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4) 일본의 개항과 미국

4) 일본의 개항과 미국

 일본은 1630년대 말 서양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서방무역을 나가사키(長崎)항에 제한하였으며 교역상대도 和蘭(Netherlands) 한 나라에만 한정하였다. 동시에 일본인의 해외도항을 엄금하였다. 토쿠가와(德川)막부가 이와 같은 쇄국정책을 취한 배후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국내에서 천주교를 근절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해외무역의 이윤을 독점하는 것이었다. 16세기 중엽 아시카가(足利)막부가 극도로 약화하여 국내분열과 내전이 절정에 달하자 기존질서와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때 耶蘇會(The Society of Jesus) 선교사들에 의하여 일본에 전해진 천주교는 빠른 속도로 국내에 전파되어 17세기 초에는 그 신도가 수십만에 달하였다. 그러나 다시 전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정권을 수립한 토쿠가와막부는 불교와 토속신앙인 神道를 반대하고 일본의 전통적 정치체제와 사회질서에 도전하는 천주교를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일본의 武人 통치자들은 그들의 권력이 무력에 의거한 것이며 무력은 경제력의 뒷받침 없이는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해외무역이 일본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토쿠가와막부는 ‘百害 無一利’한 서양의 종교는 이를 엄금하고 군사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서양무역은 이를 독점키로 했던 것이다.035)德川막부의 천주교 禁敎정책에 관하여는 Jurgis Elisonas, “Chirstianity and Daimyo” in John Whitney Hall. ed.,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Vol. 4, pp.301∼372 참조.

 막부가 이와 같은 정책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모든 국내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럽인들의 군사적 도전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200년 간 이 상태는 크게 변함이 없어 이른바 쇄국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첫째 일본 국내에서 한때 막강했던 막부의 군사력은 약화되고 원래 反토쿠가와 성격이 강했던 영주들이 이끄는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둘째 과거 중국과 일본의 ‘一港무역’ 제도에 복종했던 서방제국이 대등한 외교와 자유로운 통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특히 산업혁명을 완성한 영국은 그 강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아편전쟁에서 청조를 굴복시키고 중국을 개방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도 서방국가들의 압력하에 쇄국정책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036)德川시대 말기 일본의 국내정세에 관하여는 William G. Beasely, “The Meili Restoration”(Stanford:Stanford University Press, 1972), pp.74∼99 참조.

