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2. 동학의 창도와 동학사상
  • 1) 동학 창도의 배경

1) 동학 창도의 배경

 동학 창도의 배경은 큰 구조에 있어서 개화사상 형성의 배경과 같고 작은 인식문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동학도 19세기 중엽에 조성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구국 사상의 하나로 창도된 것이었다.123)동학사상에 대한 대표적 글들은 다음과 같다.
金龍德,<東學思想硏究>(≪中央大論文集≫9, 1964).
金義煥,<初期東學思想에 관한 硏究>(≪우리나라 近代史論考≫, 1964).
韓㳓劤,<東學사상의 本質>(≪東方學志≫10, 1969).
崔東熙,<東學사상의 調査硏究>(≪亞細亞硏究≫12-3, 1969).
申一澈,<崔水雲의 歷史意識>(≪韓國思想≫12, 1974).
金敬宰,<崔水雲의 神개념>(≪韓國思想≫12, 1974).
趙鏞一,<近菴에서 찾아본 水雲의 思想的 系譜>(≪韓國思想≫12, 1974).
李炫熙,<東學思想의 배경과 그 意識의 성장>(≪韓國思想≫18, 1981).
朴容玉,<東學의 男女平等思想>(≪歷史學報≫91, 1981).
鄭鎭午,<東學의 政治思想>(≪濟州大論文集≫20, 1985).
表暎三,<水雲大禪師의 生涯>(≪韓國思想≫20, 1985).
愼鏞廈,<東學의 社會思想>(≪韓國近代社會思想史硏究≫, 一志社, 1987).
朴明圭,<東學思想의 종교적 전승과 사회운동>(≪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韓國社會史學會論文集 7, 1987).
申福龍,<東學의 集團化過程과 甲午農民革命의 思想的 展開>(≪朝鮮朝 政治思想硏究≫, 평민사, 1987).
趙惠仁,<東學과 朱子學-유교적 종교개혁의 맥락>(≪한국의 사회조직과 종교사상≫韓國社會史學會論文集 17, 문학과지성사, 1990).
朴孟洙,<東學革命에 있어서 東學의 役割>(≪韓國思想≫22, 1995).

 1860년 水雲 崔濟愚(1824∼1864)에 의하여 동학이 창도된 배경으로서 먼저 들어야 할 것은 서양세력과 西學의 조선 침투로 말미암아 조성된 민족적 위기의 상황이다.

 19세기에 들어오자 ‘異樣船’이라고 불리운 서양의 증기선들이 조선 연안에 해마다 출몰하여 서양 열강의 조선침입이 임박하고 있음을 보인 환경 속에서 서학의 조선에서의 포교도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831년에는 천주교의 조선교구가 독립되어 제1대 교구장이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에 오지 못하고 죽었지만, 제2대 교구장 앙베르(Mgr. Imbert)는 1838년 1월 극비리에 서울에 잠입하여 본격적으로 조직적 포교를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에서의 천주교의 세력은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여 1839년 초에는 천주교도의 숫자가 이미 약 9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조선조정은 서학(천주교)의 침투와 그 급속한 세력증가에 위협을 느껴, ‘衛正斥邪’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1839년 다시 천주교 탄압을 재개해서 서양인 신부 3명과 다수의 천주교도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이른바 ‘己亥邪獄’이 이것이다. 조선왕조 정부는 그 이후에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다가, 1846년에는 다시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여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金大建과 8명의 남녀 교도가 처형되었다.

 그러나 양반관료들의 학정과 차별 속에서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는 백성들과 부녀들 사이에서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서학(천주교)에 입교하여 정신적 구원과 안정을 얻으려는 추세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850년대에는 조선에서 천주교도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서양세력과 서학의 위협이 保國의 문제까지 거론되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알려주었다. 1840∼1842년의 ‘아편전쟁’에서의 청국의 패전으로 인한 1842년의 南京條約, 1850년의 洪秀全의 太平天國 혁명운동, 1856년의 ‘애로우(Arrow)호 사건’과 그로 인한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廣東 점령과 天津 공격의 소식은 조선에도 알려졌다. 중국은 이 서양의 무력 공격에 굴복하여 1858년에 天津條約을 체결해서 천진을 비롯한 10개 항구의 서양 열강에의 개항과 양자강의 서양 상선에서 개방을 약속하였다.

 중국 조정이 천진조약의 비준과 실행을 지연시키려고 하자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다시 무력 공격을 시작하여 1860년 7월에는 천진을 점령하고, 이어서 8월에는 청국의 수도 北京을 점령하여 버렸다. 청국 황제는 황급히 熱河로 피난을 가고, 청국은 결국 서양 열강의 무력침략 앞에 완전히 굴복하여 1860년 9월에 굴욕적인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서양 열강의 요구를 다 들어준 후 그들을 수도 북경에서 철수시켰다.

