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2.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
  • 2) 프랑스의 통상요구

2) 프랑스의 통상요구

 프랑스의 한국접근은 통상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傳敎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조선에 처음으로 진출한 서양인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파리外邦傳敎會員이었고, 이들은 1830년대에 입국하게 되지만, 조선의 천주교는 이미 1784년 창설당시에 북경의 프랑스 선교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프랑스와 조선의 접촉은 1784년 冬至使行의 隨員으로 북경에 갖던 이승훈이 프랑스 예수회 회원들의 北堂에서 천주교에 귀의하여 그라몽(Grammont)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은데서 시작하여 교황청이 1791년에 프랑스인 구베아(Gouvéa)주교를 조선교회의 관리자로 임명함으로써 주로 천주교회를 매개로 교류가 이루어져 왔다. 1831년에는 天主敎朝鮮敎區가 창설되고 이에 대한 관리가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됨에 따라 많은 프랑스 신부들이 들어오고 천주교신자도 그 수가 점점 증가하였다.046)崔奭祐,<韓佛條約체결 이전의 양국 관계>(≪韓佛外交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6), 7∼8쪽.

 프랑스는 조선정부가 1839년 앵베르(Imbert)·모방(Maubant) 및 샤스땅(Chastant) 등 프랑스 선교사 3명을 살해한 것을 단서로 조선에 군함을 파견하게 되었다. 駐中國·印度 프랑스함대사령관 세실(Cécille) 해군소장은 1846년 5월 海軍省長官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데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친선관계를 이룩할 수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조선에서도 중국의 黃埔條約과 같은 입법기준을 해석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 해안으로 가서 조선정부와 교신방법을 모색할 계획임”을 알렸다. 세실 사령관은 클레오파트르(Cléopatre)호를 이끌고 이 해 5월 20일 마카오를 出船, 도중에서 빅토리외즈(Victorieuse)호와 사빈느(Sabine)호를 합류시켜, 제주도를 거쳐 8월 6일 충청도 洪州 땅 外姻島에 나타났다. 그는 원래 조선의 대신과 면담하고 3인의 선교사 학살에 관해 해명을 요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지 관리에게 國書를 접수시키는데 실패하고 그 다음해에 조선정부의 答書를 받으러 오겠다고 전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047)崔奭祐, 위의 글, 17쪽.

 이 때 보여준 군사행동은 ‘自國敎士를 보호하고 조선 信徒들을 성원’하기 위한048)李能和,≪朝鮮基督敎及外交史≫(朝鮮基督敎彰文社), 16장, 朝鮮與佛國之際, 82쪽. 시위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국서에는 프랑스인 학살에 대한 엄중 問責과 위협적인 言辭가 담겨 있을 뿐 ‘通交’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없었다.049)李元淳,<丙寅洋擾 一考>(≪韓佛修交 100年史≫, 1986). 그러나 국서에 밝힌대로 다음 해인 1847년 조선측 回文을 받기 위해 古郡山島에 나타난 라삐에르(Lapierre) 대령은 全羅監司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프랑스가 이미 淸國과 修好條約(萬年和好)을 체결하고 있으며 그 자신도 조선과 프랑스 帝國이 수호를 영구토록 맺기를 절실히 원하길 바란다고 하였다. 즉 세실(Cécil)이나 그 자신의 來韓한 의도가 ‘問責’과 더불어 ‘通好’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라삐에르 일행의 군사시위 계획은 그의 두 척의 군함이 모두 고군산도 연해에서 폭풍우로 파괴되어 부근 도서에 긴급 피난하였다가 상해서 傭船해 온 영국선박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애당초 계획대로 군사적 시위를 하지 못하였다.050)李元淳, 위의 글, 33∼34쪽.