 이에 앞서 18세기 말부터 서양 선박들이 일본근해에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하자 막부는 海防을 강화하여 ‘異國船’이 접근해오면 물러가도록 권유하여 응하지 않으면 격퇴하라는 명령을 전국에 내렸다. 19세기초에 외국선의 출몰이 더욱 잦아지자 막부는 이들을 무조건 격퇴하라는 이른바 ‘無二念 打拂令’을 내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무모한 대책임을 지적하고 쇄국령을 철폐하여 서방국가들과 통상해야 한다는 개방론이 일부 개명적 인사들간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주로 蘭學者들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漢學, 國學, 蘭學의 三大 학문체계가 있었다. 한학은 막부의 官學으로 程朱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국학은 일본 고유의 전통과 문물제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막부의 권학정책에 힘입어 18세기에 들어서 크게 발달하였다. 난학은 곧 ‘和蘭의 학문’이다. 막부는 천주교를 근절하기 위하여 화란무역을 제외하고는 서양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면서도 서양의 과학과 기술에 관한 서적 특히 의학서적의 수입은 허용하였다. 이리하여 난학이 발달하였는데 이는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난학을 통하여 서양의 과학기술과 근대적 군사력을 비교적 잘 알게 된 일본의 난학자들이 서방과의 통상과 문화교류를 주장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청조의 廣東무역제도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개방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영국이었다. 한편 토쿠가와막부의 쇄국정책을 무너뜨리고 일본을 개방한 주역은 미국이다. 당시 영국은 일본을 보잘것 없는 섬나라로 간주하고 주로 중국시장 개척에 주력하였다. 미국은 사정이 달랐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독립하여 대서양 연안국가로 출발한 미국이 19세기 중엽에는 이미 북미대륙 동서해안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륙국가로 발전하였으며 태평양과 대서양을 낀 해양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이른바 ‘명백한 운명’(the Manifest Destiny)을 확신하고 ‘서쪽’으로 나아간 미국인들의 전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태평양의 광막한 바다로 뻗쳐나갔다. 19세기 중엽에는 미국 捕鯨船들이 이미 일본과 한국해역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무역을 위한 태평양 항로의 개척이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광동무역에 참가하여 여기서 얻은 이윤을 국내 산업발전에 투자하였다. 초기에는 미국 동해안을 떠난 상선들이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특히 1848년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탈취한 미국은 그곳에서 태평양을 건너 중국으로 직행하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는 서태평양 해역에서 자국 선박의 寄港地를 확보하고 해난시 피난과 구조를 위하여 일본의 개방이 필요했다. 미국이 일본의 개방을 서둘러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일본에 대한 帝政러시아의 야심이었다. 이미 알래스카에 진출한 러시아는 남쪽으로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침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미국과 영국은 다같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미국은 태평양을 오가는 자국선박의 안전을 도모하여 중국 무역을 더욱 증진시키는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 세력의 침투를 억제하기 위하여 일본을 개방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때 미국이나 영국은 일본 자체를 중요한 통상 대상국으로 보지는 않았다.037)曾村保信,≪ベリはなぜ日本にきたか≫(東京:新潮社, 1987), 101∼146쪽 참조.

 아편전쟁 후 5항이 개방되기 시작하자 미국은 1844년에 청조와 望厦조약을 체결하여 중국무역에 박차를 가했다. 1846년 6월 미국 海軍提督 제임스 비들(James Biddle)이 통상교섭을 위하여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충분한 준비도 없이 군함 2척을 이끌고 東京灣에 나타났으나 막부당국과 정식으로 교섭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1852년 1월에 해군제독 마듀 페리(Mathew C. Perry)가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 원정을 위하여 치밀한 계획과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의 원정은 실로 시의에 적절한 것이었다. 만일 수년을 더 기다렸다면 미국은 남북전쟁 前後期에 들어가게 되어 대규모의 해외 원정을 추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때 국외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Turkey) 문제를 둘러싸고 유럽과 중동에서 러시아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개방 문제에 직접 관여할 겨를이 없었다.

