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3) 변란의 추이
  • (4) 이필제란

(4) 이필제란

 19세기의 변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李弼濟亂이다. 이필제는 고종 6년(1869)에서 고종 8년에 걸쳐 진천, 진주, 영해, 문경 등 네 곳에서 변란을 연속적으로 기도했다. 이필제가 처음으로 기도한 변란은 이후 네번째의 문경작변 때까지 행동을 같이 하는 金洛均과 함께 모의한 고종 6년 4월의 진천작변이다.715)≪捕盜廳謄錄≫중, 기사 4월 金炳立公州謀逆告變·신미 9월 鄭岐鉉李弼濟等鳥嶺逆謀事 및 하, 기사 4월 金炳立告變·신미 8월∼임신 4월 鄭岐鉉李弼濟等鳥嶺逆謀事.
≪推案及鞫案≫306책, 逆賊弼濟岐鉉等鞫案.
이필제와 김낙균은 “我國을 動하여 得兵한 후 북으로 중원을 정벌한다. … 만약 국가에 불안한 일이 있으면 同心之人이 무리를 모으고 의병을 일으켜 국가의 보존을 도모하면 자연 공이 있을 것이다”, 또는 “근래 풍설이 騷擾한데 대국의 黑鬼子가 出來한다는 말이 있으며, 또 서양세력이 타국인과 연합하여 우리 나라를 침략한다고 한다. … 그대는 장차 이곳에서 久居할 것인가 다른 곳으로 갈 것인가”, 그리고 “弼濟의 필자는 弓弓이고, 필제는 乙酉生이기 때문에 乙乙을 말하니 壬辰松松之說(임진왜란 당시 피난지를 가르키며 명나라의 장수 李如松의 ‘松’자에서 유래)과 같다”는 등716)≪捕盜廳謄錄≫중, 기사 4월 金炳立公州謀逆告變, 735·737·741쪽. 주로 정감록의 避兵說과 양이의 침공이라는 대외적 위기의식을 결부시켜 동모자를 포섭하였다.

 이들은 주로 인척관계나 평소의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동모자를 포섭하는 한편,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가를 끌어들였다. 진천작변을 고발한 金炳立은 김낙균의 당숙이었으며, 이필제에 대한 말을 전해듣고 찾아온 공주의 진사 沈弘澤은 ‘이필제에게 千金을 아까워하지 않은’ 재산가였다. 또한 이들이 충의를 강조하고 북벌을 주장한 점이나, 양이의 침공에 의병을 일으켜 국가를 보전하면 공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점은 거사의 명분을 세우고 엽관적 성향이 있는 재산가를 끌어들이기 위한 계책으로 보인다.

 진천에서 시도한 변란이 사전에 발각되어 도망한 이필제는 그 해 12월 진주 일대를 무대로 두번째의 변란을 기도했다.717)≪慶尙監營啓錄≫(≪各司謄錄≫11, 國史編纂委員會, 1984), 고종 6년 3월∼7월, 144∼226쪽.
≪推案及鞫案≫3∼5책, 경오 晉州罪人等鞫案.
먼저 이필제는 거창으로 가서 고종 6년(1869) 8월부터 알고 있던 楊永烈, 그리고 양영렬의 소개로 鄭晩植·成夏瞻 등을 만나 일단 남해에서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양영렬은 본래 평양에 살다가 임자(1852), 계축년(1853)에 북경이 소요하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을 느껴 이곳에 내려온 자이다. 정만식은 서울 사람인데 병인양요 후 피난을 위해 고령으로 이사한 자로, 이미 고종 2년 무렵부터 변란을 계획하여 “民政의 황급함을 보고 장차 대사를 일으켜 만민을 구하기 위해 제주와 울릉도 등지에 들어가 方略을 경영하려”했던 인물이다.718)≪慶尙監營啓錄≫고종 7년 6월 27일 沈永澤三推, 205∼206쪽(영인본에는 고종 6년 기사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고종 7년 경오의 誤記로 보인다. 이필제가 진주일대에서 두번째의 변란을 기도한 것은 고종 7년이기 때문이다). 성하첨 역시 병법과 術數에 능통하고 관운장에 비견되기도 한 인물이었으며, 이들의 거사모의에는≪古山子秘記≫·≪尙州新都錄秘記≫등의 비기가 등장하고 있다.

