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4) 변란의 성격
  •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19세기 후반의 변란에 나타나는 주목할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변란 주도층들이 斥倭, 斥洋을 위한 義兵을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참여세력을 동원하려 한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는 당시의 시국과도 적지 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종 5년(1868)에 오폐르트 도굴사건 직후에 내린 바 “해적을 섬멸하는 자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擢用할 것이다”는 국왕의 교지는 지방으로까지 잘 알려져 있었다.762)朴成壽 註解,≪渚上日月≫상, 122쪽. 이러한 사정도 엽관적 성향의 사람들을 부추겼으라는 것은 쉽게 추측이 간다. 곧 당시에 팽배해 있던 대외적 위기의식과 외세의 침략행위가 한편으로는 엽관적인 인물들에게 입신양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 5년에 5백 명의 神兵과 덕유산의 장사로 ‘南中’에서 기병하려 한 정덕기가 세력을 규합한 명분은 “후세에는 延日 鄭哥가 권력을 잡게 된다”는 것과 “洋船을 물리치기 위한 義旅를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이필제 역시 진주거사에서는 당시의 정세인식을 바탕으로 양이와 오랑캐·왜구에 대비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영해거사에서도 倭船 수백 척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말로 민심을 동요시키고 의병을 모은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했다. 고종 14년에는 문경에 사는 이병연이 진주의 妖僧 이도현과 함께 “만약 양이와 왜가 쳐들어온다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야 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동지를 포섭하였다. 고종 19년에는 조병천이 돈으로 완패지류를 모집하는 한편 중국에 침입한 영국에 대한 토벌과 벌왜를 내세워 서울에서 변란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또 동학농민전쟁 직후에도 황해지역의 동학여당이 변란을 모의하여 동지를 규합한 명분은 척왜양을 위한 창의였다.

 이와 같이 척왜나 척양을 내세운 19세기 후반의 변란은 오히려 왜와 결합하여 변란을 모의하기도 했던 19세기 전반과는 그 양상을 전혀 달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종 11년(1860)의 북경함락에 대한 소식과 두 차례의 양요, 그리고 일본에 의한 강압적인 문호개방을 겪으면서 조선사회에 팽배하게 된 반외세적인, 특히 반왜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병인양요를 겪은 후 외세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은 대단히 심화되었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다음해인 고종 4년 3월에는 양이와 왜, 그리고 미국이 합세하여 우리 나라를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고, 고종 10년 8월에는 청나라에서 양이와 왜인 및 유구국이 합세하여 우리 나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보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763)韓㳓劤,<開港 當時의 危機意識과 開化思想>(≪韓國史硏究≫2, 1967).
成大慶,<大院君政權 性格硏究>(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1884), 9∼11쪽.
배항섭,<개항기 민중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과 대응>(≪역사비평≫, 1994년 겨울호).

 이와 같이 변란세력이 반외세의 구호와 倡義를 내세운 것은 대부분 거사에 참가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반외세의 구호는 ‘민란’에서는 전혀 제기되지 않는 문제여서 주목된다. 1862년 이후 꾸준히 전개되어온 민란이 1880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오면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큼 전국적으로 또 동시다발의 형태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 어느 곳의 민란에서도 ‘반외세’의 구호는 보이지 않는다. 민란의 흐름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斥倭·斥洋 구호가 변란모의에서는 이미 1860년대부터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반봉건적인 구호에 일면적으로 경사되고 고을 단위로 고립되어 있던 민란을 전국적 차원의 항쟁으로 끌어올리고, 보다 광범위한 계층을 포섭할 수 있는 반외세적 민족주의의 단초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곧 西勢東漸의 시대를 맞아 민중운동에도 반봉건적인 측면과 아울러 반외세적인 논리도 획득되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외세나 민족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몰각되어 있던 정감록을 한 단계 발전시킨 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정감록에 매몰되는 한 거기에는 “세상이 혼란해야 나 같은 무리가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입장에서 왕조의 전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외세마져도 불러들일 수 있다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인식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란의 이념적 성향을 곧장 근대 민족주의로 연결시키기에는 반봉건·반외세의 양측면 모두에서 한계를 안고 있었다. 