 페리제독이 미국 동인도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도착한 것은 1853년 7월이었다. 후일 강화도에 파견된 일본의 구로다(黑田) 艦隊의 모델이 되었다는 그의 함대는 전함 4척으로 구성되어 있어 일본 침공작전에는 부족했으나 무력시위에는 충분하였다. 그는 東京灣 안에 있는 우라가(浦賀)港 앞 바다에 정박한 다음 현지 관헌에게 미국 대통령이 일본 황제에 보내는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 요지는 근래 많은 미국선박이 태평양을 건너 중국으로 왕래하며 일본 근해에서 조업하는 미국 捕鯨船이 많으니 이들을 위하여 식량과 연료를 공급하고 해난시 피난처와 구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日本皇帝’가 일본의 국왕을 말한 것인지 장군을 말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서한을 전달한 후 페리는 答書를 받기 위해 다음해 1월달에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일단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페리가 이렇게 한 것은 물론 막부당국으로 하여금 국론을 통일하여 개항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시간을 준 것이었다. 그러나 막부는 당황망조하여 어쩔 바를 몰랐으며 일본 전국이 발칵 뒤집혀 ‘흑선’(미국군함) 4척 때문에 온 국민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국론은 攘夷와 開國(開放)으로 양분되었으나 대다수는 ‘祖宗의 遺法’인 鎖國을 견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의 요구와 국내여론 사이에서 진퇴유곡의 궁지에 빠진 막부는 토쿠가와 일족의 門長인 攘夷論者 토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에 자문을 구하였다. 그는 和蘭에서 무기와 함선을 구입하고 造船기술자를 초빙하며 沿海 방비를 강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장 미국과의 군사적 대결에서 일본에 승산이 없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때마침 장군이 사망했음을 핑계삼아 페리에 대해 국내사정이 어려우니 미국의 요구에 대한 회답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막부는 나가사키의 和蘭商館을 통하여 이를 페리에 전달하려고 했으나 그와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막부가 뚜렷한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페리는 약속대로 1854년 2월에 8척의 군함을 이끌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막부 지도자들은 미국의 요구에 대한 확고한 대책은 없었으나 그들은 중국이나 한국 문인 관료들과는 달리 현실주의적인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서양의 군사력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서양 과학기술의 실용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아편전쟁에서 청조가 당한 패배와 굴욕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요구를 계속 거절하는 것이 일본에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막부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되도록 이면 개항을 지연시키자는 계산이었다. 한편 페리는 외교와 시위를 교묘하게 교대로 사용하였다. 결국 양측은 1854년 3월 31일 美日 和親條約에 서명하였다. 일본이 외국과 최초로 체결한 이 조약은 토쿠가와 정권이 200년 동안 견지해온 쇄국정책에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통칭 ‘카나가와(神奈川)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은 전문 12조로 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간단했다. 즉 東京灣 入口에 있는 시모다(下田)港을 즉시 개방하고 1년 후에는 北海道 남단에 있는 하코다대(函館)港을 개방하여 미국선박의 寄港을 허용하고 식량과 연료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일본측은 개항은 나가사키港에 한정하려고 시도했으나 이는 쇄국체제 하의 바람직하지 못한 관습의 연장에 지나지 않다는 미국측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원래 페리는 미국이 1844년에 청조와 체결한 望厦조약과 같은 폭넓은 통상조약을 희망했으나 일본 국내시장을 고려하여 양국간의 통상에 관하여는 장래 다시 교섭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위해 최혜국대우 조항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조약의 批准기한은 조인 후 18개월 내로 정하였다.038)開港교섭과 제1차 美日和親조약에 관하여는 曾村保信, 위의 책, 147∼199쪽.

 한편 영국정부도 일본과 조약을 맺고자 했으나 러시아와의 관계의 악화로 말미암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美日 화친조약 체결 4일 전인 3월 27일 마침내 프랑스·터키와 연합하여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다. 그해 9월 영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스터링(Sir James Stirling) 제독이 군함 4척을 이끌고 나가사키항에 입항하여 현지 관헌에게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제시하고 英佛 함선이 작전목적으로 나가사키항에 출입하는 것을 허용할 것과 러시아 함선에 피난처를 제공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관헌들이 그의 요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궁여지책으로 미일조약과 같은 내용의 조약 체결을 제의하자 그는 이를 수락하였다. 이리하여 10월 14일 조인된 것이 英日 화친약정이다. 영일약정을 ‘條約’이라 하지 않았던 이유는 스터링제독이 본국 정부의 허가 없이 자신이 독단으로 조인하였기 때문이었으나 훗날 조약으로 추인되었다.

 이에 앞서 러시아 동아시아함대 사령관 뿌짜찐(Efim V. Putyatin) 제독은 본국 정부의 명령을 받고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나가사키항을 드나들고 있었다. 러시아가 영·불 양국과 교전상태에 들어간 후인 1854년 4월 20일 다시 나가사키에 입항하여 현지관헌에 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각서를 전달했으나 영국함대와의 조우를 피하기 위하여 회답도 받기 전에 황망히 그곳을 떠났다. 그후 뿌짜찐은 영·불 함대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일본해역을 돌아다니다가 그해 12월 4일 시모다항에 입항하여 중단되었던 조약체결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23일 돌연히 이 지방을 강타한 지진과 해일로 러시아함대 旗艦이 대파되고 이곳을 엄습한 태풍에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재난으로 중단되었던 러-일 교섭이 근근히 재개되어 다음해 1855년 1월초에 양국간의 修好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하코다대와 시모다 兩港과 나가사키에서 러시아 선박에 대한 물품의 공급과 해난시 구조를 약속했다. 또 일본 北海道와 러시아領 쿠릴列島 사이의 국경선을 획정하고 사할린島는 종래대로 러-일 양속으로 했다.

