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1. 개화사상의 형성
  • 4) 최초의 개화사상

4) 최초의 개화사상

 그러면 오경석·유홍기·박규수 등 개화사상의 비조들이 당시에 형성했던 최초의 개화사상의 내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개화사상의 3비조가 모두 충분한 개화사상 관련 문헌을 남기지 않아서 그 내용을 정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유홍기는 그후 개화활동은 많이 했지만 글을 남긴 것이 없고, 박규수는 글을 많이 남겼으나 개화에 관련된 글이 아니라 대부분 그 이전의 국정에 관련된 글 뿐이다. 비교적 개화 관련 글을 많이 남긴 오경석의 경우도 단편적인 글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난점을 전제로 하고 오경석의 개화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최초 형성기의 3비조의 개화사상 내용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조선왕국과 조선민족이 심각한 大危機에 직면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위기는 일차적으로 서양 열강의 동양 침입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중국은 서양 열강의 침입을 받고 그들의 角逐場이 되어 지금 붕괴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 그칠 일이 아니고 입술과 이의 관계에 있는 조선에도 곧 불어닥칠 위기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매우 큰 민족적 위기로 생각하여, ‘앞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비극이 일어날 것’098)≪金玉均傳≫上卷, 49쪽.이며, ‘자기 나라의 형세가 風前의 燈火처럼 위태하다’099)위와 같음.고 생각하였다.

 둘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이러한 민족적 대위기 속에서 조선의 정치는 부패해 있고, 조선의 사회와 경제는 세계대세에 매우 낙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自國정치의 부패와 세계대세에 失脚되고 있음’100)위와 같음.을 깨달은 것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부패하고 세계대세에서 매우 뒤떨어진 당시의 조선왕조의 정치와 사회체제로서는 이러한 민족적 대위기를 타개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판단하였다.

 셋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이러한 민족적 대위기를 타개하려면 나라의 ‘一大革新’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101)위와 같음.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여기서 말한 ‘일대혁신’은 조선왕조의 부분적인 소개혁이 아니라 국가정법 전반에 걸친 ‘대개혁’을 가리킨 것이었으며, 사회체제 전반의 大更張改革을 의미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개화사상은 조선의 민족적 위기를 중국에 의뢰하여 타개하려고 생각하는 사상이나, 또는 조선왕조의 전근대적 기존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려는 위정척사사상과는 정면으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상이었다.102)金允植,≪續陰晴史≫하, 고종 28년(1891) 2월 17일, 157쪽 참조.

 넷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나라를 구하는 ‘일대개혁’은 반드시 자주적으로 단행되어야 하고,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붕괴되어 가는 중국에 조금이라도 의뢰해서는 실현 불가능하며, 조선이 완전히 자주적으로 조선사람의 힘에 의하여 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 조정의 대관들이 중국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을 개탄했다. 서양 열강이 중국을 다투어 침략하고 약탈하는 것을 생생하게 견문하고 읽은 그들은 외국에 조금이라도 의존하는 것은 침략의 뜻을 가진 자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의존하는 위험한 것이라고 보고 자주독립하여 자기의 힘으로 대혁신을 단행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다섯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나라의 일대 혁신을 일으키려면 새로운 ‘혁신적 정치세력’을 형성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가리킨 이 혁신적 정치세력은 곧 開化派 또는 開化黨의 형성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패하지 않고 세계대세의 변화를 잘 알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개화혁신세력’이 형성되어 정권을 주도하면서 온 나라에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103)≪金玉均傳≫상, 49쪽.