 정만식·성하첨 등과 합세한 이필제는 자기의 뜻은 중원에 있으며, 장차 조선은 동서남북 네 개의 제후국으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정만식의 얼굴에 黃氣가 있고 손바닥에 異紋이 있음을 들어 그를 鄭眞人으로 내세웠다. 거사에 필요한 병력은 평소의 文名을 이용하거나 후한 임금으로 짐꾼을 모은다는 명분으로 모집하기로 하였다. 모군에 필요한 돈은 성하첨이 밭을 팔아 마련한 170냥으로 충당하였고, 남해로 들어가기 직전 부족한 船價를 충당하기 위해 明火賊으로 위장하여 인근 부자집의 재물을 탈취하려고도 했다.719)≪慶尙監營啓錄≫5월 21일 鄭晩植更推·6월 14일 梁永烈供 및 3월 26일 鄭在永供. 이필제는 거사의 명분을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지금의 시세는 洋擾가 자주 있고 북쪽이 소요하여 강을 건너올 우려가 있으며, 왜구가 엿보는 조짐이 있고 해도에는 또한 도적이 많으니 나라의 형편이 산넘어 산이다. … 만약 지금 한 곳에서 병사를 일으키면 사방에서 봉기하고 곳곳에 戰氣가 있어서 온 나라가 삼분사열되어 北憂를 막기 어렵고, 群鄭(여러 명의 鄭眞人)이 함께 나타나는 것 역시 저지하기 어려우므로 나는 義兵을 일으켜 海島에 들어가 安定을 도모할 것인즉 집과 나라를 함께 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慶尙監營啓錄≫ 6월 14일 梁永烈供).

 이들이 거사에 착수한 것은 12월 11일이었다. 먼저 해도에 들어가 군기를 탈취하고 島民들을 동원하여 통영, 고성, 김해를 거쳐 육지로 나가 성을 공격하고 長驅大進하여 곧장 서울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募軍한 사람들 가운데서 약속된 돈을 주지 않는다거나 혹은 御史로 가장하여 남해에 들어가 탈재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는 자가 속출하였다. 또 남해 죽도로 건너가려 했으나 장교 한 사람이 동승하게 되자 탄로날 것을 염려하여 중도에 포기하고 모두 배에서 내리고 말았다.

 남해 거사에 실패한 이필제 등은 다음해 2월 28일 또 다시 덕산에서 樵黨을 모아 營府로 들어가 관장을 둘러메고 읍촌을 돌아다니면 軍丁이 모여들 것으로 기대하고 변란을 시도했다. 이들은 선산, 진주, 거창 등지의 인물들에게 서찰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다니며, 정감록의 내용이나 혹은 土豪武斷 등 사회모순을 거론하여 이들을 포섭하고 자금과 장정들을 모으고자 했으나, 결국 동모자로 포섭한 趙鏞周의 투서와 洪鍾宣, 全洛雲의 고발로 실패하고 말았다.720)尹大遠, 앞의 글, 161∼164쪽.

