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2.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
  • 1) 러시아의 통상요구

1) 러시아의 통상요구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미 18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즉 1854년 러시아 군함 ‘팔라타’호는 두만강 어귀에 나타나 수역을 측량하고 다시 남하하여 영흥만을 라자레프(Lazareff)만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迎日灣을 ‘운코프스키’만으로 명명하였다. 1854년 4월에는 동시베리아총독 무라비요프의 지령에 따라 ‘팔라다(Pallada)’호와 다른 한 척의 러시아함대 ‘보스토크(Vostok)’호가 다시 조선 동해에 와서 수역을 측량하는 한편 무력시위를 감행하면서 德源郡 龍成鎭과 永興府 大江津에 이르러서는 어민 수 명을 학살하는 행위까지 자행하였다.043)≪哲宗實錄≫권 6, 철종 5년 3월 병인.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 중국과 러시아가 북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두만강을 경계로 한국과 국경을 접하고 나서부터이다. 즉 大院君 집정 직후인 1864년 2월에 러시아인 5명이 두만강을 건너 慶興府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는 文書를 제출하고 회답을 요구하였다. 이후 1865년 2월과 9월에도 러시아인들은 국경을 넘어와 각각 통상을 요구하였다. 1865년 11월과 1866년 가을에도 러시아인들은 계속 영흥부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국서를 직접 함흥감영에 갖다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때마다 조선정부는 외국과의 통상은 지방관헌의 권한 밖의 일이라던가 또는 국교가 없는 외국인의 입국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 통상을 요구하는 사건은 계속 일어났다. 1866년 12월에는 수십 명의 ‘코사크’ 기마대가 다시 경흥부에 와서 교역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의외의 결과를 야기시켰다. 즉 1866년의 丙寅迫害와 그로 인한 프랑스극동함대의 강화도 원정이 바로 그것이다. 대원군정부가 러시아의 통상요구로 고심하고 있을 때 洪鳳周·金勉浩 등 천주교신도들은 프랑스·영국 등과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통상요구를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러기 위해서 당시 국내에 잠입해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을 것을 대원군에게 권고하였다. 대원군은 선교사 베르뇌(Berneux)를 서울로 불러오도록 하였다. 천주교인들은 당시 선교차 지방에 가 있던 베르뇌주교를 서울로 불러오기로 주선하였으나, 시일을 너무 지체하였고, 또 그 사이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뜸하여졌다. 한편 조정의 정국은 지금까지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던 상황에서 탄압으로 급선회하였고, 대원군도 더 이상 천주교도들에게 호의를 베풀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서 당시 한국에 와 있던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중 9명이 순교를 당하였다. 살아 남은 리델(Ridel), 페론(Féron), 깔래(Calais) 3인의 선교사 중 리델신부가 天津으로 가서 조선에서의 선교사 살해와 천주교도박해의 소식을 전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은 강화도 원정을 단행하였다.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통상을 요구하면서부터 러시아인이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오는 경우가 부단히 계속되었다. 이에 대원군정부는 북경정부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淸國의 總理衙門이 러시아 정부에 대해 항의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인도 두만강을 건너 沿海州 방면으로 이주하였다.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개국되었다. 일본에 의해 개국되면서 조선은 뒤이어 1882년과 1883년에 미국·영국 등 서양열강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미·영과 조약을 체결하기 전 1880년 2월 19일 코사크 기마대가 또 다시 두만강 얼음을 타고 경흥부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관직을 ‘코미사(Commissar)’라고 하고 이름은 ‘마투닌(Matunin)’이라고 불리는 자가 인솔하였으며, 통상문제와 함께 연해주 방면으로의 조선 이민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강화도조약의 내막에 대해 물으면서 러시아와의 통상조약체결의 가능성에 대해 타진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자기들의 영토가 넓고 물산이 풍부하여 남의 나라를 엿보지 않으며 여러 나라와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려 할 따름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경흥부사는 “우리 나라는 疆界만 지킬 뿐 외교의 법이 없다”고 하면서 이번에도 그들의 통상요구를 거절하였다.

