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4) 농민항쟁의 평가

(4) 농민항쟁의 평가

 1862년 농민항쟁은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시기의 여러 가지 사회모순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농민항쟁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특정한 몇 개 지역을 제외하고는 군현 안의 싸움에 한정되는 양상이 드러난다. 다른 지역의 농민항쟁이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함께 연합하거나 지역을 벗어나 계속하지 못하였다. 또한 봉기의 내용이 봉건적 토지제도나 신분제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 이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계급적 연대를 바탕으로 지역을 초월하여 정치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전환되지 못한 점이 나타난다. 아울러 외형상 조세의 양을 낮추거나, 지대를 고정하려는 조건을 내건 경제투쟁에 머물렀고, 그것도 국가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등 중앙권력에 호소하는 형태를 보였다.

 또한 당시 농민봉기가 군현 단위의 투쟁에 머물렀던 점은 국가의 농민지배방식에도 기인한 것이었다. 국가가 파악하는 최하의 행정 단위나 조세수취 단위는 군현이었고 특히 부세의 경우 군현별로 조세 총량을 결정하여 납부하도록 하였다. 부세량은 각 군현의 전결, 호구수에 따라 달랐고 징수 방법도 군현 내 고유의 관행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항쟁의 내용 가운데 부세의 양이나 징수 방법, 운영과정 등의 문제를 시정하고자 할 때 해결 방법이나 양상은 군현 단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62년 농민항쟁에서는 이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군현 단위의 국지적 규모에서 벗어나서 이웃 군현까지 활동을 확대시키면서 다른 읍의 항쟁을 도와주거나 연대하려고 한 점이 보인다. 가령 함양농민의 활동이 한 사례인데, 3월 16일 경상도 함양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면서 이웃 군현에까지 확산되었다. 함양 농민들은 전라도 長水로 通文을 띄워 만일 원통한 일이 있으면 앞으로 그곳으로 옮겨가겠다고 하였다. 나아가 이들이 이웃 여러 읍으로 통문을 보내며 선전활동을 하자 다른 지역민들의 호응도 일어나게 되어 자연스럽게 국지성을 넘어섰다. 때로는 이웃 지역의 활동까지도 강제할 정도였다. 함양에서는 남원민에게 이서 가운데 흉악한 자 7명을 타살한 다음 소식을 보내도록 요구하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직접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처벌하겠다고까지 강압적으로 활동하였다.685)≪龍湖閑錄≫권 3, 三南民鬧錄, 51∼52쪽.

 이러한 활동은 함양을 중심으로 하여 10여 읍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무리들을 “晋州餘黨이 각처에 흩어져서 서로 상응하는 듯하다”고 하여 읍간의 활동을 연계적으로 보았다. 심지어 정읍에서 수령을 위해한 사례까지도 진주여당이라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료가 부족하여 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농민들의 문제가 읍 단위를 넘어서는 농민 공통의 문제임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진주의 경우에도 인근 곤양, 단성의 농민들도 봉기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전라도 여산의 민가가 충청도 은진의 농민 수천 명에 의해 불타자 정부에서는 커다란 문제로 지적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선산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난 뒤 곧바로 이웃한 개령에서, 부안의 농민항쟁 뒤 곧이어 인접 금구에서, 충청도 회덕의 농민항쟁 뒤 회인과 문의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봉기가 동시에 발생함으로써 결코 군현이라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성주·선산·상주지역의 경우 화전세 감하, 결가 인하 등 요구조건의 관철을 위해 2차, 3차의 봉기가 거듭 발생되어 정부의 개별적인 대응 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는 항쟁의 규모가 컸고 적극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함양농민항쟁의 경우 다수의 주민들이 운봉으로까지 피난가기도 할 정도였다.686)위와 같음.

 결국 이같은 사실들은 농민봉기가 질적으로 고양되고 농민들이 계급적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분산적이고 국부적인 지역성을 극복하게 될 때 차츰 전국적인 반봉건항쟁으로 유도될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편 농민들은 동헌과 읍내 습격을 통해 조세투쟁과 토호, 사대부들의 불법적인 향촌 지배에 대한 응징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고자 하였다. 그 방법의 하나는 중앙에서 파견된 안핵사, 선무사, 암행어사에게 직접 정소하는 것이었다. 당시 호남선무사 조구하는 이에 대해 “각처 민읍의 수 백, 수 천의 농민들이 3리 5리 간격으로 모여 있다가 신의 행차만 나타나면 모여들어 정소하였고 이로 인해 낮 동안 불과 3, 40리 밖에 갈 수가 없었다”고 보고하였다.

