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1. 개화사상의 형성
  • 1) 개화사상의 형성과 배경

1) 개화사상의 형성과 배경

 구미 열강이 18세기 중엽 동아시아에 침투하여 무력으로 위협하면서 불평등조약에 의거하여 중국과 일본을 개항시킨 것은 조선왕조의 선각자들에게도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국(淸)이 영국과의 아편전쟁(1840∼1842)에서 패배하여 굴욕적인 南京條約(1842)을 체결하고 5개 항구를 개항했을 뿐만 아니라, 천문학적 숫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국인에게 치외법권까지 인정한 사실은 중국의 선각적 지식인들을 위기의식 속에 몰아넣었음은 물론이오, 조선의 선각적 지식인들에게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여 중국이 당면한 사태에 우려의 관심을 갖게 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중국의 남방에서는 洪秀全이 1850년에 ‘太平天國 농민혁명운동’을 일으켜 淸왕조 타도의 반란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소식도 점차 조선왕조의 선각적 지식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1856년 10월에 ‘애로우(Arrow)호 사건’이 일어나, 영국과 프랑스의 동양함대는 연합해서 중국을 공격하여 廣東을 점령하고 天津을 공격하였다. 중국은 이 서양의 무력에 굴복하여 天津條約(1858)을 체결해서 다시 천진을 비롯한 10개 항구와 楊子江을 서양 열강에게 개항하기로 약속하였다. 청국이 이 조약의 비준과 실행을 지연시키려고 하자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다시 무력 공격을 시작하여 1860년 7월에는 천진을 점령하고, 8월에는 중국의 수도 北京을 점령하여 버렸다. 청국황제는 熱河로 피란을 가고, 청국은 또다시 서양 열강의 무력 침략 앞에 굴복하여, 1860년 9월 ‘北京條約’을 체결하여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북경에서 겨우 철수시켰다. 북경조약의 주요 내용은 ① 天津의 개항, ② 九龍半島의 할양, ③ 배상금 1,600만 달러의 지불, ④ 서양인들에게 천주교(서학) 포교의 완전한 자유와 교회당 설립 자유의 허용, ⑤ 서양 신부들에게 토지·가옥의 건축 또는 임대차 자유의 허용, ⑥ 서양인에 의한 중국인 노동자(coolies:苦力)의 모집과 해외 송출의 허용 등이었다. 이것은 매우 굴욕적인 패자의 강화조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북방으로부터 위협을 가하는 제정 러시아의 요구에 중국(청)은 굴복해서 1858년에는 러시아와 ‘아이훈(愛琿)조약’을 체결하여 黑龍江 이북의 시베리아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해 주었으며, 또한 1860년에도 러시아와 또다른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沿海州를 러시아에 할양해 주었다. 그 결과 조선왕국은 1860년부터 이전에 알지 못했던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나라가 되었다.

 한편 일본은 18세기에 들어온 이래 서양 열강으로부터 통상조약체결과 개국 압력을 받으면서 이를 거절해 오다가 1853년 7월 미국의 페리(M. C. Perry)가 지휘하는 군함 4척의 함포위협을 받고 결국 굴복하여 1854년 3월 미국과 제1차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2개 항구의 개항을 시작하였다. 뒤이어 1856년 8월에는 미국과 불평등조약의 내용을 가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6개 항구를 추가 개항하고 전면적 개국 단계에 들어갔다. 일본은 1854∼56년의 기간에 서양각국과의 통상무역에서 무역적자가 대규모로 누적되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을 중심으로 한 사무라이 일부에서 “서양과의 무역에서 손실받은 것은 조선을 정복하여 조선의 금·은·물산의 이익을 취하여 메꾸자”는 ‘征韓論’이 대두하여 교육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왕조의 지식인들과 관료들은 조선과 중국의 이웃관계를 이와 입술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입술인 중국의 몰락이나 멸망은 이빨인 조선의 이를 시리게 만든다고 보고 있었다. 조선의 조정과 일부 관료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라고 생각했던 중국이 서양 열강의 총력도 아닌 두 나라 동양함대의 공격 앞에 수도 北京을 점령당하고 청국 황제가 熱河로 피란가는 형편을 보고, 조선 조정은 경악하여 1861년 1월에 위문사절단을 파견하는 형편이었다.066)≪哲宗實錄≫권 13, 철종 12년 정월 정미.

 중국이 서양의 무력 앞에 무력하게 굴복하여 수도 북경이 점령당했다는 사실은 곧 서양의 무력이 조선에도 닥쳐와 공격을 시작할 것이고, 이어서 이윤축적을 위한 불평등통상조약의 체결이 강요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조선왕조와 한국민족이 만일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에는 열강의 강대한 침략의 힘에 의해서 나라가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떨어지게 되는 ‘민족적 위기’를 바로 맞게 되었음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조선왕조의 전근대 사회체제는 안으로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양반관료들은 자기들이 제정한 국가의 법률과 제도도 준수하지 않고 농민들에 대한 가렴주구를 강화하여 이른바 ‘三政의 문란’이 극도에 달해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농민들과 양인·천민의 하위신분층은 가렴주구 폐지와 양반신분제도 폐지를 요구하면서,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연이어 ‘민란’까지 일으켰다. 예컨대, 1811년 ‘홍경래란’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하여 그후 해마다 끊임없이 대소 규모의 ‘민란’이 일어나서 조선왕조의 북부지방에 대한 통치가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또한 예컨대, 1862년에는 ‘진주민란’을 비롯하여 전국 30여 개 군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선왕조의 남부지방에 대한 통치가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는 가히 ‘민란의 세기’067)愼鏞廈,<1894년의 社會身分制의 폐지>(≪奎章閣≫9, 서울大, 1985;≪韓國近代社會史硏究≫, 一志社, 1987, 99쪽).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민란들이 일어나면서 양반신분 사회체제의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다.

 만일 조선 조정과 한국민족이 내부에서 나온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양반신분사회 개혁 요구를 흡수하여 실현하지 못할 때에는 서양 열강의 도전 앞에서 민족공동체가 분열될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다. 조선왕조의 전근대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의하여 조성된 이 위기는 한국민족이 18세기 중엽에 맞은 전근대사회의 ‘체제적 위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18세기 중엽에 한국민족은 이러한 ‘민족적 위기’와 전근대사회의 ‘체제적 위기’를 중첩하여 맞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민족은 자기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면서 세계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 대등하게 공존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족적 위기’와 ‘체제적 위기’를 동시에 중첩하여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19세기 중엽 조선왕조 사회에서 선각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민족적 위기’와 ‘체제적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서양 열강의 침투 압력 속에서도 이러한 중첩된 위기를 타개하고 도전해 오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상들이 형성되었다. 그 대표적인 3대 사상이 널리 아는 바와 같이 ① 개화사상, ② 동학사상, ③ 위정척사사상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