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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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5세기 말 이른바 ‘지리상 발견’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인들의 東漸은 시작되었다. 동점의 선편은 포르투갈인들이 잡았다. 그들은 16세기 초엽에 마레이반도의 말라카(Maraca)를 점령하였고(1514), 중엽에 중국 마카오(Macao, 澳門)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1557). 포르투갈인들에 이어 16세기 후반에 스페인인, 17세기로 들어서면서 네덜란드·영국·프랑스인들이 신항로를 따라 동양으로 진출하였다.

 18세기 중엽 이후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상품시장 개척과 원료공급지 확보를 위하여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동양에 있어서 첫 무대는 인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은 이 노대국을 손아귀에 넣었고, 19세기 전반에는 그 세력을 동남아로 확장시켜 나갔다.

 영국은 다시 北上하여 중국의 문호를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아편전쟁(1840∼1842)을 일으키고 南京條約(1842)을 체결하여 홍콩(香港)을 할양받고 廣州·上海·厦門·福州·寧波를 개항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영국과 인도쟁탈 경쟁에서 패배한 이후 인도지나반도 경영에 주력해 오던 프랑스도 곧 중국과 黃埔條約(1844)을 체결하여 영국과 동등한 통상상의 권리를 획득하였다. 그 뒤 애로우(Arrow)전쟁(1856∼1860)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에 天津條約(1858)·北京條約(1860)을 강요하여 開港場을 추가하고 공사관의 北京개설과 內地布敎·通商權을 획득하였다.

 러시아인들은 16세기 중엽부터 육로를 따라 동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초까지에는 시베리아 일대를 러시아화하는데 성공하였고, 다시 19세기 중엽부터는 동부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에프(Muravyov)의 적극적인 남하정책에 힘입어 중국과 아이훈(愛琿, Aigun)條約(1858)을 체결하여 黑龍江 이북지방을, 북경조약(1860)을 체결하여서는 우수리(烏蘇里, Ussuri)江 이동을 러시아령으로 편입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항을 건설하여 극동진출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이처럼 러시아 세력이 연해주 일대로 진출한 결과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미국도 18세기 말엽부터 태평양을 횡단하여 극동으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남경조약 성립 직후에 망하조약(1844)을 체결하여 중국 진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페리(Matthew C. perry)제독을 일본에 파견, 이른바 砲艦外交를 벌여 美日條約(神奈州條約, 1854)을 체결하여 일본을 개항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애로우전쟁을 계기로 중국과 天津條約(1860)을 체결하여 영국·프랑스와 동등한 통상상의 권리를 획득하였다.

 구미 열강의 중국에서의 침략활동은 조선에 전해졌다. 주로 燕行使節(北京파견사절), 특히 매년 정기적으로 파견되는 冬至使節의 보고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사절들의 보고는 신속하지 못하였고, 그 내용도 별로 보잘 것이 없는 피상적인 것이었다. 다만 애로우전쟁 때의 청제[咸豊]의 熱河 피난과 北京 함락(1860)만은 사안의 심각성 때문인 듯, 내용은 부실했지만 비교적 신속하게 서울로 전해 졌다.

 이런 사절들의 보고를 통하여 조선측은 아편전쟁이나 애로우전쟁 뿐 아니라 그 밖의 중국에서의 洋夷의 움직임을 어설프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서양인들이 邪敎를 전파하여 인심을 陷溺시키고 있으며, 아편이 유입되어 그 해독이 클 뿐 아니라 막대한 은이 유출되고 있다던지, 러시아인들이 北京에 公館을 세웠고, 黑龍江 일대를 그들의 땅이라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조선은 연행사절들의 보고보다는 그들이 북경에서 수입하여 온≪海國圖志≫(1884)나≪瀛環志略≫과 같은 서책을 통하여 洋夷에 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아편전쟁 등을 겪으면서 서양 여러 나라의 사정을 살피고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저술한 세계인문지리서들인데, 특히≪해국도지≫에는 미국은 부강하되 영국과는 달리 공평한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고,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서양의 기술을 채용해야 한다는 것도 설명하고 있었다.

