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3) 동서 신국제관계의 성립:불평등조약 체제
  • (3) 애로우전쟁과 천진조약 및 북경협정

(3) 애로우전쟁과 천진조약 및 북경협정

 영국이 아편전쟁에 승리하여 북경조약을 체결한 다음 다른 서방교역국도 뒤이어 청조와 유사한 내용의 통상조약을 맺었는데 그 최초가 1844년에 체결된 中美 望厦조약이다. 이 조약은 전문 34조로 되어 있었는데 남경조약과 부수 협정들을 단일 조약으로 종합, 정리한 것이다. 그 특징은 이미 남경조약에서 결정된 사항에 관하여 세부적인 규정을 추가하고 중국서적의 수출과 중국인 어학교사의 고용 등 이미 관행이 되어 있는 것을 명문화한 것이었다. 조인 후 12년이 지나면 ‘중요하지 않은 사항’은 이를 수정 또는 변경할 수 있다는 새 조항도 첨가하였다.

 뒤이어 10월 24일 프랑스가 청조와 中佛 黃埔조약을 체결하였는데 그 내용은 中美 望厦조약과 크게 다른 바가 없었다. 다만 조약서명 후 프랑스 대표는 계속 현지 당국과 교섭하여 천주교에 대한 청조의 금령을 완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양국간의 명문화된 합의는 아니고 프랑스 측의 요청에 따라 廣東 欽差大臣 耆英이 천주교 금령을 풀어줄 것을 上奏하여 황제가 이를 허가하였으나 일반에 공포하지는 않고 기영이 그 내용을 전국의 總督과 巡撫에 전달만 하였다. 그후 이에 만족하지 않는 프랑스의 집요한 요구에 따라 1846년 2월에 道光황제의 上諭로 공포되었다. 그러나 선교사가 중국 내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은 계속 금지되었다. 훗날 조선에서 천주교 탄압이 일어났을 때 駐중국 프랑스 대리공사가 이 상유를 항의의 법적 근거로 삼았다.

 청조는 미국, 프랑스에 이어 1847년 3월에 스웨덴(Sweden)과 노르웨이(Norway)와도 통상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망하조약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청조는 1845년 7월에 벨기에(Belgium)에 대하여 조약은 맺지 않고 최혜국대우만을 부여하였다. 그후 러시아가 1848년, 1850년, 1853년 세 차례에 걸쳐 해로를 통한 중국 개항장무역에 참가할 권리를 요구했으나 청조는 러시아에는 이미 육로를 통한 변경무역이 허용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때마다 이를 거절하였다.

 이와 같이 청조와 서방국가간에 남경조약을 비롯한 일련의 조약이 체결되고 1843∼1844년에 걸쳐 廣東, 上海, 寧波, 福州, 厦門이 차례로 개방되었다. 이로서 중국의 서방무역에서는 朝貢체제하의 광동무역제도가 소멸되고 이를 대신하는 새 조약체제에 의거한 자유무역제도가 성립되었다. 이는 중국의 대외관계사상 미증유의 대변혁이었다. 이로써 서방국가들은 과거와 같이 청조로부터 朝貢國 대우를 받지 않고 중국과 정상적이고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 종전에는 무역이 ‘天朝의 은전’이었으나 이제는 국가간의 계약에 의한 ‘권리’로 보장된 것이다. 또 이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협정관세 제도와 영사재판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이를 특정 국가만이 아니고 국제법에 따라 보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최혜국대우 조항이 설정되었다. 청조가 최혜국대우 조항을 쉽사리 수용한 것은 ‘一視同仁’의 정신으로 모든 속방에 대한은전을 베푼다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근본적인 변혁에도 불구하고 청조는 조약제도를 당면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일시적 편법으로 생각하고 이를 광동무역제도의 연장 또는 확대로 간주하여 전통적 조공체제 테두리 안에서 운영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029)坂野,≪近代中國情致外交史≫, 180∼187쪽.

