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1) 한·중·일의 정세
  • (4) 화이질서하의 한국과 일본

(4) 화이질서하의 한국과 일본

 동아시아 천지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처음으로 형성된 것은 7세기초 唐왕조(608∼917) 초기였다. 이때 중국대륙에서 後漢이 멸망한 후 400여 년 가까이 계속된 분열과 혼란이 끝나고 다시 통일왕조인 隋와 唐이 차례로 흥기하자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둘러 그들과 封冊관계를 맺었다. 이때 일본도 이들에 사절을 파견하여 入貢했으나 정식으로 책봉관계는 맺지 아니했다. 한반도 삼국과 일본간의 중국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차이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각자가 차지하고 있었던 지리적·전략적 입지의 차이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즉 중국대륙에서 강대한 세력이 흥기하여 외교적·군사적으로 직접 그 영향과 압력을 받게 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재빨리 이와 외교적 관계를 확립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거리가 먼 도서국가 일본은 외교상·전략상 훨씬 더 큰 선택의 폭과 자유를 갖고 있었다. 일본은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동을 자국에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하여 새 대륙세력과 외교관계는 맺었으나 구속적이며 의무적인 책봉관계까지 맺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후 唐이 직접 한반도에 개입하여 신라에 의한 삼국의 통일을 지원한 다음 이를 자기 판도에 편입하려 했으나 통일신라의 완강한 항거에 봉착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적대관계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양국간에는 곧 종속관계가 회복되었다. 그 후 신라는 계속 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 선진문화를 도입하여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게 하였다. 반면 일본은 한반도가 통일되자 그의 반도 진출 기도가 좌절되고 한 가닥의 희망을 걸었던 羅唐戰爭까지 끝나고 나당간에 우호관계가 회복되자 자신의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중국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급격히 냉각되었다. 당왕조 300년간을 통하여 신라는 나당전쟁 때의 수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사절을 보냈다. 이에 비하여 일본은 같은 기간에 전후 15차례의 사절을 파견하는데 그쳤다. 이 중 초기의 6회는 630년부터 약 40년간에 집중되었는데 이 때는 바로 삼국 통일전쟁이 일어나고 당이 이에 개입한 시기였다. 나머지 9회는 그 후 약 170년 동안 20년만에 한번 꼴이었으며 그 마저 838년을 끝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일본이 당에 입공했던 것은 대륙의 선진문화를 도입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는 것이 일본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사실은 그 목적이 주로 전략적인 것이었으며 문화도입은 2차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007)西嶋定生,≪日本歷史と國際環境≫(東京:東京大學 出版會, 1895), 81∼180쪽 참조. 이와 같이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의 일원이면서도 항상 중국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는데 이와 같은 일본의 태도는 그 후 더욱 분명해진다. 당이 멸망한 후 중국에서는 宋王朝(960∼1279)가 이를 이었다. 군사적으로 약했던 송은 북방민족의 국가인 遼와 金의 압력 하에 동아시아 세계의 종주국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中原에서 남쪽으로 밀려나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화이질서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통일신라를 계승한 고려는 송과 꾸준히 종속관계를 유지하며 그 문화를 도입하는데 힘썼다. 특히 유학발달에서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여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程朱學을 도입하여 훗날 한국유학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한편 일본은 9세기 중엽 이후 계속 중국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고 민간 차원의 문화적 교류는 어느 정도 유지했다.

 13세기 중엽에 全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사상 未曾有의 대변동이 일어났으니 바로 蒙古에 의한 元제국의 창건이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30년간에 걸친 치열한 항쟁 끝에 결국 몽고에 굴복하고 직접 그 지배를 받게 되었다. 뒤이어 일본도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았다. 그러나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麗蒙 연합군의 일본 침공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몽고에 의한 중국정복과 통치는 漢민족의 화이사상과 덕치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무너뜨렸다. 한편 몽고의 일본 침공은 일본인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고 단결을 강화시켰으며 이에 대한 일본의 ‘승리’는 일본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북돋아 주었다.

 15세기초에 일본의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明朝로부터 책봉을 받았던 목적은 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중국무역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중국 문물의 도입에는 그다지 관심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로 말미암아 국내 王廷귀족들과 神道 神官들의 비난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의 아시카가 장군들은 명조와의 종속관계를 단속적으로 유지하였는데 16세기 중엽에 가서 그들의 정권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明과의 종속관계도 자연 소멸했다. 그러나 토쿠가와 정권은 조선과 琉球 왕국을 통하여 비공식으로 중국과 관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본도 분명히 동아시아 세계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008)일본역사와 문화의 독립적 발전에 관한 대표적인 견해로는 토인비(Arnold J. Toynbee)와 케네디(Paul Kennedy)가 있다. Paul Kennedy,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Economic Change and Milltary Conflict from 1500 to 2000(New York, N.Y.:Random House, 1987), pp.14∼16 참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은 고대 동아시아 세계질서가 형성된 후 언제나 그 테두리 안에서 중국과 불가분의 유대를 유지하였다. 특히 중국과 동질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小中華’라고 자타가 인정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언제나 의연한 태도로 완전히 자주를 고수하고 중국의 간섭을 거절하였다. 중국도 元(몽고)왕조를 제외하고는 한국을 통치하거나 그 내외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도 중국문화를 도입하여 자체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으나 항상 중국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공식적인 국교를 유지하려고 힘쓰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일 양국은 각각 상대방에 대한 고정된 견해 또는 편견이 굳어지게 되었다. 즉 중국과의 문화적 일체감을 갖고 대륙문화를 일본에 전도한 한국인은 일본에 대하여 문화적으로 선진국이라는 자부심과 우월감을 갖게 되었다. 한편 예로부터 단속적으로 일본인의 일방적인 침범과 약탈을 받아온 한국인은 일본인을 도덕적으로 야만으로 보게 되고 그에 대한 불신감이 굳어졌다. 특히 임진왜란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불신감을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한편 일본인은 중국에 대해서는 그의 문화적 선진성과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중국과 동등한 지위를 주장하고 한국에 대하여는 우위를 주장하였다. 일본 고유의 신화와 일본왕실의 존재가 일본인의 이와 같은 견해와 태도를 지탱케 하였으며 일본의 島嶼國家로서의 지리적·전략적 위치가 이를 가능케 하였다.

 예로부터 중국의 통치자는 이른바 ‘天命’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고 인류에 군림하는 ‘天子’라 하여 ‘皇帝’라고 불렀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제외한 어느 국가나 민족의 君主나 首長도 이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독 일본만이 자국의 왕을 ‘天皇’이라고 불러왔다. 물론 타국은 이를 인정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이같은 慣用은 일본인의 대외관계에 대한 사고를 형성하는데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 고대 史書인≪日本書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왕이 일본의 야마도(大和)조정에 입공 하였다는 날조된 기사가 실려 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후세 일본인은 한반도가 고대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일본에서 武家통치가 끝나고 이른바 ‘天皇의 親政’이 ‘회복’되었을 때 바로 이 때문에 한일 양국간에서 각자의 君主가 호칭을 둘러싸고 외교상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009)Kim, The East Asian World Order, pp.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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