 러-일 조약이 조인된 지 약 1년 후인 1856년 1월 30일 화란과 일본간에 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화란은 토쿠가와 시대에 일본이 통상관계를 유지한 유일한 유럽 국가였는데 새 조약으로 나가사키항 출입이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이 외에 다른 항구는 개방하지 않았으나 최혜국대우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모다항과 하코다대항에서 화란은 다른 조약국들과 동일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039)沼田次郞 편,≪日本と西洋≫의 276∼374쪽.
今井庄次<開國>, 304∼309쪽 참조.

 이상 조약들은 단순한 ‘和親’조약으로 일본이 그 문호를 완전히 개방하고 이들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자유로운 통상을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쇄국정책을 포기하게 되는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물론 막부는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이 조약들을 체결한 것은 아니고 서양함대와 대전하여 승리할 자신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취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를 사실대로 인정하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막부 당국자들은 이 조약들이 ‘祖宗의 遺法’을 포기하거나 변경한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개국론(개방론)을 들고 나섰다. 즉 막부 창건 초기에는 여러 유럽 각국과 무역을 하였는데 후에 가서 화란을 제외하고는 이를 금한 것은 오로지 천주교를 금지하자는 뜻이었으나 천주교만 엄금한다면 무역은 허용해도 조종의 유법에 위배될 것이 없다는 견해였다. 이는 단순히 서양인들이 일본에 도래하여 교역을 하는 것만을 허용하자는 소극론이었다. 이와는 달리 일본인도 해외에 진출하여 무역에 종사할 뿐만 아니라 서양문물도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적극론도 대두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식견이 높고 진보적인 개방론을 편 사람은 사쿠마 쇼잔(佐久間 象山)이었다. 그는 서양 문명에 대하여 높은 지식을 가진 당대 일본의 제일 가는 蘭學者요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는 청조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은 중국의 학문이 空理空論을 일삼는 한편 서양의 학문은 실사를 연구하고 실리를 추구하여 온 결과라고 논파하고 일본은 모름지기 서양의 탁월한 과학문명을 도입하여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훗날 ‘和魂 洋才’라고 표현된 근대 일본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대표한 인물이었다. 그에 사사한 젊은 국수주의 유학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페리 함대와 함께 서양으로 밀항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투옥, 처형되었다. 이들과 같은 개방론자나 진보적인 학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당시 일본의 지배계급의 압도적인 다수는 서방국가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쇄국체제를 고수해야 한다는 攘夷論을 주장하였다.040)佐久間象山과 吉田松陰은 사제간이었으나 전자는 西洋과의 ‘和親開國’을 주장하고 후자는 ‘和親攘夷’를 주장하였다. 信夫淸三郞,≪象山と松陰:開國と攘夷の論理≫(東京:河出書房, 1975) 참조.

 이와 같은 대립 가운데서도 개방론자와 양이론자는 해방의 강화가 일본이 당면한 초미의 급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페리 함대의 근대식 함선의 위력에 크게 놀란 이들은 서양으로부터 함선을 구입하고 그 조선기술을 습득하여 근대식 해군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이에 따라 막부는 1855년 나가사키에 해군 傳習所를 창설하여 화란으로부터 함선을 도입하고 해군 교관을 초빙하여 막부와 各藩에서 선발된 사관생도에 조선기술과 함선조련 훈련을 시작했다. 또 서양의 군사과학과 기술을 도입하는데 필요한 어학 교육을 위하여 1857년에 애도에 蕃書調所라는 語學館을 개설하여 막부뿐만 아니라 각 번의 자제들을 입학시켰다.

