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2.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
  • 3) 영국의 통상요구

3) 영국의 통상요구

 19세기 동아시아에 대한 영국의 주된 관심은 무역과 함께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남진정책과 관련된 전략적 측면이다.

 영국이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부터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접근은 1875년 강화도사건 이후이다. 일본이 1875년 강화도사건을 일으키자 주일영국공사 파크스(H. Parkes)는 砲艦外交를 구사하여 韓英間에 통상을 조속히 개방하고 巨文島를 점령할 것을 본국정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디스레일리(Disraeli) 보수당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파크스는 독자적 판단으로 당시 일본에 와 있던 修信使 金綺秀와의 접촉을 시도하고 이에 실패하자 군함을 조선으로 보내 정찰케 하고 담판을 시도토록 하였다.055)崔文衡,<韓英修交와 그 歷史的 意義>(≪韓英修交 100年史≫, 한국사연구협의회, 1984), 49쪽. 파크스는 1876년 가을에 군함 실비아(Sylvia)호와 스윙거(Swinger)호를 慶尙道 沿岸으로 보내서 연안을 측량하게 하였다. 1878년 9월에는 영국의 바바라 테일러(Babara Tayler)호라는 帆船이 제주도 근해에서 난파되자 조선측이 그 선원을 구제해준 데 감사를 표한다는 명목으로 파크스는 長崎領事館員 폴(Paul)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접촉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선원을 구제해 준데 감사를 표한다며 군함까지 끌고 가서 시위를 벌였다. 11월 19일에도 書記官 사토우(Satow)를 한국에 파견하여 본격적인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파크스의 이러한 시도를 거부하였다.056)≪舊韓末條約彙纂≫中卷, 309쪽.

 그후 1880년 4월 自由黨의 제2차 글래드스톤(Gladstone) 내각이 등장하고 그랜빌(Granville)이 다시 외상에 취임하자 駐日代理公使였던 케네디(Kennedy)는 조선에 개국을 열망하는 일단의 청년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영국정부가 조선을 개국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굳히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영국의 駐日外交官들은 조선의 개국방침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사토우는 李東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정보를 힘써 수집하고 이 정보를 토대로 조선을 개국시키는데 무력 사용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동인은 “한국은 通商上으로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동 아시아에서 교역하는 나라들에 대해 정략적으로는 지극히 중대한 의미를 지닌 나라”라고 하며 일본의 주선을 받아 개국을 서둘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057)위와 같음. 그러나 영국은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조선을 개국시킬 필요는 없다고 보았고 일본도 비협조적이어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영국이 조선을 개국시키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데 있었다.058)禹澈九,<19세기 후반 영국의 對韓政策-1883년 한양조약체결을 전후하여>(≪國史館論叢≫, 44, 1993).

 한·영 수교는 한·미 수교의 경우처럼 이홍장의 역할에 힘입었다. 이홍장이 조선에 대해 개국을 권고한 것은 한반도 내에서 일본과 러시아 세력이 증대되어 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李裕元을 설득시키는 말로 “美·英·獨 등과 같은 구미열강과 수교를 맺으면 마치 벨지움(Belgium)이 열강 틈에서 굳건히 독립을 유지해 가는 것처럼 조선도 마찬가지로 나라를 훌륭하게 지탱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059)崔文衡, 앞의 글, 53쪽.

 영국외무성은 한국과의 수교교섭 책임을 아시아 함대 사령관 윌스(Willes)제독에게 맡겼다. 슈펜트가 1882년 5월 22일 濟物浦에서 마침내 한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자 윌스는 즉각 神戶領事 아스톤(Aston)과 통역 모드(Maude)를 대동하고 동년 5월 27일 비질랜트(Vigilant)호 편으로 나가사키(長崎)를 출발 조선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한·미 조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馬建忠·丁汝昌 등의 도움을 받아 全文 14개조의 한·영조약이 1882년 6월 6일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 한·영조약은 대체로 한·미조약의 내용과 같았으나 조선의 沿海測量權을 추가로 인정받은 점만이 차이점이었다. 또 미국이 조선과 수교하려했던 목적은 난파선구제와 통상에 있었던 데 비해 영국은 교역에도 물론 관심이 있었지만 그 보다는 전략적 측면에서 러시아의 한국침투를 저지하는데 또한 목적이 있었다.060)崔文衡, 위의 글, 54쪽.

 윌스가 체결한 한·영조약은 영국측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파크스는 한·영조약체결 후 2주만에 이 조약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조잡한 협정”이라고 비판하였다. 한·영조약이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① 사치품 30%, 생활필수품 10%라는 관세율은 영·일조약(1858)의 그것보다 높으며 ② 이 조약에는 通商開港場이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지 않아 영국군함의 자유로운 조선항만 출입이 條文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海圖作成權 등도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③ 이 조약은 또한 아편금지규정을 두고 있어 이것이 타국과의 통상에 미치게 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윌스가 체결한 한·영조약의 비준을 보류하고 새로운 한·영조약을 체결케 하였다. 그리하여 1883년 10월에 다시 駐淸英國公使로 전임된 파크스를 전권대신으로 파견하여 조선정부의 대표 閔泳穆과 함께 수정을 가한 후 1883년 11월 26일 全文 13조의 한·영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 및 세칙장정·선후속약 3款에 조인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1884년 4월 28일 督辦交涉通商事務 金炳始와 파크스 사이에 비준이 교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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