 이≪해국도지≫나≪영환지략≫은 수입되자 곧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읽혀 졌다. 그리고 이것들을 참고한 崔漢綺(1803∼1877)의≪地毬典要≫(1857)와 같은 지리서가 편찬되었고,≪해국도지≫의 경우 抄略本이 나오기까지 하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 지리서들이 수입되거나 편찬·간행된 1840∼1850년대가 되면 적어도 당시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의 경우, 서양 정세에 대하여 어느 만큼의 知見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그런 지견 속에는 미국은 부강하고 공평한 나라라든지, 외침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해국도지≫의 지적도 함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하면서 새로운 사상, 즉 조선이 장차 겪게 될 대외적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위하여는 서양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발달된 기술을 받아들여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어 갔다. 그 시기는 새로운 지리서들이 도입되고 편찬·간행되는 1840∼1850년대, 늦어도 185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며, 그 선구자는 일찍부터≪해국도지≫를 탐독한 양반 신분의 朴珪壽(1807∼1877), 이미 1850년대에 중국을 4 차례나 다녀온 역관 吳慶錫(1831∼1879), 그리고 그의 친우인 같은 중인 신분의 劉鴻基(劉大致, 1831∼ ? ) 등이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의 구체적 내용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박규수의 경우 조선이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미국과의 수교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미국은 공정하여 분쟁을 잘 조정하고 부강하여 영토의 야심이 없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조선은 그런 미국과 조약 내지 동맹관계를 맺어 고립을 면할 때 비로소 외침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대외적 위기의식과 관련하여 서울의 몇몇 선각자를 중심으로 하여 개화사상이 대두되고 있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殘班出身이 주도하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였다. 1860년 경주의 崔濟愚(1824∼1864)가 창도한 東學이 그것이다. 西學(천주교)에 대항한다는 뜻을 갖는 이 동학은 전통사회의 해체과정에 수반하는 ‘체제적 위기’의 상황들과 맞물려 가면서 급속도로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구미 열강의 극동에서의 침략활동 무대는 중국과 일본, 특히 중국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이 서양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찍이 18세기 말엽부터 계속 조선의 문호를 두드렸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조선측은 자주 구미인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조선 연해에 출현한 최초의 구미 열강의 선박은 해군 대령 뻬루주(Jean Francois Galaupedela Pérouse)가 이끄는 부솔(Boussol)호 등 2 척의 프랑스군함이 아닌가 한다. 이 군함들은 1787년에 제주·울릉도 해역을 조사·측량하였다. 그러나 본토 연안에 출현하여 조선 관원의 問情까지 받은 서양 선박은 해군 대령 쁘로우톤(William Robert Broughton)이 이끄는 영국 탐험선 프로비덴스(Providence)호였다. 이 선박은 1897년에 동해안을 탐사하였었다.

 프로비던스호 이후에도 서양 선박의 조선 연해 출몰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수는 중국이 문호를 개방한 뒤부터 더욱 불어났다. 그 대부분은 영국이나 프랑스 선박들이었다. 그런데 1850년대로 들어서면서 러시아와 미국 선박도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1850년대 초부터 대대적으로 조선 동해안조사사업을 벌였고, 미국은 1850년대에 北海道 근해에서 捕鯨業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 서양 선박들은 조선의 선박과 완연하게 구별되었다. 船體는 마치 태산과 같았고 帆竹은 하늘 높히 치솟아 있었다. 또 빠르기가 나는 새와 같아 조선 선박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이 서양 선박들을 ‘異樣船’, 즉 ‘이상한 모습을 한 배’라고 불렀다.

 이 이양선을 타고 온 “사람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古忄在(옛스럽고 괴상함)하였다.” 붉거나 노란 머리칼, 푸르거나 노란 눈, 칼등과 같은 높은 코, ‘魍魎(도깨비)’와 같은 걸음거리, 몸에 보이는 문신 등이 그런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측에서는 이 ‘古忄在’한 사람들을 ‘外夷’·‘洋賊’·‘匪類’·‘洋魁者’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 外夷에 대한 조선측의 태도는 관대하였다. 우선 관원을 보내어 문정한 뒤 식량을 넉넉하게 지급하였다. 漂到人의 경우, 그 원하는 바에 따라 護送官을 붙여 육로로 義州를 거쳐 北京으로 송환하기도 하였고, 선박을 제공하여 해로로 귀환하게 하기도 하였다. 모두 遠地에서 온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는 방침, 즉 ‘柔遠之義(意)’에서 나온 조처였다.

 조선측과는 달리, 외이들의 태도는 관대하지만은 않았다. 난포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것이다. 해로 탐험, 연안 측량 등의 목적을 띠고 온 외이들이 그러하였다.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호 승무원들은 濟州에서 가축을 약탈하였고(1845), 함경도 연안을 조사하던 러시아인들은 永興府에서 총을 쏘아 주민을 살해하였다(1854). 濟州牧 古代島 앞 바다에 내도한 프랑스 군함 승무원 수백 명은 부근 여러 섬에 상륙하여 가축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려 하였다.

