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3) 변란의 추이
  • (3) 광양란

(3) 광양란

 光陽亂은 19세기에 들어 수없이 많이 기도된 변란 모의 가운데 처음으로 거사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이후 李弼濟亂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변란의 추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다.712)≪推案及鞫案≫304책, 逆賊晦行等鞫案. 주모자 閔晦行은 천문지리에 무불통지한 인물로 이미 20여년 전부터 ‘異圖’를 품고 영남과 호남 일대를 편행하여 동지를 규합했으며, 1년 전인 고종 5년(1868)에도 강진에서 변란을 기도한 바 있다. 田贊文 역시 전국을 돌아다니며 세력을 규합해온 인물이다. 고종 5년 9월 민회행은 전찬문·姜明佐·李在文·權學汝 등과 함께 장흥에서 偸葬을 핑게삼아 일당 25명을 끌어모으고 위장한 喪輿에 무기를 숨겨 강진병영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강진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주막에 이르렀을 때 비바람이 크게 불어와 다시 거사할 것을 기약하고 흩어졌다.

 그 이듬해에 재기한 것이 광양란이다. 장흥에서 실패한 민회행은 이재문, 崔斗允 형제, 金湖島의 白乃興 등 14명과 결당하고 변란을 모의하였다. 필요한 錢穀과 화약을 마련한 다음 3월 18일 하동으로 갔다. 하동에서 장사꾼으로 가장한 60∼70여 명이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牛孫島로 들어가 갑주와 죽창, 깃발 등을 제조하고 山祭를 지낸 다음 광양으로 쳐들어갔다. 3월 21일 배를 타고 초남포에 도착하였고, 광양 관아를 공격한 것은 이틀 뒤인 3월 23일 밤이었다. 軍簿를 점열하고 編伍作隊한 이들은 관아를 공격, 군기를 탈취하여 궁총으로 무장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현감 尹榮信의 인부를 탈취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사창곡을 읍민들에게 분급하여 위무하고 일부는 진휼미로 사용해야 한다고 사창에 반입한 후 창고를 봉하였다. “백성을 살해하거나 민재를 약탈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중죄가 될 것임”을 호령하여 읍민 중 살해된 자는 한 명도 없었다.713)≪日省錄≫ 고종 6년 4월 5일. 또한 사창곡으로 밥을 지어먹고 吏廳錢으로 술을 사먹으며 하룻밤을 보냈다. 그 동안 일부의 吏民들을 가담시켜 그 수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때 전찬문은 軍務總察로 성문의 출입을 감시하였고, 이재문은 군부를 작성, 병사를 點閱하였다. 그러나 광양란은 곤욕을 치른 다음 몰래 관아를 빠져나갔던 현감 윤영신이 이끌고 온 관군의 공격을 받아 25일 밤에 진압되었다.

 민회행은 장차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동모자를 규합했는데, 당시의 보고에 의하면 이들의 모습이 ‘殘班破落者’로 보였다 한다. 민회행이 천문지리에 무불통지하고 권학녀 역시 術數에 능통했다는 점, 그리고 “이번 거사에 8도가 모두 호응하여 한번 방포하면 경각에 수만 명이 모일 것이며, 또한 영남에서 70여 명이 오도록 되어 있다”714)위와 같음.고 하여 전국적 거사를 의도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광양란 역시 변란의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양란은 진주민란을 본받아 읍폐를 교구하려 하였으며, 반왕조적 구호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민란적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 점은 광양란이 거사를 일으키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변란이었다는 점과 함께 이후의 이필제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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