 이와 같은 양자간의 견해와 태도의 차이는 대립과 알력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즉 청조는 항상 이른바 ‘天朝의 定制’를 회복·유지하려는 반면, 서방국가들은 조약의 준행을 요구하여 무력행사도 불사하였다. 모든 개항장에서 그러했지만 특히 광동지방에서 廣州入城문제를 둘러싸고 양측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원래 광동지방은 反유럽 풍조가 심했는데 그 밑바닥에는 가깝게는 아편전쟁 중 고조되었던 영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으며 멀리로는 근세초기 포르투갈인들의 만행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었다. 남경조약 제2조에는 영국인이 가족을 동반하고 개항장에 거주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는데 거주지역을 英文에는 ‘市와 邑(cities and towns)’으로 표기되어 있고 中文에는 ‘港口’로 표기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국측은 영국인은 ‘선착장’ 부근의 ‘항구’에서만 거주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영국측은 廣州市內에도 거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관한 영국정부의 태도는 1846년 파머스톤卿이 다시 외상에 취임하자 더욱 강경하여 졌다. 그후 廣東 홈차대신 기영이 두 차례에 걸쳐 영국인의 광주 입성을 허가할 것을 약속했으나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그때마다 좌절되었다. 결국 1850년에 파머스톤 외상이 이 문제에 관하여 북경당국에 강경한 항의문을 보냈다.

 이에 대하여 청조당국은 직접 파머스톤에 회답하는 것을 꺼려서 兩江총독을 시켜 회답 요지만을 그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이 문제는 광동 흠차대신의 소관사항이니 그와 교섭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홍콩총독 겸 영국공사 본햄(Sir George Bonham)이 大沽에 군함을 파견하여 영국외상의 항의문에 대한 정식 회답을 요구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청조의 이와 같은 강경한 태도의 배후에는 이때 북경에서는 道光황제가 서거하고 咸豊황제가 등극함에 따라 온건파가 물러가고 아편전쟁 당시의 主戰파였던 강경파가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사실이 있었다.030)坂野, 위의 책, 204∼211쪽.

 이와 같이 남경조약 체결 후 8년이 지났음에도 북경당국은 영국사절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고 과거와 다름없이 모든 교섭을 계속 지방관인 광동총독과 양강총독 관할 하에 두었다. 따라서 영국 정부로서는 북경 중앙정부당국과 직접 접촉을 확립하는 것이 절실한 문제였다. 영국의 또 하나의 불만은 개방된 5항은 모두 양자강 이남에 편재하여 중국의 상업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중영무역이 순조롭게 발전, 확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중국세관의 부정부패와 비능률적인 운영이 영국에 대하여 일방적인 부담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파머스톤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청조에 대해 다시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사상 최대의 반란인 太平天國의 난이 일어나 청조가 存亡의 위기에 빠지게 되어 영국을 위해서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51년 12월에 파머스톤이 프랑스에 대한 외교상의 실책으로 내각에서 물러나게 되어 중국에 대한 그의 전쟁계획은 일단 중단되었다. 그러나 1855년 1월에 그는 수상이 되어 정권을 잡게 되자 중국에 대하여 전쟁을 시작할 구실과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애로우(Arrow)號 사건이 일어났다.031)아편전쟁 이후 애로우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中西관계를 다룬 연구에는 하바드대학의 John K. Fairbank 교수의 고전적 명저, “Trade and Diplomacy on the China Coast:the Opening of the Treaty Ports, 1842∼1854”(Cambridge, Mass.:Harvard University Press, 1953)가 있다.