 북경조약의 내용에는 천진의 개항, 구룡반도의 할양, 배상금 1,600만 달러의 지불, 서양인에 의한 중국인 노동자의 모집과 해외 송출 허용 이외에, 무엇보다도 서양인들에게 천주교(서학) 포교의 완전한 자유와 교회당 설립 자유의 허용 및 서양 신부들의 토지·가옥의 건조 또는 임대차 자유의 허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양 열강은 북경조약의 체결을 통하여 중국에서의 천주교 포교의 완전한 자유를 획득한 것이었다.

 조선의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동양의 최강국이라고 믿어 왔던 중국이 서양의 무력침략 앞에서 완전히 굴욕적으로 굴복하여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대한 충격을 받았으며, 조선의 안전에 대한 커다란 위기의식을 절감하게 되었다.

 최제우는 그의 동학의 창도와 포교의 시작이 서양 열강의 동양과 중국 침략으로 말미암은 위기의식과 관련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스스로 기록하였다.

庚申(1860)년에 이르러 전하여 들으니 서양 사람들은 天主의 뜻이라고 하여 부귀를 취하지 않고 천하(중국)를 공격하여 취해서 (서학의) 敎堂을 세우고 그 道(서학의 도)를 행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또한 ‘그럴 수 있을까, 어찌 그럴까’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러다가 뜻밖에 경신년 4월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리기 시작하여, 무슨 병인지 병의 증세를 알 수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디선가 갑자기 仙語가 문득 귀에 들려왔다(<布德文>,≪東經大全≫).

 여기서 명백한 것은 최제우의 동학의 창도가 1860년 전후의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및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과 그에 따른 북경조약에 의거한 서학(천주교)의 중국에서의 자유로운 포교의 허용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최제우는 서양 열강의 중국에 대한 무력침략과 북경점령 사건에서 중국의 멸망뿐만 아니라 자기의 조국인 조선이 당면한 심각한 위기를 절감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서양 열강의 동양 침입으로 말미암아 조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민족적 위기를 그 나름의 관점에서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최제우는 민족적 위기에 대한 그 자신의 위기의식을 스스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서양은 전쟁을 하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천하(중국)가 모두 멸망하면 또한(우리 나라도) 입술이 없어지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이니 輔國安民의 계책을 장차 어떻게 낼까(<布德文>,≪東經大全≫).

 최제우는 여기서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는 동양식 표현을 빌어 중국을 입술, 조선을 이에 비유하면서, 서양 열강이 중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여 막강한 힘으로 침입해 오고 있으니, 입술인 중국이 망할 경우 조선이 심각한 위기와 위험에 놓이게 됨을 지적하고 ‘輔國安民의 계책’으로서 동학의 창도를 추구했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최제우는 그의 저작<論學文>에서도 서양 세력의 동양 침입에 의한 민족적 위기의식을 다음과 같이 거듭 강조하여 기록하였다.

저 庚申(1860)년 4월에 이르러 천하가 혼란하고 민심이 효박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할 즈음에, 또한 괴이한 말이 세간에 요란하게 퍼져 이르기를 ‘서양 사람들은 道를 이루고 德을 세워 그 造化가 미치는 곳에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고, 무기로 공격하여 전투를 함에 그 앞에 맞설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중국이 멸망하면(우리 나라도) 어찌 입술이 없어지는 근심이 없겠는가.

이는 딴 연고가 아니라, 이 사람들(서양인)은 道가 西道라고 칭하고 學은 天主라고 칭하며 敎는 聖敎라고 하니, 이것은 天時를 알고, 天命을 받은 것이나 아닐까 하는 말도 있었다.

이러한 말들을 낱낱이 들려면 끝이 없는지라, 나도 또한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하여 밖으로 靈氣가 몸에 접하고 안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이 내리는데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았다(<論學文>,≪東經大全≫).

 최제우가 쓴 위의 세개의 글에서 보면, 우선 최제우는 중국을 멸망시키고 있는 서양의 힘을 두개의 차원에서 보았는바, 그 하나는 道(西道)·學(天主學)·敎(聖敎) 등 서학의 힘과, 다른 하나는 武器·戰爭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서양의 武力이었다. 최제우는 이 두개의 차원의 서양의 힘을 모두 관찰하면서도 특히 ‘서학의 힘’을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최제우는 西學이 서양의 힘의 근원적 원천이며 서양의 무력도 궁극적으로는 이에 기초하여 유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최제우는 서양의 서학의 힘이 서양의 무력을 매개수단으로 하여 중국을 멸망시키게 되면, 그 다음에는 서학의 힘이 조선에 들어와 입술을 잃어버린 조선을 멸망시키게 되지 않을까 매우 두려워하여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것이었다.