 한편 미영 양국은 자국 국민이 일본에 거주하며 무역에 종사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통상조약체결을 요구하여 1856년 여름부터 그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해 8월초에 나가사키에 온 화란사절이 일본도 세계대세에 따라 자유무역을 허용하고 일본국민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며 개항장에 외국인들이 가족을 동반하여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권유하였다. 뒤이어 21일에 미국영사 타운센드 해리스(Townsend Harris)가 시모다에 도착하자 새 통상조약체결을 위한 교섭은 자연 그가 주도하게 되었다. 해리스는 막부 대표와 끈질긴 교섭으로 미국영사로 일본에 상주하는 권리를 획득하여 9월초에 시모다 시내 한 절에 일본에서 최초의 미국 영사관을 개설하였다. 그후 그는 꾸준한 교섭 끝에 1857년 6월에 미일 시모다(下田)條約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① 시모다항과 하꼬다대항에 미국 상인의 거주와 영사의 주재를 허용한다. ② 미일양국 간에 通貨 교환방법을 확정한다. ③ 개항장에 있어서 미국인에 대한 영사 재판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는 시모다 화친조약의 불비점을 보완하는데 그쳤다. 시모다조약 조인에 뒤이어 화란과 러시아도 각각 이와 비슷한 추가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해리스는 시모다조약을 과도적인 조치로 간주하고 본격적인 일본의 개방을 위하여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통상권을 획득하려고 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막부 고위 당국자와 직접 담판하기 위하여 에도 방문허가를 강경히 요구하여 드디어 동의를 얻었다. 해리스는 1857년 11월 23일 시모다항을 떠나 육로로 30일 에도에 도착하였다. 12월 7일 장군 이애사다(家定)를 알현하고 미국 피어스(Pierce) 大統領의 親書를 전달한 다음 12일에는 막부 최고 행정수반인 홋따 마사요시(堀田正睦)와 회견하여 세계대세를 설명하고 본격적인 통상조약체결을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1월 25일에 시작된 미일회담은 2월 25일까지 계속되어 통상조약과 부속 무역장정 및 稅則 초안 작성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막부는 새 조약에 조인하기 전에 교토에 있는 王室의 ‘勅許’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토쿠가와시대 일본의 막번체제 하에서는 日本王(天皇)은 명목상의 국가원수일 뿐 실질적 권력은 없었고 장군이 국내 통치권과 대외외교권을 전적으로 행사하였다. 따라서 외국과 조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막부가 왕실의 허가를 받은 적도 없었고 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 권력의 기반인 군사력의 약화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부터 국토를 방위하는 능력과 국내세력을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한 막부가 조약체결에 대한 ‘칙허’를 받기로 한 것은 궁여지책으로 그 권위를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3월초에 칙허를 받기 위하여 老中 홋따가 직접 교토에 갔다. 그러나 攘夷派의 조종 하에 있던 왕실이 막부의 請을 거절하는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홋따는 2개월이나 교토에 머물다가 결국 망신만 당하고 돌아가고 막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교토에서 돌아와서 다시 해리스를 만난 홋따는 그의 독촉을 견디지 못하여 7월 27일에 조약에 조인할 것을 약속했다. 그후 홋따는 老中 자리에서 물러나고 히코내(彦根藩) 領主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비상시에만 두는 막부의 최고직인 大老에 취임하여 난국을 담당하게 되었다. 때마침 중국은 英佛 양국과 天津조약을 체결하였다. 막부에 이 소식을 전한 해리스는 일본이 중국과 같은 운명을 피하려면 빨리 조약에 조인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에 이이는 조약체결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1858년 7월 29일에 왕실의 허가 없이 美日 修好通商조약에 조인하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미일양국은 다음의 사항을 결정했다.