 1856년 10월 8일 중국관헌이 광주항에 정박하고 있는 홍콩선적의 중국 화물선 애로우호의 선원 12명을 해적혐의로 체포하였다. 홍콩 총독 죤 보우링(Sir John Bowring)과 광주영사 해리 파크스(Harry Parkes)는 즉각 兩廣총독 葉名琛에 엄중 항의하였다. 그들은 중국관헌이 영국선박에 무단히 登船하여 영국국기를 끌어내리고 선원을 체포한 것은 영국에 대한 모욕이며 불법행위니 이에 대하여 사과하고 체포된 선원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중국측은 당시 애로우호는 영국국기를 게양하고 있지 않았으며 애로우호의 선장은 영국인이었으나 선주와 선원은 모두 중국인이니 중국관헌의 행동은 불법도 아니고 영국에 대한 모욕도 아니라고 반박하여 그들의 항의를 일축하였다. 이때 중국측은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애로우호의 홍콩선적등록은 이미 기한이 지나서 무효인 상태였다. 양측간의 교섭이 결렬되고 10월 22일 영국군이 광주시를 공격하여 다음 날 한때 총독아문까지 점거하였다. 이같이 영국 측은 사건을 날조하여 강인한 수법으로 전쟁으로 끌고 갔다.

 현지 보고를 받자 파머스톤 내각은 즉각 전쟁준비를 시작하고 다음해 1857년 2월 하순에 중국에 대한 원정군파견안을 영국의회에 제출하였다. 국회상원 토의에서 더비卿(Lord Derby)은 중국인이 소유하고 중국인이 운행하는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이 전쟁을 해야 할 법적·도의적 이유가 무엇이냐고 공박했다. 애로우호의 홍콩선적등록이 무효로 된 것을 영국측이 은폐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지자 리차드 곱덴(Richard Cobden) 하원의원은 이를 ‘극악무도한 행위’라고 규탄하였다. 이리하여 정부안은 상하 양원에서 모두 부결되었다. 파머스톤 내각은 즉각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한 결과 85석 차로 승리하여 전쟁계획을 밀고 나갔다.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대기하고 있던 엘긴卿(Lord Elgin)이 그해 5월 초순에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을 떠났다. 이에 앞서 영국정부는 프랑스정부에 공동출병을 제안하고 프랑스정부가 이를 수락하였다. 프랑스정부는 그해 2월에 중국 廣西省에서 불법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프랑스인 신부 한 사람이 살해된 것을 출병의 구실로 삼았다. 당시 프랑스는 중국과 큰 이해관계는 없었으나 나폴레옹 3세가 천주교의 해외선교활동의 보호자를 자처하여 출병했으나 프랑스정부의 진정한 의도는 월남침략에 있었다. 구로백작(Baron Gros)이 소규모의 프랑스 기동부대를 이끌고 원정에 참가했다.032)영불 양국 원정군 파견결정에 관하여는 坂野, 앞의 책, 234∼239쪽 참조. 영국원정군이 중국으로 가는 도중 때마침 일어난 세포이(Sepoy)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인도에 들었다가 7월에야 홍콩에 도착하였으며, 양국 원정군 전원이 현지에서 합세한 것은 11월이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청조와의 조약을 개정할 목적으로 미국과 러시아 대표들도 홍콩으로 가서 이들과 합류했다. 12월 12일 영불 대표는 兩廣총독 葉名琛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이를 거절당하자 5,700명의 병력으로 28일에 광주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다음날 이를 점령하고 엽 총독을 사로잡았다. 엽은 인도에 압송되었다가 다음 해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후임 양광총독 黃宗漢은 광주로 가지 못하고 惠州에 머물렀다. 영불군은 광주시에 군정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1861년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서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대표는 동일한 내용의 서한을 북경에 보내어 상해에서 조약개정을 위한 교섭을 시작할 것을 요구했다. 청조당국은 직접 이에 회답하는 것을 피하고 양광총독으로 하여금 英·美·佛 삼국 대표들에는 광주에서 양광총독과 교섭하고 러시아 대표에는 黑龍江 유역으로 가서 그곳 중국관원과 교섭하라고 전달케 했다. 이에 英佛대표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4월말에 大沽에서 담판을 시작했으나 결렬되고 5월 20일에는 영불군이 대고 포대를 점령하고 천진에 진입하였다. 6월에 가서 청조는 內閣大學士 桂良과 吏部尙書 花沙納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천진에서 비로소 진지한 교섭을 시작했다. 영불대표는 무력을 배경으로 강경한 담판을 벌였으며 미국과 러시아 대표는 편승하여 中英·中佛·中美·中露 4개의 천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연합군은 황제가 정식으로 이 조약들을 재가한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천진을 떠났는데, 이때 엘긴卿은 영국원정군을 이끌고 日本 원정길에 올랐다.