 여섯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조선도 세계대세에 보조를 같이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자기 나라가 ‘세계대세에 失脚되고 있다’고 개탄한 것은 기본적으로 기계기술문명과 자본주의세계에서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으며, 조선이 세계대세에 보조를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조선도 근대국가와 과학기술문명과 자본주의 시민사회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시사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곱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조선도 서양과 같이 철과 석탄을 이용하는 공장제도의 기계이용 생산방식을 도입해서 공업과 산업을 일으켜야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오경석은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오경석은 강화도조약 때 문정관으로 일본 군함에 승선하여 일본 외교관들에게 “우리 나라도 철과 석탄의 채굴법을 알게 되면 나라는 반드시 부강하게 된다”104)≪日本外交文書≫第9卷, 文書番號 6, 1876년 1월 30일,<黑田辨理大臣一行, 江華府前往二關スル件>, 38쪽.고 말하였다. 그들은 서양 열강이 철과 석탄을 사용하면서 산업혁명을 수행하여 증기기관과 공장제도로 생산하기 때문에 부강해졌음을 알고 있었으며, 조선도 철과 석탄을 채굴하고 서양과 같이 그에 기초하여 기계로 생산하는 공장을 세우고 공업과 산업을 일으키면 반드시 부강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여덟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서양의 과학기술의 선진성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조선도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채용해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감탄하여 예민하게 이에 반응하였다. 오경석이 북경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서양의 과학기술서인≪揚水機製造法≫이라는 책을 필사해 온 것이든지, 철과 석탄의 이용을 강조한 것은 그가 얼마나 서양의 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에 열의를 가졌었는가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105)吳慶錫이 鐵과 石炭을 이용하고 火輪船·蒸氣船을 구비할 것을 말한 것은 모두 서양의 先進科學技術을 배우고 채용해야 나라를 부강케 할 수 있다는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 후 일본 외교관과의 담화 중에 일본의 電信 상태를 물어보고 전신기가 전국을 종횡하는 망을 이루었다는 대답을 듣자, “그렇게 해야만 인간이 살만한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106)≪日本外交文書≫第9卷, 文書番號 6, 1876년 1월 30일,<黑田辨理大臣一行, 江華府前往二關スル件>, 37쪽.고 그의 과학기술에 대한 일찍부터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또한 박규수가 1866년 제너널셔먼호를 격침시킨 후 그 증기기관과 기계들을 서울 한강으로 보내어 증기선 제조실험을 하도록 한 것도 그의 서양 과학기술 채용에 관한 열의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107)朴齊炯,≪近世朝鮮政鑑≫, 26∼27쪽 참조.

 아홉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조선의 양반신분제도를 폐지해야 하며, 나라 안의 각계각층의 능력있는 인재를 모두 관직에 채용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오경석과 유홍기는 중인출신으로서 무능한 양반들에게 신분차별을 받으며 생활해 오는 동안 양반신분제도의 폐해와 불합리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절감한 선각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양반신분제도의 폐지가 쉬운 일이 아니며 당장은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시급하게 개화혁신세력을 형성하여 개화정책을 실행하려면 서울 북촌의 양반 자제들을 발탁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하는 것이 지름길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폐해 많고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될 양반신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사상을 확고히 가졌음은 그들의 모든 행적에 명료하게 들어나는 것이다.

 또한 박규수는 중인출신이 아니고 고위 양반신분 출신이었지만, 그의 조부 연암 박지원의 실학을 계승하여 양반신분제도를 비판하고 평등사상을 주창하고 또 교육하였다.108)李光洙,<朴泳孝씨를 만난 이야기>≪東光≫1931년 3월호 참조.