 1881년 이홍장이 조·미 통상조약의 체결을 주선하고 나서자 러시아는 다시 통상교섭을 시도하였다. 즉 러시아는 우수리 지방장관으로 하여금 조선측에 다시 교섭하되, 전면적인 통상요구는 잠시 제쳐놓고, 우선 조선측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간단한 지방문제부터 협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의 직접적인 교섭을 하는 대신에 露領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 사람을 앞에 내세우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1881년 2월, 李先昌이라고 하는 조선 청년이 위에 언급한 ‘코미사’의 편지를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영흥부에 오게 되었다. 이 ‘코미사’는 이번에 ‘俄羅斯國 南方于藪理觀察交界官’이라는 신분으로 경흥부사 앞으로 직접 글을 보냈다. 그리고 그 서한은 러시아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닌 조선어로 쓰여진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당시 러시아인들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서한의 주요 내용은 앞으로 전염병이 유행할 때 두 나라 사이에 서로 통보하자는 것과 조선 측에서 러시아 통역이 필요하다면 알선하여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함경감사 金有淵의 보고를 받은 조선정부는 첫번째 요구는 받아들이고 두번째의 통역관문제는 완곡하게 좋은 말로 거절하였다.044)≪高宗實錄≫권 19, 고종 8년 2월 27일.
震檀學會,≪韓國史 最近世編≫(乙酉文化史, 1981), 764∼779쪽.
이렇게 하여 러시아는 지방에 국한되었지만, 드디어 조선과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882년 5월 한·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뒤이어 한·영, 한·독 조약이 체결되자, 淸國주재 러시아공사 카시니(Cassini)는 재빨리 이홍장에게 조·러 조약체결의 알선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던 이홍장은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러시아 정부는 청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목적으로 1884년 5월 天津주재 러시아 영사 베베르(K. I. Waeber)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베베르는 1883년 이홍장이 추천하여 조선정부에 고빙된 외교고문 겸 해관총세무사였던 묄렌도르프(Möllendorff, 穆麟德)에게 접근하였다. 묄렌도르프는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세력을 견제하도록 이홍장에 의해 추천·파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는 조선에 러시아 군사교관을 초빙코자 하는 등 친러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045)高柄翊,<穆麟德의 雇聘과 그 背景>(≪震檀學會≫, 25·26·27, 1964). 묄렌도르프는 조선 국왕과 대신들을 설득하여 러시아와 통상조약을 맺도록 하였다. 결국 조선정부는 외무독판 金炳始를 전권대표에 임명하여 베베르와 담판하고, 1884년 7월 7일 마침내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이듬해 9월 베베르가 조선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의 자격으로 서울에 파견되었고, 조약의 비준서도 교환되었다.

 조·러수호통상조약은 본 조약 13개 조항과 부속조항 즉, 부속통상장정 3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양국은 정식으로 통상외교대표를 파견하게 되었으며(제2조), 러시아는 조선에서 치외법권(제3조)을 포함하는 막대한 이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제4조에서는 러시아에 인천·원산·부산·서울·양화진을 개방하였으며, 각 개항장에서 러시아인들의 가옥 및 토지임차 등 여러 가지 특권들을 규정하였다. 다른 조항에서는 러시아인들의 상업상의 특권, 최혜국 대우, 租借地 설립 등에 관하여 상세히 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사면에서도 러시아 군함이 조선의 ‘일체 항구에 자유롭게 입항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으며, ‘조선정부는 한국영해의 측량에 종사하는 러시아 정부에 속하는 선박에 최대의 편리를 허락할 것’을 규정하였다(제8조). 부속통상장정에서는 선박의 출입항 수속, 화물의 揚陸 및 樍載, 관세납부, 세관수입보증에 대해 러시아의 상업적 특권을 상세히 규정하였다. 이 조·러 조약도 다른 서양열강들과의 조약처럼 러시아의 일방적 권리와 조선측의 일방적 의무를 규정한 불평등조약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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