① 상호 외교관을 상대방의 수도에 주차시킨다. ② 시모다, 하꼬다대 이외에 가나가와(神奈川), 나가사키, 니이가다(新瀉), 효고(兵庫)의 4항을 추가로 개방한다. ③ 에도와 오사카(大阪)에 외국인이 商用으로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중 시모다는 가나가와 개항 6개월 후에 폐쇄하기로 했다. 이들 개항장은 단순한 보급과 피난구조뿐만 아니라 자유무역을 위하여 미국인들에 개방되었다. 8월에는 중국에서 청조와 천진조약을 체결한 영국대표 엘긴(Elgin)卿, 프랑스대표 구로(Gros)백작, 러시아 대표 뿌짜찐 제독이 각각 함대를 이끌고 통상조약을 맺기 위하여 에도에 도착하였다. 이외에 화란대표는 이미 7월에 에도에 와 있었다. 이들이 막부와 체결한 통상조약은 모두 미일 통상조약과 그 내용이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이상 5개 조약에서 일본은 상대국에 대하여 영사재판권을 허용하고, 수출입품에 대한 협정관세 원칙을 수락하였으며, 최혜국대우를 부여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일본에 일방적으로 의무를 부가한 전형적인 片務的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들은 서방국들이 아편전쟁 이후 무력이나 외교적 압력으로 동아시아 제국에 강요한 불평등조약체제의 일환이었다.041)Beaseley, The Meiji Restoration, pp.98∼116.