 열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조선도 군함을 구비하고 국방을 근대적으로 혁신하여 튼튼히 해서 나라를 자기의 힘으로 방위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박규수는 ‘제너널셔먼호사건’ 때 조선도 증기기관을 설치한 군함을 제조해서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증기병선 실험을 제의했으며, 關西海防策을 건의하였다.109)原田環,<朴珪壽と洋擾>(≪旗田敎授古稀紀念朝鮮史論集≫, 1979) 참조. 오경석은 ‘병인양요’ 때 중국에서 외교활동을 하면서 프랑스 동양함대의 무력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본국에 보고했으며,110)吳慶錫,≪洋擾記錄≫, 4∼10쪽 참조. 그후 강화도조약 직전에 일본 군함에 승선하여 일본 외교관들에게 “우리 나라가 火輪船을 구비하게 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언제 이것을 보는 날이 될까”111)≪日本外交文書≫第9卷, 文書番號 6, 1876년 1월 30일,<黑田辨理大臣一行, 江華府前往二關スル件>, 37쪽.하고 군함의 구비를 희구하였다. 여기서의 화륜선은 군함을 가리켰던 것으로서 오경석은 군함을 구비한 근대적 국방체제를 만들어 나라를 자기의 힘으로 지키고자 한 열망을 나타낸 것이었다.112)吳慶錫의 軍艦을 구비한 근대적 국방에 대한 열망은 그가 편집한≪洋擾記錄≫전책에 충만하여 있다.

 열한번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조선이 종래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자주적 개국·개항을 단행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대원군과 위정척사파의 쇄국정책으로는 궁극적으로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조선도 자주적으로 개국하여 세계각국과 통상도 하고 문물도 교환하면서 서양의 선진문물은 필요한 것을 채용해야 나라를 부강하게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박규수는 조선이 개항하여 서양과 통상하면 서양 문물이 들어와 조선을 금수의 지역으로 만든다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서양과 교류하면 동양의 종교와 문화를 서양에 내보내어 그들을 교화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개화사상의 3비조는 외국의 위협과 침략에 의한 개항·개국은 단호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박규수는 1866년 7월 미국상선 제너널셔먼호를 대동강에 격침시켰었다. 또한 오경석도 이 때문에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 동양함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헌신적 외교활동을 전개했었다.113)吳慶錫,≪洋擾記錄≫, 38∼44쪽 참조. 오경석은 그후 1871년에 미국 군함이 ‘대통령국서’를 갖고 수교를 요청했을 때 대원군에게 이 기회에 ‘개항’을 하자고 건의했으며, ‘개항가’로 지목받았다.114)≪日本外交文書≫第9卷, 文書番號 6, 1876년 1월 30일條<黑田辨理大臣一行, 江華府前往二關スル件>, 33쪽. 그러나 미국이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무력행사를 자행하여 ‘신미양요’를 일으키자 이에 단호히 대결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한 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개화사상의 3비조가 생각한 개항·개국은 조선이 준비와 실력을 갖추고 조선의 필요에 의해 단행하는 ‘자주적’ 개항·개국이었다.115)吳慶錫은 朴齊家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開國論者가 되었으나 그의 개국은 조선이 자주적 주도권을 갖고 조선의 이익과 부강을 위한 방법으로서 실행하는 자주적 개국을 가리킨 것이었다.

 열두번째, 개화사상의 3비조는 외국과의 통상을 하되 조선이 손실을 입지 않는 통상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오경석은 중국이 외국과의 통상을 잘못하여 나라 경제가 빈약해지는 것을 견문하고, 조선은 물품과 물품의 균형무역을 해야 하며, 조선의 金銀과 외국의 물품을 교역하여 조선의 금은을 외국에 누출시키거나 조선이 수출보다 수입을 많이 하여 무역적자의 손실을 입어서 그 댓가로 금은을 외국에 내보내서는 나라 경제가 메마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116)吳慶錫,≪洋擾記錄≫, 45쪽. 개화사상의 비조들은 대외통상이 반드시 조선을 부강케 하는 방법으로서만 실행되어야 그 통상이 나라를 부강케 하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자료가 부족하여 개화사상의 3비조의 형성기 개화사상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여기까지만 보아도 19세기 중엽 조성된 민족적 위기와 체제적 위기를 타개하는 사상으로서의 개화사상은 같은 시기 동학사상이나 위정척사사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개화사상의 3비조의 형성기 개화사상은 아직 초기의 첫 개화사상이어서 1880년대의 개화사상과 같이 발전된 것은 아니었고, 또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미 상식화된 것일지 모르지만, 당시 전근대적 구체제를 강화하여 과제에 대응하려던 완고한 위정척사사상이 국론으로서 전국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던 1860년대의 상황에서는 위와 같은 개화사상은 참으로 획기적인 새로운 사상이었다.