 외이들은 이처럼 난폭한 행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공공연히 통상을 요청하여 조선측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조선측은,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로오드 앰허스트(Lord Amhest)호의 통상요청(1832)에 대한 회답에서 보듯,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내세운 이유는 물산이 영성하다던지, 藩邦으로서는 사사로이 교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국이 외이와 접촉하면서 자주 시달림을 받고 있는 사실을 어느 만큼 알고 있는 조선측으로서는 “그 의도하는 바를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측의 앙베르(Laurent M.T. Imbert) 등 3 선교사 처형(己亥邪獄, 1939)에 대한 항의(1846)도 일축하였다. 그들은 밀입국, 선교활동 등 불법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표도인의 경우와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항의는 결국 국내의 내응세력과의 긴밀한 연락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양선의 현지 주민과의 접촉을 금하고 내응세력인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감행하곤 하였다.

 고종의 즉위(1864)와 함께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興宣大院君 李昰應(1820∼1898)은 통치의 지표를 전제왕권의 확립에 두고 있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선 내정에 있어 安東金氏 세력의 축출과 노·소·남·북 4색의 인재 등용, 景福宮의 재건과 서원 철폐, 재정·군사제도의 개편 등 일련의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양이에 대한 정책도 이제까지의 그것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여 갔다. 그가 천주교에 대한 일대 박해를 단행한 것도(丙寅邪獄, 1866) ‘招冠’을 일삼는 천주교 세력의 더 이상의 만연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는 천주교도들을 일찌감치 懲治하지 않으면 조선은 마침내 중국과 같은 곤경에 빠지고야 말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대 탄압의 결과 조선은 프랑스 함대의 보복적인 침략을 받게 되었다(丙寅洋擾, 1866). 그 의도하는 바는 조선의 주권을 탈취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양이와의 강화(조약체결, 통상)는 매국이요 망국이라는 확고한 결의 밑에 국론을 통일해 가면서 프랑스 함대와의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국론을 통일함에 있어서는 유학자들의 斥邪(和)論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양선의 침략과 관련된 유학자들의 척사론은 프랑스 군함 그로와르호(La Gloire)가 내항하였을 때의 成近黙의 상소(1847)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병인양요 때 奇正鎭(1797∼1876)과 李恒老(1792∼1868)의 상소, 특히 이항로의 상소에서 구체화되고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핵심은 華夷觀에 입각하여 외이와의 조약체결, 통상에 반대하고 침입한 적은 실력으로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선인들의 배외사상(감정)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Opert) 등의 南延君墓所盜掘事件(1868)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병인사옥 때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Stanisas Féron), 상해 미국 영사관 통역을 역임한 미국인 젠킨스(F.B. Jenkins) 등이 참여한 이 사건은 미수로 끝났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 함대에게 각종의 무기, 많은 전적과 은괴 등을 약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조선측으로서는 이제 양인은 모두 야만족이며 그들의 대부분은 강도나 절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배외감정이 격화된 가운데 조선은 다시 미국함대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辛未洋擾, 1871). 그 발단이 된 것은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1866)이었다. 미국측은 셔먼호 승무원들이 모두 살해된 것은 그들이 성급하고 난포하게 행동한 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함에도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遭難船員救助協定 혹은 통상조약까지도 체결하고자 하여 이른바 포함외교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전세는 廣城堡가 함락되고 중군이 전사하는 등 조선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런 중에도 대원군은 서울(鐘路) 등지에 斥和碑를 세워 이 양이와의 전쟁을 강조하였다. 청년기에 들어선 국왕 고종도 강화를 주장하는 자는 ‘賣國之律’로 다스릴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면서 지구전으로 대응하여 마침내 미국 함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미국 함대의 침입에 즈음하여, 자연 국왕과 대신들은 經筵에서 미국에 대하여 논의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미국의 건국의 역사는 짧고 문화는 아직 미개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미국인들은 ‘犬羊’ 즉 禽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미국이나 미국인들과 강화하게 되면 邪學이 치성하여 ‘夫子之道’, 즉 正學은 장차 침몰할 것이며, 마침내 조선과 조선인은 멸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므로 미국과의 강화는 용납될 수 없으며, 설사 중국이 그것을 종용하여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의 척사, 혹은 쇄국정책은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강화론자나 개국론자도 없지 않았다. 프랑스 함대가 침입하였을 때, 이항로의 상소에 의하면, 主和論이 대두하고 있었다. 이미 1850년 후반 이전부터 미국과의 수교를 구상하고 있던 박규수도 프랑스 함대의 침입 때 개국론을 구체화시켰고 미국 함대의 침입 때 그것을 문인 金允植(1835∼1922)에게 피력하였다. 그리고 오경석도 이때 대원군에게 미국과의 수교를 권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미개국론은 척사론이나 주전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공론화 될 수가 없었다.

