에까지 확산되었다. 충청도는 서울의 관문으로 여겨졌으므로 조정의 위기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이제 절차에 앞서 강경 진압을 통해 지역적인 확산을 막고자 하였다. 곧 봉기가 발생하면 감사나 수령이 자체 처리하게 먼저 이들을 처벌하고 난 뒤 보고할 것(先斬後啓)을 명하였다.660)≪承政院日記≫2651책, 철종 13년 5월 15일. 조두순도 이번 일을 진정시키려면 반드시 법을 은혜보다 우선하여 대징창하여 난의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봉기의 주동자들은 예외 없이 효수하였으며 추종자도 杖刑, 徒刑, 流刑 등 무거운 형으로 처벌하였다.

 반면 이서, 향임층 가운데서도 부세수탈의 책임과 봉기진압에 소홀했던 책임을 물어 처벌받았다.

 한편으로 직접 항쟁이 일어난 고을에서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였다. 진주목의 경우를 살펴보자.

 항쟁과 더불어 교체되어온 신임목사와 병사는 부임한 뒤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간 쌓였던 폐단에 대해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병사는 환곡을 포흠한 자들을 독촉하여 어느 정도 환수하여 농민들에게 분급하였으며, 관청 경비를 덜어서 폐단을 메우는데 쓴다든지 각 창고의 수선을 모두 각각 대비하도록 하여 농민의 부담을 절감시키겠다고 표방하였다.661)≪日省錄≫철종 13년 7월 5일. 목사 정면조는 刷馬價를 농민들에게 환급하고 봉기 와중에 부서진 人家에 대해서는 보상조로 吏校에게는 6두, 민인에게는 9두씩을 지급했다.662)≪晉陽樵變錄≫牧使鄭公恤典傳令.

 또한 고을에서도 수령들이 농민들에게 사건이 해결되었음을 알리면서 농민들을 농사에 전념케 하여 항쟁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자 하였다. 진주에서도 각 면에 전령을 보내어 이미 안핵사와 논의된 포흠 해결방안을 읍민에게 알리면서 이제 안심하고 농사일에 힘쓰라고 당부했다.663)≪晉陽樵變錄≫本州傳令五月二十七日到付於大安面. 감영에서도 진주목에 전령을 보내, 항쟁의 가담자들을 농사일에 게으른 자들이라고 몰아붙이고 각 마을에서 農監을 정하여 매일 농민들을 통솔하라고 지시하였다.664)≪晉陽樵變錄≫巡營甘結據本州傳令. 이를테면 농민들을 감시하고 강제적으로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체벌하거나 관에 고발하거나 징계하는 처벌까지 하도록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마을 단위까지 농민들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쟁을 거치면서 농촌사회의 계급갈등이 심화되자 여기에 대한 규제를 하였다. 당시 吏胥, 大民들은 항쟁에 가담했다고 지목된 농민들을 수시로 괴롭혔다. 가령 관속들은 농민들이 장시에 나가면 입구를 지키고 섰다가 구타하고 팔러나온 물건을 빼앗았으며 또 부세를 납부하러 읍에 들어오면 무조건 불량이라고 매겨서 쫓아내었다고 한다.665)≪晉陽樵變錄≫巡營甘結.

 감영에서는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지자 여기에 대해 규제를 가하였다. 가령 이서들을 엄형을 가하여 멀리 정배하고 대민들의 경우는≪大典通編≫의 잔민을 괴롭힌 죄목을 적용하여 장 1백, 도 3년, 또는 백성을 침학한 죄를 적용하여 장 1백, 流 3천리의 처벌을 하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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