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3) 변란의 추이
  • (1) 19세기 전반의 변란

(1) 19세기 전반의 변란

 정감록을 이념적 무기로 하는 변란이 모의 단계를 지나 거사로까지 나아간 것은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나타난다. 그러나 대체로 임진왜란을 겪은 후부터 정권에서 소외된 부류나 피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정감록이 서서히 확산되었고, 그것을 무기로 한 변란도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18세기만 하여도 영조 4년(1728)의 戊申亂, 정조 6년(1782)의 李京來·文仁邦 등의 역모사건, 정조 9년의 洪福榮의 역모사건 등에 정감록이 이용되었고,701)18세기의 변란에 대해서는 高成勳,≪朝鮮後期 變亂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3) 참조. 19세기에 들어와서도 변란을 도모하는 세력에 의해 변란의 전초단계라 할 수 있는 괘서사건, 그리고 모의단계에서 탄로가 난 作變사건이 자주 발생하여 지배층을 놀라게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1811년의 洪景來亂에 결부된 것이 대표적이지만, 그전에도 순조 원년(1801)에 의령에서 훈장출신 李好春의 괘서사건이 있었으며, 순조 4년에는 장연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울릉도와 고백령도에서 군량미를 확보하여 변란을 일으키려 했던 李達宇 등의 작변이 있었다. 홍경래 난이 일어난 이후에는 주로 ‘홍경래불사설’의 형태로 정감록이 이용되었으며, 순조 17년 安有謙과 蔡壽永은 명화적과 연결을 시도하는 한편 對馬島에 請兵을 계획하기도 했고, 헌종 2년(1836) 동래에서는 울릉도에서 양병을 하는 한편 일본에 원병요청을 기도하기도 했다. 또 헌종 10년에는 정조의 동생이자 철종의 조부인 恩彦君 裀의 손자를 추대하여 거사를 계획한 閔先鏞 등의 작변이 있었고, 철종 3년(1852)에는 鄭又龍이 영양에서 울릉도 적한과 연결하여 변란을 모의하였다.702)19세기 전반의 변란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李離和,<19世紀 前期의 民亂硏究>(≪韓國學報≫35, 1984).
―――,<19世紀 民亂의 組織性과 連繫性에 關한 한 硏究>(≪嶠南史學≫창간호, 1986).
한명기,<19세기 전반 반봉건항쟁의 성격과 유형>(≪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19세기 전반 괘서사건의 추이와 그 특성:1801년 하동·의령괘서사건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43, 1993).
李相培,<朝鮮後期 漢城府 掛書에 관한 硏究>(≪鄕土서울≫53, 1993).
―――,<純祖朝 掛書事件의 推移와 性格에 관한 硏究:1926년 淸州牧 掛書事件을 中心으로>(≪史學硏究≫49, 1995).
―――,<「山陰記事」를 통해 본 山淸掛書事件의 특징>(≪史學硏究≫50, 1995) 참조.
裵惠淑,≪朝鮮後期 社會抵抗集團과 社會變動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4).

 19세기 전반의 괘서사건이나 작변에는 몇 가지 점에서 뚜렷한 특징과 한계를 보여준다. 먼저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변란모의보다는 개별적인 차원에서도 손쉽게 할 수 있는 괘서사건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18세기에 일어난 정감록 관련 사건에서 보이는 성격, 즉 정파간의 알력이나 갈등에서 초래된 정권쟁탈의 방편으로 정감록을 이용하던 점이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헌종 10년(1844)에 왕족을 추대하여 전면에 내세우고자 했던 민선용의 작변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동모인을 기록한 義狀을 만들기도 했으며, 천문과 상술에 무불통지하다는 주모자 민선용은 거사에 성공하면 판서가 될 수 있다는 말로 동모자를 끌어들였다.703)≪推案及鞫案≫(亞細亞文化社 影印本), 292책, 갑진 逆賊晉鏞遠德等獄案. 세번째로 대마도 혹은 일본 등 외국의 세력을 이용하려 한 점이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의 변란이 대체로 일본이나 여타의 외세에 대해 공격적이었던 점과 다른 모습이다. 네번째로 변란시도의 전제가 주로 개인적 불만의 해소라는 측면과 함께 엽관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작변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순조 원년(1801) 하동괘서사건의 주모자인 李好春은 훈장 출신인데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에서 사건을 일으켰음을 자백하여 이들의 의식수준이 사회적 모순의 해결보다는 개인적인 원망의 해소차원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주모자들 내부에서도 아직 신분문제가 제기되고 있어서 그들의 지향이나 의식에 뚜렷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순조 26년 청주괘서의 주모자인 아전 출신 朴亨瑞와 양반 출신 申季亮 사이에는 신분문제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변란 주도층이 여전히 전근대적 의식세계에 매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며 전개된 변란은 19세기 후반, 특히 대원군 집권기에 들어오면서 각종 항쟁의 전례없는 다발과 함께 일정한 변화양상을 보이며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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