 1866년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중 9명이 살해당하고 조선인 천주교도들이 살해되는 丙寅迫害가 일어남으로써 로즈(Roze)제독의 강화도 원정이 단행되었다. 이 원정은 수교나 통상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 살해에 대한 보복원정이며 나아가 프랑스제국의 침략적 식민정책 수행의 한 측면이다. 즉 프랑스인 선교사학살이라는 종교적 문제를 구실로 군사적 개입을 한 프랑스제국의 ‘전통적인 군사적 통교 강요의 한 전개’였던 것이다.051)李元淳, 위의 글, 40쪽.
禹澈九,<丙寅洋擾小考>(≪東方學志≫49, 연세대, 1985).
조선원정 문제로 公使代理 벨로네(Bellonet)가 물러나고 랄르망(Lallemand)이 1867년 5월 駐淸프랑스 공사로 부임하여 또 다시 본국정부에 대해 조선원정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1875년경부터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나고 국왕이 친정하면서 開國外交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따라서 1876년에는 블랑(Blanc) 외 2명의 신부가 입국하였고 1877년에는 리델(Ridel)신부가 2명의 선교사를 인솔하고 재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는 이미 朝日修好條約이 체결된 뒤였다. 통상이나 수교보다 국내교도의 재기와 교세부흥에 희망을 품고 활약하다가 다음 해인 1878년 1월에 리델신부 이하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관헌에게 체포·투옥되어 또 한번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의 청탁을 받은 일본이 석방권유를 겸한 경고문을 보내오고 또 청국정부에서도 ‘査明釋放’하라는 조회가 오는 등 국제적인 석방운동의 전개로 말미암아 조선정부는 그들을 석방·송환하였다. 또 1880년에 뮈뗄(Mutel) 신부가 리우빌(Liouville)과 같이 황해도로 잠입하여 역시 선교사업을 하던 중 1881년 白川 지방에서 체포되었으나 조선정부에서는 지방관헌의 잘못으로 돌리고 곧 석방하였다.052)國會圖書館刊,≪舊韓末條約彙纂 下≫, 86쪽.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한·영, 한·독간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도 서둘러 조선과 조약을 체결코자 하였다. 즉 1882년 6월 5일 조선과의 조약을 체결하고자 天津駐在 프랑스 공사 딜롱(Dillon)이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는 駐淸英國公使 윌스(Willes)와 마찬가지로 이홍장의 편지를 휴대하고 왔다. 딜롱이 소개장을 요구하자 이홍장은 마지못해 조선 정부에 대하여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을 권고하고 소개장을 써 주기는 했으나 당시 한·영 조약의 체결을 위해 서울에 와 있던 馬建忠이 방해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건충은 딜롱에게 조선에서 천주교의 전교금지를 주장함으로써 양국간의 조약체결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통킹(東京)문제로 인한 청국과 프랑스간의 관계악화로 청국측이 방해를 한 것이다.053)우철구,≪19세기 열강과 한반도≫(법문사, 1999), 80쪽. 그런데 歐美 여러 나라들이 통상무역에 목적을 두고 한국과 수교를 한 것과는 달리 프랑스 정부는 信敎의 자유를 중시하였으므로 兩國間에 수교에 관한 정식교섭은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측은 추방되었던 블랑 신부가 1884년 6월에 7명의 선교사와 함께 무난히 입국하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信敎의 자유와 함께 선교사의 입국이 묵인된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884년 한·러조약이 체결된 후 1886년 4월에 이르러 다시 꼬고르당(F. G. Cogordan)을 全權委員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도 漢城判尹 金晩植을 全權大臣에 임명하여 5월부터 회담을 개시토록 하였다. 그 결과 그 해 6월 4일에 전문 13조로 된 한·불수호통상조약과 통상장정 및 선후속약 등에 조인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1887년 4월에 프랑스 全權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내한하여 外務督辦 金允植과 더불어 조약비준교환을 완료함으로써 양국간에 정식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당분간 駐韓外交업무를 駐韓러시아공사에게 대리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가 선교사업 이외의 일반외교 업무를 중시하지 않은 탓으로 여겨진다.054)國會圖書館,≪舊韓末條約彙纂, 下≫,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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