 중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동아시아 문명과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달한 유럽문명 사이에는 여러 가지 상이점이 있는데 그중 가장 근본적인 것의 하나가 경제적인 것이었다. 근세 초기는 물론 19세기 중엽까지도 동아시아는 농경사회였다. 이에 비하여 유럽, 특히 동방진출에 앞장섰던 지중해 연안국가들은 상업사회였다. 물론 중국에서도 양자강 하류 지역이나 寧波·厦門·廣東 등 남부 해안지역에서나 일본의 北九州, 近畿지방은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으나 상업이 농업을 제치고 경제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농경지가 부족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려웠던 지중해연안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해상교통과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를 주도하였다. 특히 이태리半島 베니스·제노아·프로렌스 등 해안 도시국가들은 이미 13, 14세기에 상업혁명을 치르고 당시의 유럽경제를 주도하였다. 이들 도시국가의 상업혁명과 이에 따른 경제적 발전과 번영의 원동력의 하나가 동방무역이었다. 그런데 초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스만 투르크의 興起와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동방 무역로가 차단되었다. 근세 초기에 시작된 유럽국가들의 동방진출은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여 중단될 위기에 있던 동방무역을 계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도와 중국에 직결되는 새 무역로의 개척은 해상루트 발견만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동방으로 가는 ‘大航海(great voyages)’를 조직해야 했다. 이와 같은 인류사상 미증유의 대사업을 위해 과학혁명이 필요한 천문학지식과 항해기술을 제공하였고, 새로 등장한 민족국가의 왕실이 재정지원을 담당하였으며,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천주교의 포교운동이 그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이 모든 대변혁의 정신적·물질적 원천이 된 것이 이에 앞서 이태리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던 중세 후기의 상업혁명과 문예부흥이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탐험가, 상인, 선교사들은 동방세계를 향하여 각각 동으로 서로 떠났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원주민들을 정복하여 무역기지와 식민지를 건설하고 천주교 전파에 노력하면서 마지막 목적지인 동아시아에 도달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별천지를 발견하였다. 그곳에는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 그리고 광대한 영토와 풍부하고 다양한 자원, 즉 ‘地大物博’을 자랑하는 中華帝國이 있었으며 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고유의 階序的인 세계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일련의 문명국가와 문화민족들이 있었다. 이 동아시아세계는 이미 상업혁명을 겪어온 유럽세계와는 달리 폐쇄된 자급자족의 농경사회였다. 모든 농경사회와 같이 중국을 비롯한 이 지역의 사회는 근본성격이 보수적이었고, 정치는 절대군주에 의한 전제정치였으며, 상인을 천시하는 鄕紳(地主)이나 세습적인 무사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였다. 이들에는 대외무역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위정자들에 의한 철저한 간섭과 통제하에 성립된 중국의 광동 무역제도나 일본의 나가사키무역제도는 모두 이러한 동아시아의 전통과 문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때 유럽 국가들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외교통상제도를 무너뜨릴 만한 힘이 없었다. 따라서 이 체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선교사들은 축출당하고 이에 순종한 상인들은 이른바 ‘柔遠’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중국의 광동무역 제도가 확립된 것은 18세기 중엽이었으며 일본의 나가사키무역 제도는 이에 1세기 이상 앞선 1630년대 말에 확정되었다. 광동무역제도는 물론 중국의 華夷사상에 근거한 조공무역체제의 일환이었으며 나가사키무역 제도 역시 중국의 조공무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청조는 만방의 종주국으로 자처하고 ‘地大物博’을 자랑하면서 해외교역은 ‘天朝’에는 필요 없으나 ‘柔遠’의 정신과 ‘一視同仁’의 온정으로 이를 허용한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유럽인들을 야만시하여 편견과 차별로 그들의 교역활동에 심한 간섭과 규제를 가하여 이를 철저히 통제하여 막대한 이득을 누렸다. 비록 규모는 적었으나 일본의 나가사키 무역에서도 이와 대동소이했다. 이와 같은 제도를 중국이나 일본이 수세기 동안이나 유럽인들에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동서무역은 이에 참가한 유럽 국가들이 추구한 중상주의와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300여 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사태가 변하기 시작하였으니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자유무역운동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산업사회에는 그 공업생산을 위한 원료의 확보와 생산품 판매를 위한 시장확보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19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영국경제를 주도한 것은 신흥자본가들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중상주의적 통상정책을 반대하고 동인도회사의 동방무역 독점권 폐지를 요구하여 자유무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성공한 그들은 중국시장을 완전 개방하기 위해 광동무역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으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급기야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아편전쟁의 사후처리와 그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급기야 애로우전쟁을 도발하여 기어코 그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았다. 영국이 중국을 개방하는 동안 미국이 일본의 개방을 선도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개방을 계기로 동아시아세계에서는 중국 중심의 전통적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서방국가들이 주도하는 새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물론 국제사회에서 이와 같은 획기적인 대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국을 선두로 한 서방국가들이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하여 廣東과 나가사키무역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 조약제도를 성립시키는데 두 차례의 전쟁과 2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1860년대 초까지 중일 양국이 조약체제에 편입된 것은 사실이나 양국이 모두 완전히 개방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상징하는 존재가 동방의 隱者 조선이었다. 이리하여 새 조약체제와는 관계없이 이 지역 국가들 간의 상호관계에는 종래의 제도와 관습이 존속되어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이중구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1860년대부터는 조약제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중구조는 1880년대 후반에 가서야 소멸되었고 장구한 역사를 가졌던 동아시아 세계질서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042)Kim, The East Asian World Order, pp.328∼351 참조.

 수 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은 서방인들에 대하여 ‘柔遠의 정신’과 ‘一視同仁’을 운운하고 ‘天朝의 恩典’이라고 자랑하였으나 실지로는 편견과 멸시로 그들을 대했으며 온갖 규제로 그들의 행동을 ‘힘’으로 통제하였다. 이와 같은 굴욕과 구속을 반대하여 자유무역운동을 전개한 영국을 비롯한 서방 자본주의 기업인들은 국제외교상의 만국의 평등과 통상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광동무역제도와 나가사키무역제도를 폐지하고 동아시아 제국의 시장을 개방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문화적 편견과 종교적 독선으로 동아시아 사람들을 대하였으며 ‘불평등조약’제도를 ‘힘’으로 이 나라들에 강요하여 1세기에 걸쳐 외교통상상의 일방적인 특권뿐만 아니라 ‘자유무역’의 미명 아래 아편무역과 같은 엄청난 무법과 부도덕을 자행하였다.

<金基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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