 1866년 9월 ‘병인양요’의 큰 충격을 받은 직후 오경석과 유홍기는 개화혁신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서울 북촌의 영민한 양반 자제들을 선발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해서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기로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화사상의 3비조 중에서 오경석·유홍기의 노력만으로는 북촌의 영민한 양반 자제들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중인신분 출신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위 양반출신의 영민한 자제들을 불러모아 교육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경석·유홍기에게는 박규수의 도움과 역할이 절실한 것이었으나, 1866년 당시 박규수는 평안도관찰사로 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합류할 수 없었다.

 박규수가 藝文閣提學의 새 직책을 발령받은 것은 3년 후인 1869년 4월 3일(양력 5월 14일)이었다.117)≪日省錄≫, 고종 6년 4월 초3일.
≪高宗實錄≫권 6, 고종 6년 4월 초3일.
박규수는 상경하자 바로 4월 23일(양력 6월 3일)자로 漢城判尹에 임명되었고,118)≪承政院日記≫, 고종 6년 4월 23일.
≪高宗實錄≫권 6, 고종 6년 4월 23일.
뒤이어 6월 15일(양력 7월 22일)자로 刑曹判書에 겸무로 임명되었다.119)≪日省錄≫, 고종 6년 6월 15일.
≪高宗實錄≫, 고종 6년 6월 15일.
박규수의 집은 바로 서울 북촌의 재동에 있었다.120)≪高宗實錄≫권11, 고종 11년 3월 초5일.
文一平,<名相朴珪壽의 옛터>(≪湖岩全集≫제3권), 266∼268쪽 참조.
한편 오경석은 조선정부가 파견하는 사절단(정사 李承輔)의 통역관으로 1869년 8월에 북경으로 출발하여 12월에 귀국하였다.121)≪高宗實錄≫권 6, 고종 6년 7월 29일. 그러므로 박규수가 평안도관찰사의 임무를 끝내고 상경한 후 오경석·유홍기 등과 합류한 것은 1869년 4∼8월 사이와 12월의 두 기간이 있었다.

 오경석·유홍기·박규수 등 개화사상의 3비조는 결국 서울에서 1869년에 완전히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박규수는 오경석·유홍기가 이미 합의한 방책대로 북촌의 양반자제들 중에서 가장 영민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1869년 후반∼1870년 초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金允植·朴泳敎·金玉均·洪英植·朴泳孝·徐光範·兪吉濬·金弘集 등이 그 대표적인 청년들이었다. 김윤식은 다음과 같이 썼다.

처음에 古愚(김옥균)는 瓛齋(박규수)선생 문하에서 배워 宇內의 대세를 대개 깨닫고 동지들과 더불어 國事를 근심하고 개탄했다(金允植,≪續陰晴史≫下卷, 577쪽).

 박영효는 개화사상이라는 신사상을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친우들과 함께 배웠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 新思想은 내 일가 朴珪壽 집 사랑에서 나왔소. 金玉均·洪英植·徐光範 그리고 내 백형(朴泳孝를 가리킴)하고 齋洞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李光洙,<朴泳孝氏를 만난 이야기>,≪東光≫2, 1931년 3월호).

 그리하여 1853∼1860년대에 오경석·유홍기·박규수의 3비조에 의하여 형성된 한국의 개화사상은 마침내 1869년 후반∼1870년 초부터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선발하여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제2세대에 대한 개화사상의 교육을 시작하면서 나라를 구할 준비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122)愼鏞廈,<金玉均의 開化思想>(≪東方學志≫제46·47·48집, 1985;≪韓國近代社會思想史硏究≫, 一志社, 1987) 참조.

<愼鏞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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