 이 4개의 천진조약은 서로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모든 최혜국대우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4국은 모두 동일한 혜택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중 중요한 것은 ① 체약국의 외교사절은 가족을 동반하고 北京에 상주 또는 수시로 왕래하여 청조의 내각대학사 또는 그와 동등한 대관들과 대등하게 접촉하며, ② 이미 개방된 5港 이외에 牛莊·登州·漢口·九江·鎭江 등 11개항을 추가로 개방하고, ③ 체약국 국민은 각기 자국영사가 발급하고 중국관헌이 인준한 여권을 가지고 중국 내지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외에 ④ 중국인의 신앙의 자유와 외국인의 선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⑤ 중국인의 해외도항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등 남경조약에 없었던 조항들이 들어 있었다. 또 청조는 모든 공문서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夷’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끝으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外國人 稅務司를 모든 개항장에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외국인 세무사는 太平天國의 亂 중 1854년 상해가 한때 비밀결사인 小刀會에 의하여 점령되어 海關업무가 중단되자 영국영사가 앞장서서 임시조치로 외국인을 세무사로 임용하여 청조를 위하여 관세를 징수하였는데 그 성과가 매우 좋아 이것을 제도화한 것인데 훗날 이 외국인 세무사는 청조의 모든 행정기관 중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 또 천진조약에서 청조는 영국에 400만 兩, 프랑스에 200만 냥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배상금지불에는 조약항의 관세수입의 40%를 이에 충당키로 하였다. 배상금 지불이 완료될 때까지 영불 양국이 천진·등주·대고·광주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로 했다.

 천진조약에는 조인 후 1년 내에 북경에서 그 비준서를 교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불군이 물러가자 북경에서는 조약포기론이 일어났다. 당시 북경정계에서는 외압이 있을 때마다 처음에는 강경파의 主戰論이 판을 쳤다. 그러다가 외국의 군사적 압력이 높아지면서 온건파의 화평론이 대두하기 시작하여 그 압력이 극도에 달하면 화평론이 결정적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강화가 성립되고 외국의 군사적 압력이 완화되거나 제거되면 다시 주전론이 일어났다. 바로 이때도 그러했다.033)坂野, 위의 책, 242∼250쪽. 이해 11월에 상해에서 中英간에 관세협정교섭이 열렸는데 청조는 다시 桂良과 花沙納을 파견하여 천진조약을 파기하면 그 대가로 무역에서 관세를 전적으로 면제하겠다는 제안을 하라고 훈령했다. 두 사람은 이를 반대하여 그런 제안조차 하지 않았다. 또 청조는 북경 대신 상해에서 천진조약 비준서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나 영국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외교사절을 북경에 상주시키는 권리는 당분간 이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1859년 6월 영·불대표들이 천진조약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하여 군함을 이끌고 대고에 도착했다. 청조당국은 이들이 대고에 상륙하는 것을 꺼려서 그곳서 16㎞ 북쪽에 있는 北塘에 상륙하도록 통고하였다. 그러나 영·불 함대는 이 통고를 받기 전인 6월 25일 白河 입구에 설치된 장애물을 제거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대고포대에서 발포하여 이들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간신히 현장에서 탈출하였다. 한편 미국공사는 7월말에 북당에서 조약비준서를 교환하였고 이에 앞서 이미 북경에 와 있던 러시아공사는 그곳서 비준서를 교환하였다.