 이필제가 세번째로 기도한 영해란은 진천작변의 동모자 김낙균과 함께 교조신원운동을 가탁하여 영해지방의 동학교도를 이용하여 일으킨 것으로 네 차례의 변란 시도에서 유일하게 거사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 변란이다. 진주에서 거사에 실패한 이필제가 고종 3년(1866)부터 알고 지내던 영해의 李秀用과 南斗炳을 찾아 간 것은 고종 7년 10월을 전후한 무렵이었다.721)朴周大,≪羅巖隨錄≫, 103쪽.
≪寧海府賊變文軸≫4月 9日, 南斗炳供.
≪羅巖隨錄≫에는 1870년 11월에 이수용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道源記書≫(≪東學思想資料集≫, 亞細亞文化社, 1979), 211∼213쪽에 따르면 이필제는 이미 1870년 10월에 이인언과 朴君瑞 등을 최시형에게 보내 교조신원운동을 벌일 것을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필제는 스스로를 동학교도로 자처하여 영해지역의 동학교도들을 포섭한 다음 崔時亨에게 사람을 보내 교조신원운동을 가탁하여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필제는 참여를 거부하던 최시형에게 최시형의 측근이던 李仁彦·朴士憲 등을 여러 차례 보내 설득한 끝에 드디어 고종 8년 2월에는 최시형을 직접 만나게 된다. 이필제는 최시형을 만나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거사계획을 통보하였다.

지금 단군의 영령이 세상에 다시 나왔으니 하루에도 아홉번 변하는 것이 나다. 한편으로는 선생의 치욕을 씻고 한편으로는 창생의 재앙을 구제하려 하는데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중국에서 창업하는 것이다. … 내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고 조정에서도 알기 때문에 五營이 모두 감응하고 六曹가 머리를 돌린다. 이 어찌 天運이 아니겠는가. 그대들이 만약 기꺼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身命은 내 손에 달렸으니 따르고 안 따르고는 내가 알 바 아니다. 폐일언하고 선생의 受辱日이 3월 10일이다. 그 날로 정하였으니 다른 말은 하지 말고 따르라(≪道源記書≫, 214∼221쪽).

 최시형은 이필제의 외모와 언변에 압도당하였고, 또 이필제가 최제우의 신원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들은 “세상이 어지러워 곧 난리가 날 것이니 의병을 불러모은 연후에야 살 수 있을 것이다”, “왜선 수천 척이 쳐들어올 것이다”는 말을 퍼뜨려 민심을 동요시켰다. 그리고 이필제가 동해의 섬에 있는 정진인 혹은 異人이라는 말로 사람을 끌어들였고, 거사에 성공하면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군량조달을 기도하기도 했다.722)≪寧海府賊變文軸≫3월 21일 幼學 權永和供, 全仁哲·安大齊供.
≪嶠南公蹟≫4월 22일 徐羣直重推·4월 25일 韓相燁重推·4월 26일 鄭昌鶴更推 및 5월 18일 禹大敎三推.
이러한 모의과정에서 맹활약을 한 것은 鄭致兼과 동학교도인 姜洙(姜士元, 姜時元), 全仁哲, 그리고 남두병이었다. 정치겸은 가장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강수는 친인척 등을 통해 5백여 명을 모았다. 역시 동학교도인 전인철은 이미 오래전부터 거사를 준비해왔다고 최시형에게 밝히면서 3월 10일의 거사를 다짐받고 있었다.723)≪嶠南公蹟≫5월 1일 李羣協更推, 43쪽.
≪道源記書≫, 219∼220쪽.
또 고종 3년(1866)부터 이필제와 교류가 있던 남두병은 자기가 거느린 무리 3백여 명을 이끌고 동참하기로 했다.724)그러나 남두병은 정작 거사에는 불참하고 오히려 이필제를 진압하기 위한 召募文을 썼다고 한다(≪嶠南公蹟≫4월 30일 南斗炳更推).

