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3) 동서 신국제관계의 성립:불평등조약 체제
  • (1) 중영 아편무역 분쟁

(1) 중영 아편무역 분쟁

 말한 나위도 없이 중국은 아편무역에서 막대한 경제적·사회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아편 흡연자의 수는 날로 늘어가고 필연적으로 이에 수반하는 도덕기강의 퇴패, 풍속질서의 문란, 국민건강의 악화와 생산력의 감퇴 등 국가사회 전반에 걸친 해독이 급격히 만연하였다. 이에 청조가 당면한 초미의 문제는 증폭되는 서민들의 생활고였다. 당시 중국에서 백성들은 일상생활에서는 동전을 사용했으나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반드시 은화로 치러야 했다. 그런데 아편밀수로 인한 은의 해외유출이 증가됨에 따라 국내 은 보유량이 급격히 감소되자 은화와 동전간의 환율이 급등하여 은화 1냥 대 동전 1,000文이던 시장환율이 1,600문 이상으로 올랐다.

 이에 청조는 1796년에 아편 흡연을 다시 엄금하고, 1800년에는 그 수입과 국내 재배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주로 관원, 과거수험생, 군인들의 흡연을 금지한 것이었고 일반 백성들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금지령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아편무역은 광주 외항뿐만 아니라 중국 남부해역 일대에 걸쳐 성행하였고 영국 및 모든 서방 국가 상인들이 이에 참가하였다. 이때 아편밀수 단속이 북경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배후에는 담당 관원과 군인들, 특히 廣東水師(海軍) 장병들이 아편 밀수상인들과 결탁하여 이들을 단속하기는커녕 오히려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태는 1830년대로 접어들면서 절정에 달하였고, 청조당국이 이에 대처하는데 고심하고 있을 때 1836년 5월에 太常寺 少卿 許乃濟 등이 아편 公認論을 제의하자 이를 둘러싸고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공인론의 요지는 아편무역은 엄연한 현실이니 차라리 아편과 중국 산품과의 물물교환 형식으로 이를 합법화하여 관원과 군인을 제외한 일반 민간인의 흡연을 방임함으로써 은의 해외유출을 방지하고 관세 등 국가세입을 증가시키는 한편, 아편 수입을 줄이기 위하여 국내 아편 재배를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공인론자들은 주로 아편무역에서 직간접으로 이익을 보고 있었던 광동지방의 鄕紳들이었다. 한때 공인론이 유력하더니 이해 9월에 嚴禁論이 일어나자 대세는 반전했다. 엄금론자들 가운데서 가장 강경론자는 鴻臚寺卿 黃爵滋였는데 그는 흡연자를 사형에 처하자고 주장하였다. 道光황제는 전국 총독과 巡撫들에 黃의 上奏文에 대한 의견을 하문하였다. 이에 응하여 전부 27통의 회답 상주문이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전부가 금지론이었고 그중 湖廣總督 林則徐를 비롯한 8명은 흡연자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이에 청조는 아편밀수와 흡연을 근절하기 위한 강경책을 취하게 되었다. 먼저 허내제 등을 降等하여 補職을 박탈하는 동시에 임칙서를 북경으로 불렀다. 도광황제는 8차에 걸쳐 그를 召見하여 아편문제에 대한 그의 의견을 소상히 들은 다음 1836년 12월 31일자로 그를 欽差大臣에 임명하여 즉각 광동으로 가서 아편문제를 처리하라고 명령하였다.021)아편논쟁에 관하여는 Hsin-pao Chang, Commissoner Lin and the Opium War(Cambridge, Mass.:Harvard Universtiy Press, 1964), pp.85∼119 참조.