 최제우는 서학이 天時를 알고 天命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서학의 창도자’보다 뒤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하면서, 서학의 침입에 대한 대결의식에 지배되어 ‘보국안민의 계책’의 하나로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東學을 창도한 것이었다.

 다음, 동학 창도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들어야 할 것은 조선왕조 전근대사회의 해체과정에 수반하는 ‘체제적 위기’의 상황들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조선왕조의 전근대 신분사회는 급속한 해체과정이 진행되어 도처에서 말기적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통치계층인 양반관료들은 그들 자신이 제정한 법률과 제도를 스스로 위반하고, ‘三政의 문란’이라고 통칭되고 있는 바와 같이, 농민들에 대한 가렴주구를 기탄없이 자행하여 백성들을 더욱 도탄에 빠트렸다.

 양반관료들의 절제없는 가렴주구와 학대에 견디지 못한 하위신분층과 농민들은 이에 대해 ‘민란’으로 맞섰기 때문에, 19세기는 전국 도처에서 ‘민란’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조선왕조의 통치질서를 근저에서부터 붕괴시켜 나갔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는 양반관료들이 정립한 전근대의 도덕이나 윤리는 하위신분층 사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양반신분층 자신들 사이에서도 잘 준행되지 않고 무시되어 도덕적 타락이 만연하였다. 이 위에 19세기 초엽에는 콜레라 전염병까지 유행하여 조선왕조의 체제적 위기를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최제우는 이러한 조선왕조 전근대사회의 체제적 위기 상황을 관찰하고, 조선왕조 4백년은 이미 時運이 다해 이제 막 종언을 고하려는 말세에 이르렀으며, 그 속에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삼각산 한양도읍 4백년 지난 후에 下元甲 이 세상에 남겨간 자식 없이 …(<夢中老小問答歌>,≪龍潭遺詞≫).

우리 나라는 惡疾이 온 세상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사시사철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 역시 傷害의 운수이다(<布德文>,≪東經大全≫).

一世上 저 인물이 도탄중 아닐런가(<勸學歌>,≪龍潭遺詞≫).

 최제우는 조선왕조사회의 지배신분인 양반들이 백성을 억압하고 학대하면서 ‘君子’를 말하고 ‘도덕’을 논의하는 것 자체를 우수운 일이라고 부정하였다. 그는 조선왕조의 온 세상이 ‘말세’가 되어 온 세상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각자 딴 마음을 품어 天理에 따르지 않고 天命을 돌아보지 않는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다고 관찰하였다.

우습다. 저 사람은 地閥이 무엇이게 君子를 비유하며, 文筆이 무엇이게 道德을 의론하뇨(<道德歌>,≪龍潭遺詞≫).

이 근래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딴 마음을 품어 天理를 따르지 아니하고 天命을 돌아보지 아니할 새, 나도 항상 두려워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布德文>,≪東經大全≫).

 최제우는 당시 조선왕조사회의 부패와 타락과 혼돈에 대하여, “아서라 이 세상은 堯舜之治라도 부족이오 孔孟之德이다”124)<夢中老小問答歌>,≪龍潭遺詞≫. 라고 개탄하였다.

 최제우의 동학 창도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들어야 할 것은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상과 종교를 잃고 방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종교, 새로운 도덕이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제우는 종래의 학문과 종교인 유교와 불교는 이미 시운이 다하여 낡고 병들어서 생동력과 생명력을 상실하여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학문과 종교가 될 수 없다고 관찰하였다.

儒道 佛道 累千年에 運이 역시 다했던가(<敎訓歌>,≪龍潭遺詞≫).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딴 마음을 품어 천리에 순하지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니(<布德文>,≪東經大全≫).

 최제우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은 백성들에게 西學은 위험한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최제우는 서학을 서양 열강의 동양침입을 인도하는 종교적 힘이며 첨병이고 서양세력의 힘의 원천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당시 조선의 일부 백성들이 정신적 지주를 구하여 서학에 들어가는 것을 백성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최제우는 이러한 배경 위에서 결국 保國安民하고 廣濟蒼生하는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창도할 필요를 절감하고, 스스로 이 새 사상과 종교의 창도를 자기의 사명으로 삼아 東學을 창도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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