 거사일인 3월 10일 일차 집결지는 雨井洞 朴永琯(朴士憲)의 집이었다. 박영관의 집에 모인 사람은 백 명 내지 150여 명이었다. 이들은 먼저 都錄을 만든 다음 中軍, 別武士, 執事 등의 직책을 정하는 한편, 성내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미리 細作을 파견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황혼 무렵 산에 올라 산제를 지낸 다음 조총과 죽창, 칼 등으로 무장하고 관아에 쳐들어간 것은 밤 열시경이었다. 이 때 이들의 무리는 5, 6백 명 정도였다. 먼저 군기고를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부사를 죽인 다음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에는 “우리들의 거사는 다만 本官(영해부사)의 탐학이 비할 바 없이 극심하기에 그 죄를 성토하려는 것이고, 읍민들을 해칠 마음은 전혀 없다”고 썼다. 이필제는 영해를 떠나 영양으로 가는 길에도 인근의 동민들을 모아놓고 위무하는 글을 써 보이기도 했다.725)≪寧海府賊變文軸≫4월 22일 張成眞更推.
朴周大,≪羅巖隨錄≫, 87쪽.
≪嶠南公蹟≫4월 25일 韓相燁更推, 17쪽.
또 격문과 함께 탈취한 돈 150냥을 다섯 동네의 頭民들을 통해 동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하며 민심을 위무하였다.726)≪嶠南公蹟≫4월 22일 張成眞更推·4월 26일 金昌福更推 및 5월 5일 柳渭澤供.

 이필제는 그날 밤 여세를 몰아 영덕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동모자들의 반대로 미수에 그쳤다. 원래 영해를 공격한 다음 영덕·진보·영양 등지를 공격하고 서울로 직향하려던 이들은 다음날 아침을 먹은 후 영해 관아를 떠났다. 영해를 떠난 것은 인근 고을을 석권하여 서울로 직향한다는 구상을 관철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3월 13일 영양을 공격하기 위해 정탐한 데서 알 수 있다. 이필제는 영양을 향해 가는 도중에도 인근 동민들을 위무하였다. 주변의 주민들을 잡아다가 병사로 삼자는 주장에도 반대하며 절대로 주민들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였으며, 부하들이 민가에 방화하자 명령을 잘 듣지 않는다 하여 처벌하기도 했다. 이것은 곧 이전 몇 차례의 변란시도 경험, 특히 진주에서 제시되었던 “민인들의 힘을 얻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영한 것으로 거사에 필요한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리 별 호응이 없었고,727)≪嶠南公蹟≫4월 26일 鄭昌鶴更推·4월 26일 金昌福更推. 인근 고을의 관군이 몰려오자 일월산 쪽으로 퇴각하고 만다.

 영해란에는 많은 수의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였다. 체포된 자들 중에는 동학교도가 다수 있었고, 최근에는 최시형이 참가하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또 거사 당일에도 참가자들의 복장을 청색과 홍색으로 표시하여 동학교도와 평민을 구분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영해란의 기본성격을 ‘敎祖伸寃運動’ 혹은 ‘東學亂’으로 보기도 한다.728)金義煥, 앞의 글.
朴孟洙, 앞의 글(1986, 1989).
물론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은 기본적으로 동학교도의 입장에서 교조신원운동의 차원에서 참가했다. 그러나 영해란은 기본적으로 진천에서부터 남해·진주 등지에서 이필제가 주도한 변란기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729)이필제를 동학교도로 파악하기도 하나, 이필제가 동학교도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기록은 취약하다. 李敦化의≪天道敎創建史≫(≪東學思想資料集≫2, 亞細亞文化社, 1979)에 따르면 이필제가 得道 이전의 최제우를 만난 후 감복하여 그를 따르기로 맹세한 사실이 있다하나 떠도는 소문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또≪道源記書≫에도 이필제가 1863년에 입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황상 이필제가 최시형를 끌어들이기 위해 꾸며낸 말인 것으로 여겨진다(≪道源記書≫, 212쪽). 영해란에 참가한 사람들도 이필제를 동학괴수로 지목하고 있으나(朴孟洙, 앞의 글, 1989) 이 역시 소문을 들은 데 불과하다. 또 이필제는 4차례에 걸친 변란을 기도하였지만 영해를 제외한 어디에서도 동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영해란에서도 난을 일으킨 다음에는 ‘교조신원’ 등 동학과 관련한 어떠한 주장이나 행동도 취한 바가 없다. 이필제가 최시형을 만났을 때 교조신원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그 요체는 오히려 “자신은 천명을 받은 사람이다”, “천운이 왔다”,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중국에 창업하는 것”이라는 등의 표현에서 확인되듯이 변란을 도모하려는 데 있었다. 영해란은 기본적으로 이필제가 이러한 뜻을 펴기 위한 의도에서 일으킨 것이다.