반외세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화이론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반봉건의 측면에서도 조선왕조를 부정하기는 하였으나, 그 다음 사회에 대한 전망이 또 다른 왕조라는 전근대적 인식의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철종 2년(1851) 구월산 일대에서 변란을 기도한 최봉주는 “병자호란 때의 원수를 갚고 태조의 창업을 계승하기” 위해 田橫島라는 가상의 섬에 모여살고 있다는 明의 후예와 연합하여 淸을 공격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이필제도 조령변란의 모의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말로 동모자를 끌어들였다. 이필제의 진주거사에 참여했던 양영렬도 스스로 의병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만약 사변이 있으면 마땅히 창의군에 참여하고, 혹은 民堡를 하거나 혹은 주자의 屯田法을 실시하려 한다”고 한 바 있다.764)≪慶尙監營啓錄≫고종 7년 6월 14일, 梁永烈供. 화이론적 세계관이 깊이 각인되어 있음과 체제에 대한 전망이 태조의 창업정신이나 주자학적인 체제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변란의 주모자들은 三公六卿을 미리 정해둘 정도로 강한 엽관성향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과 함께 반봉건의 측면에서 이들의 의식이 가진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변란이 거듭되면서 이러한 한계도 일정하게 극복되어 나가고 있었다. 우선 거사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 고종 6년(1869)의 ‘광양란’과 ‘이필제란’에서는 농민들 속에 내재해 있는 힘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함으로써 민란과 변란이 결합될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되고 있었다. ‘광양란’의 민회행이 봉기의 목적을 “진주민란을 본받아 민란을 일으켜 읍폐를 바로잡고자 한” 데 있었다고 한 점이나, 관아를 점령하는 즉시 官穀을 풀어 읍민들에개 분배하고 榜文을 내건 점은 주목된다. 이는 이필제의 晉州作變에서 “만약 거사하려면 대의로써 八方에 포고하고 仁義之師를 행하여 민심을 撫恤한 연후라야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765)≪慶尙監營啓錄≫고종 7년 6월 19일 朴晩源三推.고 한 점과 마찬가지로 거사의 성공에는 무엇보다 농민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음을 깨닫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필제란의 주도자 중 한 명인 성하첨이 “壬戌樵變 때 그 읍의 물정을 살펴보니 그 무리가 쉽게 모이고 쉽게 흩어지더라. 이미 굳은 의지가 없으니 당연히 대패하였다”고 한 점, 그리고 “작년(1869) 봄 광양의 변란은 3, 4읍을 공략하여 성공하였고, 작년 가을 통영민요는 舟師와 軍兵이 모두 장교의 수중에 있어서 실패했다”고766)≪慶尙監營啓錄≫고종 6년 6월 14일 梁永烈供·5월 21일 鄭晩植更推, 187·217쪽. 한 점과 아울러 민란의 전개가 변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또 변란의 주모자들이 변란의 성공을 위해 민란의 경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이필제와 함께 진주의 변란모의에 참여한 崔鳳儀가 “數十村氓으로 출도하고자 하면 이것은 이미 식견이 부족한 것이다. 작년(1869) 統營民變 때 어찌 거사하지 않았는가. 나같은 사람이라도 만약에 簒逆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기회를 보아 設謀하여 일은 손바닥 뒤집듯이 쉬웠을 것이다”767)≪慶尙監營啓錄≫고종 6년 5월 12일 崔鳳儀四推, 181쪽.라고 한 말은 이러한 과정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변란 주도층이 민란을 통해 폭발하던 농민들의 힘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과정이자, 민란과 변란이 결합될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주목되는 대목이다. 무수히 시도되었던 변란이 실패한 근본적인 요인도 바로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데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1862년 농민항쟁을 겪으면서 변란의 주도층은 점차 농민들 속에 내재해 있는 폭발적인 힘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힘과의 결합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후로 시도된 조령작변에서도 서원철폐에 반발하는 유림들을 이용하여 변란을 기도한 데서768)≪捕盜廳謄錄≫하, 신미 8월 29일 鄭岐鉉供, 570쪽. 단적으로 보이듯이 농민들과 결합할 수 있는 의식이 구체적으로 확보되지 못하였다. 이필제의 진주거사에서 주모자인 이필제와 정만식이 나눈 다음의 대화도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 준다. “朱成七(이필제의 異名)이 ‘먼저 진주를 屠戮내려고 한다’라고 하기에 나는(정만식) ‘진주는 물산이 풍부하고 토지가 넓기 때문에 민심이 안정되어 있어서 다른 지역과는 다르므로 경솔하게 犯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농민들과 호흡을 함께하며 그들을 동원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거사를 일으키면 가담할 것으로 막연히 희망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으며, 농민들과의 조직적인 결합보다는 불만과 불평이 팽배해 있는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필제가 고종 7년(1870) 정월 진주에서 거사를 기도한 것도 정감록의 영향을 받고 지리산 일대로 피난온 사람들이나 借力挾術하는 자들의 호응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며, 영해를 세번째의 변란 모의장소로 택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769)≪慶尙監營啓錄≫고종 6년 5월 21일 鄭晩植更推, 187쪽·6월 14일 梁永烈供, 199∼200쪽. 영해는 동학의 초기 포교지역으로 많은 교도가 있었으며 이필제는 이미 존재하는 그들의 조직과 힘을 이용하여 변란을 기도한 것이다.