 대원군이 정치의 실권을 잡고 있는 동안 조선의 대일정책은 對洋夷政策 못지 않게 강경하였다. 조선은 明治政府의 수립을 알리는 일본측 書契의 수리를 거절하였다(1868). 이어 對馬島主가 담당하여 왔던 交隣업무의 접수를 알리는 일본 외무성 서계의 수리도 거절하였다(1872). 이에 따라 1870년대 초(1872) 이후 양국간의 국교가 중단되는 사태를 빚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여 洋夷化를 서두르고 있는 일본을 경계하고 거부하려는 대원군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국왕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1873) 이러한 대일정책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국왕이나 국왕의 친정에 협력하고 있는 戚族세력은 양국간의 국교중단사태를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본과 서계 수리 문제를 타협함으로써 전통적 교린관계를 회복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는 달리 일본측은 정권교체에 따른 조선의 정치적 불안정을 틈타 외교적 교섭보다는 군사력, 즉 포함을 이용하여 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雲揚號事件을 일으켰으며(1875), 이를 구실로 사절을 江華島로 파견하여 협상을 강요하였다. 그 의도하는 바는 교린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통상조약의 체결에 있었다.

 이 日本측 요구에 대한 조야의 반대는 거세었다. 특히 대원군이 그러하였다. 그는 강화도에 가 있는 接見大官(申櫶, 1810∼1888)이나 의정부 관원들에게 서함을 보내어 강화에 반대할 것을 종용하는 한편 정부의 연약한 외교를 통박하였다. 儒林에서도 척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 대표적 인물이 李恒老의 문인 崔益鉉(1833∼1906)이었다. 그는 강화에 반대하는 疏章을 올려 “倭와 洋은 一體”임을 주장하고 그러한 일본과 강화하게 되면 국가는 멸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국왕이나 척족세력도 교린관계의 회복을 희망하였을 뿐 조약체결까지 고려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의 현실적인 군사적 위협하에서 그 요구하는 바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과의 강화(수교)는 ‘舊好의 回復’이며, ‘制倭’와 ‘斥洋’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척화론에 대처하면서 1876년 초에 부산 등 3개의 항구를 일본에 개방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朝日修好條規, 즉 江華島條約을 성립시켰다. 그 이면에는 개국 통상에 관심을 가져온 박규수의 건의와 함께 중국의 권유도 작용하고 있었다.

 중국의 일본과의 수교 권유는 스스로가 서양 열강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더 이상 조일 양국간의 분규가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일본의 조선 진출을 환영해서였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은 일본의 조선 진출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중국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는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중국의 이러한 우려는 일본이 琉球를 병합함으로써(1879)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하였고, 이에 따른 시급한 대책이 요청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北洋大臣 李鴻章(1823∼1901)이 조선 원로대신 李裕元(1814∼1888)에게 이른바 ‘密函’을 보내어 서양 여러 나라와의 수교를 권고하게 되었던 것이다(1879). 한반도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이룩하여 일본이나 러시아의 침략까지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은 이 중국의 수교 권고를 일단 거부하였지만 그 침략 여부를 살피기 위하여 1880년 여름에 제2차 修信使 金弘集(1842∼1896)을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김홍집의 일본 도착을 기다려왔던 주일청국공사 何如璋(1838∼1891), 參贊官 黃遵憲(1848∼1905) 등은 그에게 조선은 미국과 수교하여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을 이룩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 혹은 침략을 견제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聯美論을 권고하였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한<朝鮮策略>을 작성하여 수교하였다.