 한편 영국에서는 18∼19세기 교체기에 자유무역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운동은 이론적으로는 18세기 후반에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國富論>에서 제창한 ‘自由放任論’이었으며, 영국 산업혁명의 발전과 함께 형성된 국내 신흥 자본가들이 이를 주도하였고, 의회에서는 휘그(Whig)당이 이를 대변하였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동방무역 독점권의 폐지와 이에 관련하여 중국시장의 개방 요구가 일어났다. 이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앞장선 것이 동인도회사의 감독 하에 인도-중국간의 ‘地方貿易’에 종사하는 영국 상인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아편밀무역에서 거대한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이 많았다. 상술한 매카트니 사절단의 파견도 바로 이들의 요구에 응한 것이었다. 동인도회사는 물론 자신의 무역 독점권을 고수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복잡한 국내 사정으로 말미암아 영국정부가 다시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한 것은 1816년이었다. 윌리엄 엠허스트卿(Sir William Amherst)을 단장으로 한 제2차 사절단은 구성이나 목적에 있어서 매카트니 사절단과 대동소이하였다. 청조는 매카트니 사절단에 대한 것보다 더 고압적인 태도로 엠허스트에 대하여 황제 앞에서 전통적인 ‘三跪九叩’예를 치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가 이를 거절하자 즉각 북경에서 축출하였다.022)엠허스트 使節團은 그 사명을 달성하는데는 완전히 실패했으나 귀국 후 團員의 한 사람이었던 스타운튼卿(Sir George Staunton)이 집필한 An Authentic Account of an Embassy from the King of Great Britain to the Emperor of China(전 2권 1797)이라는 방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근세 유럽에서의 중국연구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내의 자유무역 운동은 착착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영국의회는 동인도회사의 무역 독점권을 단계적으로 1813년에는 英本國-印度 간에서 폐지하고, 1823년에는 인도-동남아시아간에서, 1833년에는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중국간에서 폐지하여 동방무역을 완전히 자유화하였다. 이와 함께 해외무역 확대에 적극적이었던 찰스 그레이(Charles Grey) 휘그당 내각은 中英 무역을 직접 정부 감독 아래 두고 현지에서 영국정부를 대표하고 상인들을 감독하기 위한 무역감독관 제도를 신설하고 초대 감독관에 윌리암 네이삐어(William Napier) 해군대령을 임명하였다.

 네이삐어는 1834년 7월에 광주에 도착하여 영국상관에 들어갔다. 그는 兩廣總督에게 면회를 요구하는 서한을 직접 전달하려고 했으나 중국측은 이를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네이삐어가 당시 광주를 방문하는 모든 서방인들과 같이 먼저 마카오에 들어서 ‘紅碑’(入港許可)를 받지 않고 직접 광주로 왔으며, 서방상인들은 중국 관원에 서한을 직접 보내지 못하고 반드시 洋商을 통하여 ‘稟’(請願書)을 제출해야 한다는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즉 청조당국은 네이삐어를 영국정부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동인도회사를 대표하는 상인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발생한 양측간의 대립이 해결을 보지 못하고, 중국측은 네이삐어의 廣州退去를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자 무역을 정지하고 무력으로 영국상관을 봉쇄하여 식량공급을 중단하였다. 네이삐어는 결국 9월 하순에 마카오로 퇴거한 다음 10월 11일 그곳에서 말라리아로 병사하였다.

 네이삐어는 죽기 전에 마카오에서 보낸 보고서에서 중국에 대한 강력한 무력시위를 건의하였다. 그의 砲艦政策 건의는 물론 그 자신의 중국관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중국시장을 개방하고야 말겠다는 현지 영국상인들의 기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공공연히 廣東貿易제도에 도전하고 나섰으며 무장선을 동원하여 중국 중부 해역에까지 아편 밀무역을 확대하는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버트 필(Robert Peel) 保守黨 내각은 아편 밀무역 업자들의 이와 같은 태도와 행동에 동조하지 않았다.

 네이삐어의 사후 죤 F. 데이비스(John F. Davis)와 죠지 로빈슨(George Robinson)이 차례로 무역감독관에 임명되었다. 데이비스는 자신이 현지 영국상인들 간에 인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얼마 되지 않아 사임하고 로빈손이 그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동인도회사 管貨人 출신이었는데 청조당국을 자극하여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하여 ‘절대적인 沈黙’ 정책으로 현상유지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협조’정책은 현지 영국상인들의 불평을 샀다. 그들은 양인이 모두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과감한 행동을 취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영국정부는 광동무역의 경험이 없는 인물을 全權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군함을 이끌고 북상하여 직접 북경당국과 담판하여 광동무역 제도를 폐지시키고 북방 諸港을 개방시키라고 요구했다. 결국 로빈손도 파면되고 1836년 7월에 차석 감독관으로 있던 해군대령 챨스 엘리어트(Charles Elliot)가 감독관에 임명되었다.

 바로 이와 때를 같이하여 북경에서는 아편문제를 둘러싼 대논쟁이 벌어졌으며 광동 현지에서는 아편 밀무역 단속이 강해졌다. 1837년 2월 엘리어트는 이와 같은 현지정세를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영국군함을 자주 광동해역에 파견해 줄 것을 건의했다. 엘리어트의 의도가 이와 같은 시위로 북경에서 대두하고 있는 아편 금지론을 억제하고 될 수 있으면 아편 공인론을 부활시키자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영국정부는 이해 9월에 영국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군함을 중국해역에 파견키로 결정하였다. 다음해 1838년 7월에는 영국 동인도함대 사령관이 군함 3척을 이끌고 2개월 이상 광동 해역에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이때부터 영국 군함이 중국해역에 빈번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해 말에 광동 欽差大臣에 임명된 林則徐가 북경을 떠나 이듬해 1839년 3월 10일 광주에 부임하였다. 같은 날 엘리어트는 광주에 있는 英國商館을 떠나 마카오로 갔다.