 농민들은 인접 마을의 해결 수준에 견주어 자신들의 문제도 적극 타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농민들은 실현을 보장할 完文이나 節目을 계속 요구하였고, 고산현의 경우 암행어사 조병식으로부터 各面捄弊節目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사실 농민들이 제기한 폐막은 평소 동헌이나 감영에서 해결을 거부했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함평봉기의 주도자 정한순은 안핵사 이정현 앞에 스스로 나타나서 10조에 달하는 요구사항을 올리면서 “현감, 감사에 대한 등소가 허사였는데 이렇게 사또에게 바치게 되어 다행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농민들은 국왕의 명을 받고 파견된 관리들을 지방수령과는 별도의 존재로 여겼고, 그들의 공적 권위에 힘입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 관리들은 농민들의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극히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권한조차 갖지 못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는 행동은 당시 농민들과 지도자들의 낮은 정치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한 측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봉기과정 중 읍권을 장악한 사실도 있음은 농민들의 정치적인 지향을 단편적으로나마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역에 따라 상이하지만 전면봉기를 하면서 수령이 도피하고 관속이 흩어지며 봉건권력으로 농민들을 제압하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 때 농민들의 향회가 바로 읍권을 장악하는 기구로 등장하였다. 여기에서는 먼저 농민들의 의사에 합당한 인물로 首吏, 首鄕과 같은 핵심 관속을 임면하고 문제가 된 文簿를 열람, 조사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농민들의 읍권 장악 기간이 수 개월에 이르기도 하였다. 추측컨대 이 기간을 통해 농민들의 정치의식은 강화되었고, 활용여부에 따라 분명한 투쟁목표와 구체적인 타도대상이 설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농민들은 1862년 농민항쟁 과정에서 조세제도의 철폐, 시정 요구를 통해 경제적 면에서의 반봉건을 주장하였고 수령, 관속과 읍권 담당자들에 대한 공격과 읍권 장악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현존하는 봉건적 통치체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인 정치의식을 표출하고 있었다. 반면 정부에서는 당시의 사회모순을 균등한 조세부과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농민항쟁으로 일어난 체제붕괴의 위기 상황을 삼정이정책의 시행을 통해 모면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농민항쟁은 단순히 수탈에 대한 저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잘못된 수취관행에 대한 개혁의 요구였다. 따라서 항쟁이 발발하면서 관에 구체적으로 요구조건을 하나하나 제시하기도 하였고, 지역에 따라서 읍내에 오랫동안 둔취하면서 읍폐 처리의 추이를 지켜보기도 하였다. 나아가 중앙에서 釐整廳을 설치하고 관료, 유생층의 의견을 묻자, 농민들도 자신들의 견해를 정리하여 올리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첫째 吏逋를 부당하게 민간에 부담시키는 행위를 거부하였으므로 항쟁의 결과 도결, 결렴 등이 상당히 혁파되었다. 실상 농민들은 도결의 結價 책정의 형태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도결을 통한 포흠 전가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는 환곡의 耗條를 ‘臥還取耗’라는 부세화의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가령 상주에서 포흠의 모조를 수취하는 문제를 모조를 토지에 부과할 것인가 호구에 분배할 것인가를 두고 大民과 小民 간에 주장이 맞섰는데, 이는 포흠의 충완과는 달리 와환취모의 형태로 부세화할 때 그 대상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결가 인하를 요구하는 경우 단순히 부세액을 낮춰달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수취의 금납화 및 정액화를 농민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즉 관에서는 결가의 방식을 채택하면서 그간 산발적으로 시도되었던 雜稅 및 포흠분의 結斂을 결가 속에서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결가가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결가 인하는 이같은 명목없는 수취를 거부하면서 개혁을 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지역에서 농민항쟁을 치루면서 결가 인하를 얻어내었다. 가령 선산은 8냥, 성주, 상주 10냥 정도였다.

 상주의 경우 농민의 요구조건과 부세제도 전반의 변화양상을 잘 제시하고 있다. 본래 선무사 이삼현이 내려왔을 때 결가 10냥과 洞布를 시행하겠다고 하였으나, 농민들은 民會를 통하여 결가는 8냥, 환곡은 와환취모를 하였으며, 軍布는 2냥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687)≪壬戌錄≫<鍾山集抄>, 206쪽. 상주에서는 농민항쟁의 성과로서 농민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結役 외에 수탈의 소지가 컸던 환곡모조, 大同木, 統營米 등을 포함하여 13냥으로 책정되었다. 상주는 처음부터 농민층이 항쟁의 전과정을 주도하였고 따라서 민회의 활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항쟁의 성과도 뚜렷하였다고 보인다.

 결국 농민항쟁에서 표출된 농민들의 邑弊矯捄의 주장은 삼정제도에 대한 저항이자 새로운 부세체제를 요구하는 반봉건운동의 과정이었다.

 이렇게 부세문제를 중심으로 표출되었으나 이를 통해 계급간의 갈등도 더욱 심화되었다. 항쟁이 끝난 뒤 이서층과 대민들은 항쟁에 가담한 농민들을 탄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688)≪晉陽樵變錄≫巡營甘結. 이전의 항조투쟁도 항쟁 뒤 더욱 격화되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수탈의 잠정적인 후퇴를 가져올 수 있는 삼정이정책은 농민들의 봉기를 통해 얻어낸 구체적 성과물이기도 하였다. 농민항쟁이 일어난 뒤 성립된 대원군정권은 대내적인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戶布法, 社倉制와 같은 일련의 조세개혁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대원군의 조세개혁책은 앞서의 1862년 농민항쟁에서 농민들이 제기하고 투쟁으로 획득하고자 하였던 삼정이정책의 일부를 계승한 데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1862년 당시의 삼정이정책이야말로 당면한 사회모순을 부분적이나마 해결하는 데 있어서 정부가 제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응책이었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한편 대원군, 민씨정권기에도 근본적인 토지개혁에 대한 시도는 없었으며 토지균분의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토지개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는 농민들이 지배층에 대한 투쟁을 통해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농민들은 1862년 농민항쟁 이후 동학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농민항쟁을 통하여 이같은 문제를 거듭 제기하였다.

 19세기 후반 농민들의 항쟁은 이처럼 다양한 계급모순 외에 새로이 민족모순이 부가되면서 고양된 농민들의 의식과 외부 조직체계의 도움에 의해 전국적인 항쟁으로 그 외연이 넓어졌다. 체제모순의 담지자인 농민들은 차츰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저항의 주체로 결집되어 갔는데 이같은 계기는 바로 1862년 농민항쟁으로부터 마련되었던 것이다.

<宋讚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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