 진주에서 거사에 실패한 뒤 영해로 온 이필제가 한 일은 진천이나 진주에서와 같은 변란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처음에 한 일은 이 지역의 변란세력과 담합하는 일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남두병이다. 남두병은 能文能理한 인물로 고종 3년(1866)부터 이필제와 교류가 있었고, 휘하에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자이다. 이외에도 가장 많은 사람들을 변란에 끌어들였고, 영해 관아를 빠져나갈 때도 이필제와 함께 가마를 타고 갔다는 정치겸과 점술에 밝고 자칭 賊隊의 謀士라고 한 이군협도 영해 일대를 근거로 한 변란세력으로 보인다.730)≪嶠南公蹟≫5월 1일 李羣協更推.

 이들과 만나 거사를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던 동학교도들을 끌어들였다. 동학교도의 우두머리는 최시형이었지만 최시형을 만나기 전에 이미 박사헌·이인언·全東奎 등을 포섭하였다. 박사헌과 이인언은 최시형과 이필제가 만나기 전에 이필제의 뜻을 최시형에게 전달하였고, 전동규는 이필제와 뜻을 함께하며 오래 전부터 거사를 준비해왔다.

 한편 일찍부터 이필제의 변란에 가담한 동학교도 가운데는 新鄕勢力이 많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영해는 오래 전부터 신향과 舊鄕 간의 갈등이 심각하던 지역으로 이 지역의 동학교도 가운데는 신향세력이 많았다.731)張泳敏, 앞의 글.
―――,<1840年 寧海 鄕戰과 그 背景에 관한 小考>(≪嶠南史學≫2, 1987).
이러한 점은 포교 초기의 동학이 어떤 식으로 이해되었고 수용되었는가를 시사해주고, 교도의 구성성분이 단순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개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신향출신의 동학교도들이 영해란에 가담한 것은 종교적 입장보다는 향권을 둘러싼 구향과의 대립에 동학교단의 힘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은 거사에 동참하기를 꺼려하던 최시형과 달리 일찍부터 이필제의 변란에 가담하고 있었고, 한결같이 최시형의 동참을 추동하고 있다는 점도 그들이 변란에 가담하는 동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최시형에게 “우리가 그 무리에 들어가는 것은 사리에 가깝지 않고, 이필제가 교조신원이 아닌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교조신원을 주장하기 때문에 따른다”라고 하여 최시형이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명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거사준비는 이필제가 의도한 바대로 진행되었다. 이필제는 최시형과 동학교도들을 동참시키려는 의도에서 거사 날짜도 최제우의 사형일인 3월 10일로 잡았다.

 이상과 같은 사정들을 고려할 때 영해란 역시 진천이나 진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정감록을 이념적 무기로 한 변란의 한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영해에는 오래된 신향과 구향의 갈등, 이것과 깊은 관련을 가진 동학교도 조직 등 변란에 이용할만한 좋은 자원이 있었고, 이필제는 이러한 자원들을 잘 이용함으로써 거사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해란은 동학이 변혁의 무기로 활용될 수 있는 좋은 자원임을 확인해주었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여기서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이필제가 동학교도를 가탁하고 ‘背道之林’ 속으로 携入했다는≪道源記書≫의 기록이다. ‘도를 배반한 무리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표현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자들을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시에도 최시형과 노선을 달리하는 교도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당시의 동학교도 가운데 동학의 경전을 心得한 교도가 많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교도라하더라도 동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에는 다양한 편차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실제 고종 5년(1868)에 변란을 기도하였던 鄭德基는 최제우에 대해서는 “식견이 있는 영남의 白雲선생”으로, 또 동학에 대해서는 “移山移海하는 法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732)≪推案及鞫案≫303책, 謀叛大逆罪人德基等鞫案, 196∼198쪽.
≪捕盜廳謄錄≫하, 黃載斗告變, 522쪽.
이러한 점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동학은 치병의 수단이나, 총알을 막아주는 신비한 방술 등으로 이해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白凡逸志≫의 다음과 같은 기록도 그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20리쯤 가서 갯골이란 곳에 사는 오응선과 그 이웃 동네에 사는 최유현이라는 사람이 충청도 최도명이라는 동학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에 들고 나기에 문을 열지 아니하며,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능히 공중으로 걸어다니므로 충청도 그 선생 최도명한테 밤 동안 다녀온다고 하였다(김구,≪백범일지≫(서문문고판), 35쪽).