 1785년 福建省 侯官 태생인 임칙서는 1811년에 進士試에 합격한 수재로 내외 요직을 골고루 역임한 후 1837년 湖廣總督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開明的인 사상의 소유자였으며 대표적인 유능한 經世學派 관료였다. 영국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영국에 압력은 가하되 무력대결은 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생각이었다.

 임칙서가 도임하였을 때 광동성 일대는 삼엄한 상태에 있었다. 전년 10월말 아편 엄금으로 廷議가 결정된 후 현지에서는 아편 밀무역과 흡연 단속이 갈수록 엄해지고 12월초에는 이미 2,000명 이상이 투옥되어 매일 한 두 사람씩 처형되고 있었다. 그는 아편 밀매자와 흡연자를 모조리 투옥하였는데 이 일을 부패한 현지 관원이나 서리들에게 맡기지 않고 지방 鄕紳을 동원하여 담당시켰다. 뒤이어 3월 17일에 임칙서는 광주에 있는 모든 외국상인들에 대하여 그들이 소장하고 잇는 아편 전량을 3일 내로 중국관헌에 제출하도록 명령하였다. 만일 이를 어기면 아편을 전부 몰수함은 물론 소장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동시에 모든 외국인에 대하여 앞으로는 중국에 아편을 반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그는 중국에 있는 영국인에 대한 재판권은 마땅히 중국정부가 행사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임칙서의 견해와 주장은 확고부동했으나 그의 태도는 신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와 판단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었으며 그의 계산에는 큰 오산이 있었다. 첫째, 그는 우유를 常食하는 서양인들은 변비를 방지하기 위하여 차를 마셔야 한다는 속설을 믿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아편무역이 당시 영국경제와 식민지 경영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영국과의 분쟁에 있어서 아편문제만을 분리하여 해결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中英 무역은 종전대로 계속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영국 여왕이나 정부가 아편 밀수업자와 같은 ‘부도덕한’ 장사꾼을 위해 중국과 전쟁까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끝으로 그는 당시 淸朝의 거의 모든 관료들과 같이 서방무역이 중국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전면 폐지해도 무방하다고 확신하였다.023)위의 책, Chang, Commissioner Lin, pp.120∼160.

 마카오로 철퇴하여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던 엘리어트는 3월 22일에 모든 英國商船에 홍콩에 집결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24일 마카오를 떠나 광주 英國商館으로 들어갔다. 같은 날 임칙서는 무역정지를 선포하여 영국상관을 무력으로 봉쇄하고 중국인 買辦과 雇傭人을 철퇴시켰다. 28일 엘리어트는 임칙서에게 아편을 인도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엘리어트는 후일 중국 정부와의 보상문제에 대비하여 영국 정부가 대가를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상인들로부터 공식으로 아편을 전량 인수한 다음 4월 4일부터 5월 18일까지 총 20,238상자의 아편을 중국측에 인도하였다. 즉 인도된 아편은 상인들의 개인 재산이 아니라 법적으로는 전부가 영국정부 재산이었던 것이며 가격은 총 240만 파운드로 평가되었다. 당시 청조의 엄중한 단속으로 말미암아 아편매매는 중단된 상태였는데 인도의 총 年産額의 반이나 되는 방대한 재고품이 광주에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엘리어트는 이 재고품 전량을 시가로 팔아 넘긴 셈이다. 임칙서는 몰수한 아편에 소금과 生石灰를 섞어서 변질시킨 다음 바다에 버렸다.

 아편 인도가 진행되는 동안 상관에 대한 봉쇄는 해제되었으나 엘리어트는 영국인 전원을 마카오로 철거시키고 자신도 5월 4일 그곳으로 갔다. 임칙서는 영국과의 무역재개를 희망하여 그들이 광주로 돌아오도록 권유했으나 엘리어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아편 인도 문제는 일단락 지워졌으나 영국측은 앞으로 아편을 중국에 반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제출은 끝내 거절하였다.024)Peter Ward Fay, The Opium War, 1840∼1842(Chapel Hill: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5), pp.142∼16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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