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1) 한·중·일의 정세
  • (3) 조선왕조와 일본:‘교린’관계

(3) 조선왕조와 일본:‘교린’관계

 한일관계도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으나, 이 역시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15세기 초였다. 14세기 후반에 明朝가 등장하였을 때 일본에서는 무로마치(室町)幕府의 지위와 권위가 점차 안정되고 있었다. 조선의 太宗 李芳遠이 명조로부터 조선국왕에 책봉된 다음 무로마찌막부의 제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도 명조에 入貢하여 1403년에 중일관계 역사상 처음으로 ‘日本國王’에 책봉되었다. 조선과 일본이 동시에 明의 조공제도에 편입되어 명의 조공제도가 제도적으로 정비됨에 따라 1404년에는 조선과 일본은 기존관계를 정리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이때 형성된 한일관계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 하나는 양국의 통치자, 즉 조선 국왕과 일본의 장군이 다 같이 명조의 책봉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그 지위가 서로 동등하다는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또 하나는 중앙집권국가 조선은 국왕이 유일한 통치권자로 일원적으로 외교권을 행사하는 반면, 봉건체제하의 일본에서는 중앙정권의 장군 이외에 세습 領主들이 각각 지방분권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여 조선과 독자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즉 조선의 대일관계는 일원적으로 관리되었으나 일본의 對 조선관계는 다원적으로 운영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선왕조와 교토(京都)에 있었던 일본 왕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天皇은 통치권이 없는 단순한 명목상의 국가원수였으며 토속신앙인 신또(神道)의 敎祖的인 존재에 불과하였다는 것과, 중앙정권인 幕府의 힘과 권위가 약하여 일원적인 외교권을 행사하지 못했음을 말하여주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이와 같이 일본과 다원적인 관계를 가졌던 것은 일본 서남지방의 영주나 호족들에 명목상의 官職 또는 印綬를 수여하여 이들에 외교와 무역상 일정한 특권을 주고 그 대가로 한반도 해역에서 그들의 침범과 약탈을 억제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受職倭 또는 受圖書倭라고 불린 이들은 조선국왕에 대하여 단순한 陪臣이 아니라 ‘準 臣下’였다.004)아시카가시대의 한일관계에 관하여는 田中健夫,≪中世對外關係史≫(東京:東京大學 出版會, 1975), 95∼152쪽과 中村榮孝,≪日鮮關係史の硏究≫上(東京:吉川弘文館, 1970), 141∼221쪽, 受職倭와 受圖書倭에 관하여는 같은 책, 517∼626쪽 참조.

 조선 초기 형성된 이와 같은 한일관계는 그 후 한반도 해역에서 倭寇활동이 꾸준히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변화없이 계속되다가 16세기 末에 일어난 壬辰倭亂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다. 그러나 전란이 종식된 직후 일본에서 토쿠가와(德川)幕府가 등장한 후 1609년에 이른바 己酉約條가 체결되어 양국간의 정식 국교가 재개되었다. 기유약조는 1876년에 江華島條約이 체결될 때까지 약 260년 동안 한일관계의 기본적인 틀로 남아 있었다. 이 약조에 의하여 조선은 일본과 두 가지 차원의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하나는 막부와의 관계였고 또 하나는 위에서 말한 수직왜와 수도서왜와의 관계였다.

 막부와의 관계는 조선측에서 막부에 사절을 파견하여 書契와 예물을 교환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사절을 通信使라 하였는데 통신사는 장군이 사망하고 새 장군이 承襲할 때 조의와 축하의 뜻을 전하는 국왕의 서한과 예물을 전달하기 위하여 막부의 소재지인 에도(江戶)에 파견되었다. 토쿠가와 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통신사는 1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19세기초에 재정난으로 어렵게 된 막부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에도가 아닌 타처에서 통신사를 영접하자는 이른바 易地行聘을 제의했으나 조선측이 이를 거절한 결과 통신사 파견은 폐지되었다.005)通信使 易地行聘에 관하여는 田保橋 潔,≪近代日鮮關係≫下卷(朝鮮總督府 中樞院, 1940), 639∼894쪽 참조.

 토쿠가와막부도 조선에 사절을 파견코자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극도로 증폭된 對日 불신감으로 조선 조정이 이를 거절하였다. 따라서 막부의 조선조정과의 연락은 對馬島 영주가 이를 대행하였다. 그 결과 토쿠가와시대에 일본인은 공적이나 사적을 막론하고 한 사람도 서울을 방문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조선조정과 막부간의 관계는 의례외교에 불과하였으며 통신사는 청조에 파견된 조공사와는 달리 의무적이나 정기적인 것은 아니고 막부의 요청에 따라 수시로 파견되었을 뿐이었다.

 한편 대마도와의 관계는 조선측에서는 필요에 따라 부정기로 譯官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渡海역관 또는 問慰역관이라 했다. 이들의 사명은 새 영주의 승습을 축하하거나 島內 사정을 조사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단기간 체재하였으며 주어진 임무 이외의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반면 대마도는 매년 年例使라고 불린 정기사절과 別差倭라고 불린 임시사절을 보냈다. 연례사는 島主가 장군을 대행하여 보내는 大差使와 그 자신이 영주자격으로 보내는 差使, 그리고 수직왜 및 수도서왜가 보내는 사신이 있었다. 별차왜는 양국간에 단순한 연락사항이 있을 때 파견되었다. 이들은 조선 禮曹參判과 東萊府使 또는 그들의 屬僚들에 보내는 書契와 조선조정에 헌상하는 명목적인 예물을 전달하고 이에 대한 후한 回賜品을 하사받았다. 모든 서계에는 조선의 종주국인 中國의 皇帝 年號와 조선왕국으로부터 하사된 官印(圖書)을 사용해야 했다. 대마도에서 도래하는 일본인들은 부산 草梁에 있었던 倭館에서 정해진 범위 내에서 물물교환 형식의 교역에 종사였다. 그러나 館外出入이나 여행은 일절 금지되어 있었다. 왜관은 조선정부가 설치한 것이었으나 그 관리는 대마도 영주가 임명하는 館守에 맡겼다. 왜관에 와서 체류하는 일본인은 매년 1,000명이 넘었으며 조선정부는 이들을 위하여 매년 쌀 3,000石을 제공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마도는 경제적으로는 일본 본토보다 조선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토쿠가와 초기에는 조선조정과 이같은 관계를 맺고 있는 영주들이 일본 서남지방에 여럿이 있었으나 도쿠가와 중기에 들어선 후 17세기 말까지 이들이 모두 그 관계를 청산하게 되어 이 때부터 대마도는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006)토쿠가와시대 한일관계에 관한 연구로는 孫承喆,≪近世韓日關係史≫(강원대학교 출판부, 1987);George M. McCune, "The Exchange of Envoys between Korea and Japan during the Tokugawa Period." The Far Eastern Quarterly, 5.3(May 1946), pp.308∼3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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