 김홍집의 복명(8월)과 그가 가지고온<조선책략>등은 국왕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수교가 부득이 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하여장에게 미국과 수교할 뜻을 밝히기 위하여 밀사 李東仁(1849?∼1881?) 등을 일본으로 파견하였다(9월). 이런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는 개화파의 지도자 劉鴻基 등과도 협의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남하, 혹은 침략이라고 하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국왕은 이제까지 굳게 지켜오던 척사 내지 쇄국정책을 수정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척사-쇄국정책의 수정을 위해서는 정부내의 공론 조정도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이동인 등이 서울을 떠난 직후 묘당에 명하여<조선책략>에 대하여 검토하게 하는 한편, 영의정과 정부 당상들을 인견하고 러시아의 남하에 따른 대책을<책략>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의정부(영의정)로부터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묘당의 지지는 석연치가 않았다. 하지만 시·원임대신들이 양이와의 강화는 매국이요, 망국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다시 들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묘당에서도 대미수교를 양해하였던 것이다.

 한편, 국왕은 북양대신 이홍장으로부터도 미국 등 서양 여러 나라와의 수교를 권고 받았다(10월). 이는 국왕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국왕은 밀사 李容肅(1818∼ ? )을 이홍장에게 보내어 미국은 물론 서양 여러 나라와도 수교할 뜻이 있음을 통고하였다(1881. 1).

 이용숙을 중국에 파견(1880. 11)한 직후부터 조선은 統理機務衙門을 설치(12월)하는 등 일련의 개화정책, 이른바 ‘초기의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연미’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연미에 대한 朝臣들의 지지도 시일이 지날수록 불어 나갔다. 그러나 여론은<조선책략>이나 연미론은 물론 개화정책에 반대하였다. 특히 각도 유생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辛巳斥邪運動, 1881), 그것은 다시 대원군 계열의 쿠데타모의(安驥泳事件, 1881. 8)로 이어져 나갔다.

 북양대신 李鴻章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대미수교방침을 통고받기 직전, 아마도 1881년 1월 초순에 막료를 시켜 조선측에 밀함을 보내어 유학생 인솔을 빙자한 隊員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약 체결에 관하여 협의하자는 것이었다. 밀함에 접한 조선측에서는 領選使의 파견을 결정하고(2월 말), 이 사실을 통보하기 위하여 역관 李應浚을 天津으로 파견하였다.

 한편 李容肅으로부터 대미수교방침을 통고받게 되자(1월 하순) 李鴻章은 곧(2월 초) 주天津미국부영사를 통하여, 이미 1880년 초에 조선측에 두 차례나 수교를 제의하고, 이를 위하여 북양아문을 방문한 바 있는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2∼1896)를 초청하였다. 슈펠트가 天津에 도착한 것은 5월 말, 그는 이홍장과 회담을 갖고 미국의 조약체결 의사를 조선측에 전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응준도 6월 말 天津에 도착, 이홍장에게 영선사의 파견을 알렸다.

 이처럼 조미조약 체결 기운이 성숙되어 가자 이홍장은 주일공사 何如璋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 자신이 직접 天津에서 미국전권과 협상하고 나아가 조약문상에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명문화하고자 하였다. 하여장은 조선의 밀사 이동인 등과 접촉(1880. 10)한 이후 자주 총리아문과 이홍장에게 서함을 보내어 그러한 건의를 해 왔었다.

 그리하여 이홍장은 막료를 시켜 다시 밀함을 작성하여 이응준 편에 조선으로 보내었다. 그 요지는 대원을 천진으로 파견하여 美使와 조약체결에 관하여 협상하되 그 결과를 기다려 중국이 파견하는 대원과 함께 조선으로 가서 조인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측에 영선사의 파견을 촉구하는 한편, 천진에서, 그러니까 이홍장의 중재하에 협상할 것을 종용한 것이었다.

