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2) 서세 동점과 동아시아 제국
  • (2)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동방진출

(2)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동방진출

 이 동방진출에서 선두에 나선 것이 이베리아반도 국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1493년 12월 敎皇 알렉산더 6세가 새로 발견될 모든 지역을 유럽대륙 서쪽 대서양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子午線을 경계로 하여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영유케 한다는 敎書를 발표하였다. 양국은 이 교서의 내용을 다음 해인 1494년에 조인한 톨더실래스(Tordesillas) 조약으로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포트투갈은 아프리카대륙 서해안을 남하하여 希望峰을 동으로 돌아 印度洋에 진출, 다시 북상하여 아랍해를 거쳐 인도 서해안에 도달하였다. 1510년에는 인도의 고아(Goa)를 점령하여 이곳에 동남아의 香辛料무역 기지를 건설하였다. 다시 南支那海를 북상하여 중국 남부해안 항구들을 占取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축출당했다. 그러다가 1557년에 중국 해역에서 해적 소탕에 공을 세워 明朝로부터 마카오(Macao)에 무역기지 건설허가를 취득하였다.011)포르투갈의 동방진출에 대하여는 生田 滋,<大航海時代の東アジア>(위의 책), 19∼144쪽 참조.

 한편 스페인은 대서양을 건너 신세계에 진출하여 1519∼1520년에 멕시코(Mexico)를 점령하고 이를 본거지로 삼아 중남미대륙 정복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남미대륙 북부의 파나마 地峽을 횡단, 서해안으로 진출하여 1530년대 초에는 페루(Peru)를, 1540년대에는 칠레(Chili)를 정복하였다. 그후 1세기 동안 이 지역은 세계최대의 銀 산지가 되어 스페인의 번영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앞서 1519∼1521년 마젤란(Magellan)이 남미대륙 남단에서 태평양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比律賓을 발견하였는데 스페인은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무역의 기지로 하였다. 이와 같이 16세기 중엽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 진출하여 17세기 초까지 이 지역 전 해역에서 制海權을 장악하고 해상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012)스페인의 해외진출을 다룬 것으로는 J. H. Parry, The Spanish Seaborne Empire(Berekely, Los Angeles, and Oxford: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6). 이와 같이 양국이 동아시아에서 쉽사리 해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한국·일본 등 이 지역 국가들이 이른바 ‘海禁’ 정책 하에서 ‘閉關自守’하고 해외교류와 내왕을 금하거나 극도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 초에 중국의 明朝는 宦官 鄭和가 이끄는 대 함대를 전후 7차에 걸쳐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해안 지역에 파견하여 이를 중국 조공체제에 편입시켰다. 1405년의 제1회 원정은 60여 척의 함정과 28,000명의 병사가 동원된 世界史上 미증유의 규모였다. 만일 명조가 해상활동을 계속하였더라면 당시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은 그 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1433년을 마지막으로 명조는 해외 대원정을 갑자기 중단하고 그 후에는 해안해역에 출몰하는 왜적소탕을 위한 해군력만을 유지하였다.013)明朝초기의 大遠征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Jung-pang Lo, "The Emergence of China as a Seapower During the Late Sung and Early Ming Periods," Far Eastern Quarterly, 11:2(February, 1952) 참조.

 원래 대륙국가인 중국은 수만 리의 해안선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 해상으로부터 군사적 협위를 받은 적이 없었다. 역사상 중국에 대한 군사적 압력이나 무력 침입은 항상 북방초원이나 서북사막 지대에서 왔다. 또 중국은 예로부터 탁월한 문화와 광대한 국토와 풍부한 자원, 그리고 다양한 물산을 자랑하는 자급자족의 농경사회였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국방을 위한 해군력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타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며 경제적 부를 획득하기 위한 해외무역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못했다. 명조가 해외 대 원정을 갑자기 그만두고 해군력을 축소한 배후에는 이와 같은 중국인의 전통적인 국방전략과 문화적 中華思想이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명조의 결정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용이하게 동아시아해역에 진출하는 기회를 주게 된 것이다.

