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이정책의 새로운 제도인 파환귀결은 대신들간에 환곡의 제도가 폐지된다는 점에서 반대에 부닥쳤다.

 첫째 환곡제도가 폐지된다는 점에서 반대하였다. 곧 이 때까지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환곡의 폐단이 생겼다고 하면서 환곡의 운영도 옛날의 법대로 각 읍의 곡총을 계산하여 그 동안 쌓인 포흠을 감해주고 읍의 크기와 민의 수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하여 본래대로 반은 留庫하고 반은 耗條를 취하면서 改色하자고 하였다.674)≪承政院日記≫2657책, 철종 13년 10월 2일.

 다음으로 파환귀결을 하게 되면 결가가 늘어나게 되는데 이 점이 농민항쟁의 원인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국가가 제도적으로 결가를 늘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비록 국가에서는 三稅 이외에 모두 혁파한다고 하나 지방에서는 갖가지 재정을 토지에서 마련하기 때문에 부담이 늘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취를 담당하는 지방감영에서도 직접 의견을 제기하였다. 곧 실류곡이라고 파악되고 있는 것도 실제로 남아있는 액수는 얼마되지 않으므로 3년 동안 모두 거두어 들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항류곡에 대해서도 이정책에서와 같이 座首, 吏房을 監色으로 임명하면 폐단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社倉制를 시행하자고 하였다.675)≪承政院日記≫2656책, 철종 13년 9월 30일.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환곡을 이전대로 운영하면서 부족한 점은 보충하고 심한 것은 제거하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파환귀결에 대한 불만은 집단적인 저항으로 나타났다. 특히 4都를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반대가 제기되었다.676)≪矗營錄草≫9월 20일 軍簽便京送錄草. 먼저 경기도 광주와 같이 환곡으로 지탱하는 곳은 폐단이 컸다. 즉 여기에는 守禦廳이 있어서 軍民들이 환곡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제 환곡이 없어지고 돈으로 지급되면서 시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광주유수는 대신 호조에 상납하는 奴婢貢給代錢 6천 냥과 호조 구획 城餉穀 2천 석을 줄여달라고 요청하면서 재정을 메꾸고자 하였다.677)≪承政院日記≫2657책, 철종 13년 10월 8일.

 10월 23일 광주의 시위사건은 파환귀결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統營 軍校와 광주민 수만 명이 米價를 매석 5냥으로 執錢하여 항류미를 만들게 한 것이 지나치다고 광주부에 소장을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자 6, 7만 명이 도성에 들어가 조두순과 정원용의 집 앞에서 5, 6일간 시위를 벌였다.678)≪龍湖閑錄≫권 3, 京書所錄諸條, 70쪽.
≪承政院日記≫2651책, 철종 13년 11월 3일.
이들은 결국 환곡을 옛날 법규로 되돌리고 결전 부과를 정지한다는 명령이 내린 뒤 되돌아갔다. 도성에까지 몰려든 광주민의 시위가 파환귀결이 무너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파환귀결의 실시에 대한 불만은 농민항쟁으로 이어졌다. 중요한 항쟁은 경상도의 창원, 충청도의 청안, 그리고 함경도의 함흥 등에서 일어났다.