 척사운동으로 영선사의 파견이 지연되는 가운데 이런 밀함에 접한 국왕은 일본 체류 중인 朝士視察團員 魚允中(1848∼1896)을 급히 天津으로 파견하였다. 이홍장은 어윤중과 회담을 갖고(1881. 10) 조약문상에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명시한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그리고 뒤이어 保定府를 방문한 영선사 金允植(1835∼1922)과 회담을 갖고(11월말∼12월말) 조약상에 ‘속국’임을 명문화 하며, 조약체결 협상을 天津에서 하되 이홍장이 직접 나선다는데, 즉 협상을 이홍장에게 위임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조선측이 협상을 이홍장에게 위임한 것은 그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을 뿐 아니라 국내의 첫사 운동이나 분위기가 고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측으로부터 조약 체결 협상을 위임받은 이홍장은 천진에서 가진 슈펠트와의 협상(1882년 2월초∼3월초)에서 屬邦條款의 삽입을 강력히 희망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슈펠트에 의하여 거부되자 조선국왕의 “조선은 중국의 속국…”의 屬邦照會로 대체한다는 양해하에 가조약을 성립시켰다. 물론 불평등조약이었지만, 치외법권의 잠정적 인정, 관세자주권과 고율의 관세, 거류지의 조선 영토 인정 등 강화도조약과 비교한다면 되도록 불평등성을 배제하고, 또 장차 배제할 여지를 남겨둔 내용이었다. 또 조선에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미국이 원조하고 중재한다는 ‘援護仲裁’條款도 이 조약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슈펠트의 조선행에는 이홍장의 막료 馬建忠(1845∼1899)이 동행하였다. 그는 조약 체결을 주관하여 1882년 4월 가조약본대로 조약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속방조회도 관철시켰다. 조선 전권 申櫶과 김홍집은 조인하는 날 마건충이 초해준 대로의 속방조회문을 슈펠트에게 수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국왕은 이홍장이나 마건충의 요청에 따라 속방조회문을 조약문과 함께 청국 禮部와 북양아문으로 보내었다. 중국은 조선의 내정에 간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조선측에서 조미조약 체결을 주도한 것은 국왕 고종과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 일부 소장 관원들이었다. 그들은, 이홍장과 하여장의 권고를 받아 들여, 일본이나 러시아, 특히 러시아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하여는 전통적인 조청관계, 즉 조공체제하에서 청국의 비호를 받는 가운데 미국 등 우호적 국가를 선택 수교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인 이 조공체제가 구미세력의 침략을 받아 동요 붕괴되어 가고 있는 사실에 미처 충분히 주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조미조약상의 속방조관 삽입은 슈펠트의 거부로 좌절되었지만, 李鴻章은 곧 이어 조선과 체결한 朝鮮中國商民水陸貿易章程(1882. 8) 전문에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반영시켰다. 그리하여 壬午軍亂(6월)을 계기로 淸軍이 진주하고(7월), 이어 수륙무역장정이 성립되면서 중국의 조선 내정간섭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일이 지날수록 강화되어만 갔다. 그러나 이 예상 밖의 사태 진전에 직면하여, 실력으로 대항할 수 없었던 조선은 외세를 이용하여 이를 극복해 나가는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報聘使의 미국 파견(1883)도 명망있는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중국의 위압에 맞서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와의 수교도 오히려 이런 맥락과 관련지어 보아야 할 것이다.

 조영조약(Willes조약, 1882. 4)과 朝獨조약(Brandt조약, 5월)이 체결된 것은 조미조약이 체결된 직후였다. 그러나 조미조약 내용을 본딴 고율의 관세와 애매한 치외법권 규정 등에 불만을 갖은 영국과 독일이 비준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두 조약은 실효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국왕은 개화파 인사들의 견해를 받아 들여 중국을 배제한 가운데 영국측과 직접 협상하고, 영국을 끌어들여 중국의 횡포를 막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883년 10월에 치외법권 규정의 삭제와 관세의 인하 등 영국측 주장을 크게 반영한 조영조약(Parkes조약)과 조독조약(Zappe조약)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영국측은 주청공사로 하여금 주조선공사를 겸임시키고, 서울에는 대리총영사를 두어 北京에 예속시킴으로써, 중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행사를 외교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국왕은 개화당 인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이 그토록 위험한 존재로 강조하여 온 러시아, 그리고 安南문제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프랑스와의 수교도 추진하였다. 이 두 세력을 끌어들여 중국의 내정간섭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朝伊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884년 윤5월에 朝露조약을 체결하였고, 중국이 淸佛전쟁(1884∼1885)에 패배한 뒤인 1886년에 朝佛조약(5월)도 체결하였다. 특히 조러조약의 성립은 조선이 이제까지 추구하여 온<조선책략>적 외교의 종언을 알리는 것으로 이후 조선은 급속히 러시아에 접근하여 갔다.

 그러나 유럽 여러 나라와의 조약 체결로 국왕이나 개화파나 개화당 인사들이 기대한대로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영국의 예에서 보듯 체약국들은 중국의 내정간섭을 배제하려는 조선측 노력에 협력해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은 조약을 체결할 때마다 중국의 간섭을 받아 체약국에 예의 속방조회를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1890년대로 들어서 朝墺조약(1892)이 체결될 때도 그러하였다. 그것이 없어진 것은 朝白·朝丁조약(1902)체결 당시부터였다. 그것은 물론 중국 세력이 한반도에서 철수(1895)한 결과였다.

<宋炳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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