 근세 초기 유럽국가의 동방진출의 또 하나의 동기는 천주교의 포교였다. 이를 위하여 유럽을 떠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무장船團에는 온 세계를 기독교왕국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정열에 불타는 선교사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포르투갈·스페인 또는 프랑스 왕실의 재정적 지원으로 조직된 교단에 소속하고 있었는데, 그 중 동아시아 지역에서 선도적 활동을 전개한 것이 耶蘇會(the Society of Jesus)였다. 야소회는 통칭 ‘제수위트’(the Jesuits)라고 불린 교단으로 포르투갈 왕실의 지원으로 유럽 각국의 귀족과 명문출신의 일류 학자와 지식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저명한 사람이 聖프랜시스 사비엘 신부와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신부였다. 사비엘은 이태리 귀족 출신으로 1549년에 일본 땅을 밟았다. 그는 3년간 그곳에 머물면서 쿠슈(九州), 야마구치(山口), 교토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벌여 큰 성과를 거두고 그후 반세기 동안에 수십만 명의 일본인이 천주교로 개종하게 되는 터전을 마련했다. 릿치 신부 역시 이태리의 명문 출신으로 1582년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중국의 언어, 풍속, 역사를 공부한 다음 廣州·南京 등지를 거쳐 1598년에 北京에 들어갔다. 1610년 그곳서 사망할 때까지 헌신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천주교 포교뿐만 아니라 동서문화 교류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이와 같이 천주교는 주로 야소회 선교사들에 의하여 중국과 일본에 전파되었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당시 일본은 전국에 군웅이 할거하여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기성 종교인 神道와 불교는 혼란과 고난 속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이때 천주교가 들어와서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구원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도 야소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明朝 말에서 淸朝 초기에 걸쳐 천주교는 북경 조정과 상류사회에까지 침투하여 착실하게 그 영향력이 커져가서 많은 名流들을 개종시켰다. 일부 선교사들은 황제의 신임을 얻어 청조의 높은 벼슬까지 했다. 청조가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을 묵인하고 그들을 관직에 등용한 것은 그들의 신앙을 수용한 것은 아니고 다만 天文學, 曆學에 관한 그들의 과학적 지식과 회화와 같은 예술분야에서의 기능을 중용한 것이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버리고 유교사상을 받아드린 것이 아니었고 중국사회에 기독교를 전파시키자면 모름지기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그 지배계급의 존경과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야소회 선교사들은 당시 중국과 서양문화의 교류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014)야소회의 중국 포교활동에 관하여는 George H. Dunne, S. J., Generation of Giants:The Story of the Jesuits in China in the Last Decades of the Ming Dynasty (Notre Dame, Indiana: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62)와 Jonathan Spence, To Change China:Western Advisers in China, 1620∼D1960(Boston:Little, Brown and Company, 1969)을, 일본에서의 활동에 관하여는 George Elison, Deus Destroyed:The Image of Christianity in Early Modern Japan(Cambridge, Mass.: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등을 참조.

 이와 같이 포르투갈과 스페인 양국은 동방진출의 선두에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에 들어서자 그들의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천주교 포교 활동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명조와 청조의 관용으로 포교활동이 묵인되었으나 교단 상호간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로마교회의 배타주의와 독선으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축출당하고 말았다. 일본에서도 사정은 대동소이하였다. 초기에 포르투갈 상인들과 선교사들이 비교적 용이하게 일본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일본 국내사정의 혼란에 의한 것이었으나 일단 일본 국내가 다시 통일되고 질서가 회복되자 선교사들은 축출되고 상인들은 엄격한 통제하의 한곳에 모은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근세 초기 유럽諸國의 중국과 일본 진출은 이들 국가의 용인과 필요에 따라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세는 그후 약 200년 동안 크게 변함없이 19세기초까지 계속되었다.

 근세 초기에 중국과 일본이 유럽인들과 새로운 접촉을 갖고 무역을 하게 된 시기에 조선은 그들과 아무런 접촉도 없이 ‘閉關自守’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동아시아에 도래한 유럽인들의 목적지는 주로 중국이었으며 그것도 주로 남중국이었다. 따라서 한반도는 일본 남부지방과는 달리 국제항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유럽인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알고 있었다해도 보잘것 없는 중국대륙의 일부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시 한국인들 자신의 외부세계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었다. 16세기 전반은 바로 명과 조선의 초기로 동아시아 세계질서가 제도적으로 완성된 시기였다. 조선의 통치계급으로 등장한 士大夫들은 程朱學을 신봉하고 국내정치나 대외관계에서 ‘중국 일변도’였다. 그들은 일본에 대하여는 문화적으로 완전히 무관심하였으며 국내정치나 대외관계에서 이와 동조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만일 당시 명조가 해금 정책을 포기하고 유럽문화에 관심을 보이고 서방과의 교역에 좀더 적극적이었다면 조선의 관심도 그쪽으로 기울어졌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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