 청안에서는 파환귀결이 결정되고 나서 가장 먼저 10월 2일 항쟁이 일어났다. 모조를 토지에 부과한데다가 다시 軍錢補弊錢을 결가에 첨부해서 거두기로 하여 결가가 늘어난데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었다.679)≪日省錄≫철종 13년 12월 8일. 창원에서는 환곡에 대한 作錢 액수가 많다는 이유로 일어났다.680)≪壬戌錄≫昌原府使馳報, 99쪽. 봉기 날짜는 11월 8일로 파환귀결이 파기된 이후지만, 파환귀결이 파기되었다는 소식이 아직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함흥은 파환귀결의 내용이 미비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함흥민들은 파환귀결로 인하여 환곡이 모두 없어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관에서 봄에 받은 환곡에 대하여 3분의 2는 모조를 제하고 3분의 1은 돈으로 환산하여 납부하라고 독려하자 의심을 품고 납부하지 않았다. 그러자 함흥부에서는 各面의 책임자인 都尹을 잡아 처벌하려고 하였고, 이들은 등소에 참가한 대표들과 함께 함흥부로 내려와 항의하였다.681)≪壬戌錄≫<鍾山集抄>241쪽.
≪承政院日記≫2658책, 철종 13년 11월 2일.
그 과정에서 10월 24일 관아를 공격하는 등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밖에 함경도의 高原과 永興, 文川에서도 항의가 있었다.682)≪壬戌錄≫<鍾山集抄>, 263∼264쪽. 당시 세 지역의 환곡 상황을 보면 영흥은 還摠 54,600석 虛留 24,500석, 고원은 환총 11,800석 허류 2,800석, 문천은 환총 5,800석 허류 2,200석으로 허류가 많고 모두 오래된 포흠인데도 감영에서 모조를 계속 받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함경도의 北關에서는 탕감되었는데 비해 차별적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불만이 많았다.

 파환귀결에 대한 반발이 중앙과 지방에서 계속 제기되었으므로 군현에서도 이를 관망하고 공납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683)≪承政院日記≫2657책, 철종 13년 10월 28일. 이와 같이 지방관청에서는 시행상의 문제점 때문에, 농민들은 결전의 부담 때문에 반발에 부닥쳐 끝내 폐기되고 말았다.

 이상 파환귀결에 대한 반대의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결전의 경우 결가 전체 책정에 대한 대책이 없이 별도의 결전을 부과하는 것에 대한 반대였다. 이는 결국 토지에 대하여 별도의 부세를 첨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 환곡을 혁파한 뒤 항류곡을 설치함에 있어 당시 환곡의 실제 留庫의 액수와 곡식의 질을 고려할 때 實留라고 파악된 액수에 대하여 모두 일시에 작전 상납하는 것은 부담이 매우 컸다. 따라서 당시 환곡을 이정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정이정책의 내용이 이를 담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정원용이 영의정으로 등용되면서 파환귀결을 파기하고 일단 이전의 제도로 되돌아갔다. 대신 포흠을 탕감하고 폐단을 교구하는 방안을 중심으로 새로운 환곡 대책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경기·황해·강원·함경도와 수원·광주·개성·강화 등 4都는 폐단이 그리 심하지 않았으므로 감사의 보고에 따라 특별히 심한 것만 제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평안도는 최근에 폐단이 심하므로 이를 정리하려면 직접 조사를 거친 다음 천천히 강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삼남은 환정과 전정 모두 폐단이 심한데 전정은 일단 결전을 폐지함으로써 큰 탈이 없다고 보고 환정에 대해서는 그간 정책으로 제시된 것 가운데 약간 손질하여 행하도록 하였다.684)≪承政院日記≫2658책, 철종 13년 11월 15일. 이에 따라 환총을 재조정하여 부분적으로 폐단을 줄이는 방향으로 시행되었다.

 위의 대책은 4도에 걸쳐 거의 100만 석을 탕감하여 새로이 각 읍에 환총을 분배함으로써 일반적으로 ‘蕩逋均還’이라고 일컬어 졌는데, 이로써 환곡의 폐단을 해결하는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정원용이 시행한 대책은 파환귀결에서 환곡이 담당하는 재정을 결렴으로 충당하고자 하였던 것과는 달리 계속 환곡에서 마련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탕감된 환곡 부분에 대한 재정 마련에 문제가 있었다.

 이처럼 환곡에 대한 실질적인 정책은 부분적인 탕감 조치만이 시행되었고 환곡의 여러 폐단을 시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으나 곧 유명무실한 형편이 되었다.

 결국 농민항쟁에 대한 이정책은 항쟁의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끝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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