 변란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변란이 획득한 반외세적인 이념과 조직의 지역간 연계성을 계승하고 보전하는 동시에 농민들과 정서적 공감을 마련하고 또 그들의 현실적인 요구나 불만을 수용함으로써 농민들이 가진 힘을 전국적인 항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농민들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향촌사회 내부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향촌사회의 민중에게는 아직까지 개항 이후 제기되고 있던 반봉건·반외세의 이중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다. 1880년대 후반부터 격증한 민란은 1890년대에 들어와서는 “민란이 없는 고을이 없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지만, 아직 기본적인 형태나 내용면에서 이전 시기의 그것과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투쟁공간, 투쟁구호, 투쟁양상 등에서 여전히 개별적인 고을 단위에 매몰되어 있어서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이나 혁명을 전망하기는 어려웠다. 또 개항 이후에는 반봉건뿐만 아니라 반외세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필요가 있었지만, 민란에서는 반외세와 관련된 구호가 전혀 제기되지 못하고 있어서 이 시기 민족운동의 단초를 열어가는 데도 기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변란 역시 개항 이후에도 끊임없이 기도되었지만 이전과 마찬가지의 한계를 노정함으로써 거사에 성공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동학교세의 확장과 그것을 이용하려는 ‘저항적 지식인’의 본격적인 등장이다. 동학은 1880년대 중반 무렵부터 강원도의 산간지방을 벗어나 충청·경상·경기·전라지방 등 평야지대로 진출하면서 교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동학교세의 확장과 더불어 주목되는 사실은 동학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野心’을 펴려는 변혁지향적인 인물들과 ‘道보다는 난리’에 관심이 많았던 자들이 대거 입도한 점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곧 “야심을 품고 草莽에 숨어있던 자”들과 지배층의 수탈에 시달리며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던 민중들이 동학조직을 매개로 결합해가기 시작했음을 말한다. 민중운동은 1890년대 초반에 들어 동학을 포착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 역시 ‘無爲而化’사상에서 드러나듯 정치의식은 결여되어 있었으나, 반외세의 이념과 전국적인 조직을 마련하고 있었으며, 변란의 그것보다는 훨씬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을 이용하여 ‘야심’을 펴려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 무렵에 동학에 입도한 전봉준이었다. 전봉준이 동학에 입도한 것은 동학에서 “마음을 바로한 자의 일치”와 그를 통해 “간악한 관리를 없애고 보국안민의 업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곧 당시 급속히 확산해 가고 있던 동학은 국지성과 고립성이라는 민란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이 구상한 ‘보국안민’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저항적 지식인들은 동학을 이용해서 그들이 획득한 조직과 반외세의 이념을 보전, 강화해 나가는 한편 농민들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그들을 결집하고 동원할 수 있는 변혁논리를 모색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곧 변란단계에 비해 저항적 지식인의 의식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었으며, 그들의 변혁사상이 반봉건과 반외세의 양측면에서 보다 정제되어 가는 과정이자 농민들에게는 고을 단위로 고립되어 있던 항쟁이 전국 차원의 항쟁으로 폭발할 수 있는 조직이 마련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변란과 민란은 각기 그 한계를 일정하게 극복하며 반봉건·반외세의 농민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裵亢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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