 대고사건 후 북경 당국은 영·불대표에 다시 북당을 경유하여 북경에 들어올 것을 권했으나 그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청조는 8월 1일에 일방적으로 천진조약의 포기를 선언하고 양강총독 河桂淸을 흠차대신에 임명하여 영·불 양국과 새로 조약을 체결하고 그 비준서는 상해에서 교환할 것을 명령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국에 이에 응하지 않으면 그들로부터 배상금을 받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다.

 이에 영·불 양국 정부는 다시 전쟁준비를 갖춘 다음 다음해인 1860년에 재차 엘긴卿과 구로백작을 각자의 전권대표에 임명하고 20,000명이 넘는 연합군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영국이 주었던 使節常駐權 행사를 보유한다는 언질을 취소하고 천진조약의 전면적 이행과 대고사건에 대한 사죄와 배상금을 추가로 요구하였다. 이를 거절당하자 8월 1일 영·불군은 북당에 상륙하여 대고포대를 배면에서 공격하여 이를 쉽사리 점령하고 천진에 진입하였다. 이때 대고포대 砲座는 모두 앞 바다를 향하여 고착되어 있어 적군에 대하여 대포 한발도 쏘지 못하고 고스란히 포획되었다. 영·불군이 북경을 향하여 진군을 개시하자 청조는 천진과 通州에서 담판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9월 22일 咸豊황제는 친왕과 軍機大臣, 후궁들을 거느리고 熱河離宮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그 전일인 21일 皇弟인 젊은 恭親王을 흠차대신에 임명하여 북경에 남아 영·불대표와 교섭토록 하고 大學士 桂良과 군기대신 文祥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케 하였다.

 10월 6일 연합군은 북경교외에 있는 별궁 圓明園에 침입하여 많은 보화를 약탈했다. 10월 8일 북경성문이 연합군에 개방되고 40여 명의 연합군 포로가 석방되었는데 그중 여럿은 학살된 시신이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군은 원명원을 불살랐다. 공친왕은 연합군의 최후통첩을 수락하고 24일에 중영 북경협정에, 25일에는 중불 북경협정에 서명하였다. 두 협정은 천진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고 그 이행을 다짐한 것이었는데 새로 추가된 것은 프랑스에 대한 배상금이 400만 냥으로 증액된 것과 영국에 조차되었던 九龍이 영구히 영국에 할양된 것이다. 영·불대표들은 11월 9일 북경을 떠나 천진으로 물러가서 한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청조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불대표들이 북경을 떠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 공사 니꼴라이 이구나체프(Nikkolai Ignatiev)는 공친왕과 11월 14일에 中露 추가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조는 1858년 5월에 조인된 중러조약을 재확인하여 흑룡강 이북 지역과 그 지류인 松花江에서 동쪽으로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러시아 영토로 확인하였다. 이로서 한국의 동북 변강이 직접 러시아와 접경하게 되었다.

 천진조약과 북경협정의 조인으로 아편전쟁 후 1842년 남경조약에 의하여 성립된 조약체제가 20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확립되었다. 이로서 中西관계에서 전통적인 중국의 조공체제는 영원히 사라지고 서방열강이 힘으로 강요한 불평등조약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서구주도의 새 체제에는 일본을 비롯한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이 편입되었으나 유독 ‘隱者의 나라’ 조선만은 그 테두리 밖에 남아 있었다.034)애로우전쟁과 조약체제의 확립에 관하여는 John K. Fairbank, ed.,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8), Vol. 10, Part 1, pp.213∼263의 John K. Fairbank, "The Creation of the Treaty System"과 Immanuel C. Y. Hsu, China's Entrance into the Family of Nations:The Diplomatic Phase, 1858∼1880(Cambridge, Mass.:Harvard University Press, 1960) 및 Banno Masataka, China and the West, 1858∼1861":"The Origins of the Tsungli Yamen(Cambridge, Mass.: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등 많은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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