 이런 기록은 동학이 득도의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治病이나, 術數를 터득하는 수단 등으로 수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또 위에 언급한 정덕기와 같은 변란세력에 의해 정감록류의 비기로 받아들여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도를 배반한 무리들’은 바로 이와 같이 단순한 종교적 입장과는 다른 뜻을 가지고 동학에 들어간 세력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필제가 네번째로 시도한 것이 고종 8년 8월 문경의 鄭岐鉉과 동모한 조령작변이다. 이필제는 “東征西伐하여 濟世安民한다”는 기치를 내거는 한편, 이미 진천작변 때부터 알고 지내던 정기현에게 “西湖主人은 鄭哥로서 方營朝鮮하고 東山主人은 權哥로서 圖謀南京한다”는 말로 접근하였고, 동모자들에게는 조선은 정기현에게 맡기고 그에게 병력을 빌려 田橫島를 거쳐 등주, 채주로 들어가 중원을 취하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733)≪捕盜廳謄錄≫하, 鄭岐鉉李弼濟鳥嶺逆謀事 567·569쪽.

 이들은 영해에서의 동학과 마찬가지로 거사에 이용할만한 집단을 찾았다. 우선 이필제는 “지금 세상일이 크게 변하여 생민들의 고통이 오늘과 같은 때가 없었다. 여기에 先賢祠院을 철폐하여 민심이 다시 변하였다. 이러한 때를 이용하여 대사를 일으킨다면 인심이 물과 같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고 정세를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서원철폐에 관한 儒會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경상, 충청, 전라의 삼도 사람들을 모았다. 이 때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떨어짐에 따라 이에 대처하기 위한 유림들의 모임이 잦았고, 항의를 하는 집단적인 상소와 상경이 잇따르고 있었다.

 이필제가 이용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였다. 이필제는 서원철폐에 대해 “선비된 자의 도리로서 침묵할 수 없으니 부득불 齊會하여 일차 伏閤하는 것이 좋겠다”는 통문을 돌려 유회를 가탁하여 변란을 기도했던 것이다. 또 이들은 “근일 영남의 선비들이 治疎道會라고 일컫는 것도 실은 이런 심정 이런 일로서 영남일도가 모두 同聲同應이고, 이미 서로 약속이 되었다”, 그리고 “밖으로는 洋夷가 8월에 다시 오기로 서로 약속되었다”는 말로 유림세력을 끌어모았다. 풍기의 權應一, 충주의 宋僖哲, 상주의 金公先 등은 각기 백여 명씩 동원하기로 하였는데, 그 방법은 모두 유회를 가탁한 것이었다. 거사일은 8월 2일로 잡혔다. 일단 조령에 모여 먼저 문경읍을 탈취한 다음 한편으로는 괴산, 연풍으로 직향하고, 또 한편으로는 충주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권응일은 大元帥, 정기현은 眞人, 鄭海昌은 謀士, 金元鳴은 先鋒 등 각기 직책을 맡아 거사를 진행하고자 했다.734)朴周大,≪羅巖隨錄≫, 102∼105쪽. 그러나 결국 조령별장이 기미를 알아차려 이필제를 포함한 주모자들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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