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2. 동학의 창도와 동학사상
  • 2) 동학의 창도 과정

2) 동학의 창도 과정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1824년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 견곡면 柯亭里에서 몰락한 양반의 庶子로 출생하였다. 최제우의 가문은 조선 초기에는 지방향리이었다가, 최제우의, 7대조인 崔震立(1568∼1636)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에 참가해서 공을 세우고 1594년에 武科에 합격하여 武班으로 상승하였다. 최진립은 매우 애국적인 인물로서,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국왕이 청군에 의해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왕을 구하려 북상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청군을 만나 전투중 전사하였다. 호란 후에 국왕은 그에게 병조판서를 추서하고 貞武公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후 이 집안은 文班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였다. 최제우의 아버지 崔鋈(1762∼1840)은 뛰어난 유생으로서 과거에 5, 6차례나 응시했으나 번번히 낙방하였다. 최옥은 두번째 부인에서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세번째로 이웃의 과부 韓씨를 맞아들여 63세에 마침내 아들 하나를 얻은 것이 최제우였다.125)≪慶州崔氏大同譜≫권 1·4.
李敦化編,≪道敎創建史≫.
吳知泳,≪東學史≫(永昌書館, 1940).
崔東熙,<水雲의 基本思想과 그 狀況>(≪韓國思想≫12, 1973).

 최제우는 8세부터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재능이 매우 탁월하여 수많은 고전들을 일찍 독파했으나, 10여 세를 지내자마자 그의 사회적 신분이 차별받는 서자임을 알고 사회신분제도의 모순을 개탄하기 시작하였다. 최제우 스스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8세에 입학해서 허다한 萬卷詩書 無不通知 하여내니 生而知之 방불하다. 10세를 지내나니 총명은 司曠이오 智局이 비범하고 才器 過人하니 평생에 하는 근심 효박한 이 세상에 君不君 臣不臣과 父不父 子不子를 주야간에 탄식하니 우울한 그 회포는 흉중에 가득하되 아는 사람 전혀 없다(<夢中老小問答歌>,≪龍潭遺詞≫).

 당시의 사회제도와 관습은 서얼차별제도로 말미암아 서자들을 사회적·법제적으로 극심하게 차별하였다. 서자들은 아무리 재주가 비범하고 실력이 있어도 과거에 응시할 자격부터 박탈당하였다. 최제우가 10여 세를 지내자, 자기가 이 사회에서는 버림받은 서자출신이며 아무리 재주가 천재이고 공부가 탁월해도 과거에는 응시할 자격조차 없으며 사회적 제도적으로 완전히 버림받은 신분임을 알았을 때, 그의 남모르는 절망과 탄식과 울분이 어떠했었는가는 그 자신이 기록 그대로이다.

 최제우의 아버지는 불우한 최제우를 위하여 13세 때에 울산의 박씨에게 결혼시켰다. 최제우는 일찍이 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또 17세 때에 아버지 최옥을 잃어 고아가 되었다. 부친의 3년상을 지내는 중 집에 화재가 일어나 부친의 서책들이 모두 소실당하였다. 최제우는 부친의 3년상을 마치자마자 부인을 처가에 맡기고, 새로운 활로를 열어보려고 집을 나와 전국 유랑의 길에 나섰다. 이 때가 최제우 나이 20세(1843) 때였다.

 최제우는 이 때부터 다시 부인에게 돌아간 31세(1854) 때까지 만 11년간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온갖 일과 공부를 다해가며 자기의 활로를 찾아보려고 탐색하였다. 최제우는 이 시기의 그의 행적에 대하여 百千萬事를 다해 보았으나 한 가지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기록하였다.126)<敎訓歌>,≪龍潭遺詞≫. 최제우가 11년간 전국을 방랑하면서 한 일들을 몇 가지 찾아보면, 처음에는 무술을 익히어 이따금 서자들에게 응시 기회가 열릴 수도 있는 武科에라도 응시해 볼까하고 활쏘기와 말달리기도 익혀 보았다.127)李敦化,≪天道敎創建史≫(제1편, 1933), 4쪽 참조. 시장에 나가 상업도 해 보았는데,128)吳知泳,≪東學史≫, 1쪽 참조. 포목상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술과 침 등 한의학도 공부해 보았다. 점치는 방법 등 잡술에도 손을 대 보았다. 도통을 하려고 仙敎(道敎) 공부를 하기도 하고, 전국의 유명한 道士를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전국의 유명한 사찰과 암자를 돌면서 高僧을 만나 불교의 진리를 깨쳐 보려고도 하였다. 그는 심지어 西學에 오묘한 진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西學(천주교)도 섭렵해 보았다.129)吳知泳,≪東學史≫, 2쪽 참조. 그러나 최제우는 고생만 하고 그 어느 것에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그 어느 곳에서도 활로를 찾지 못했고, 득도도 하지 못하였다. 그는 고향과 처자를 떠난지 11년만에 실의와 절망에 빠져 31세 때인 1854년 9월에 울산의 처가에 기대어 살고 있는 처자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최제우의 11년간의 전국 유랑은, 비록 득도는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1년간의 유랑을 통하여 당시의 조선왕조 사회의 실상과 백성들의 처지를 유감없이 체험하여 자기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정립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유랑생활의 결산에 대하여 스스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遍踏江山 아니하면 人心風俗 이런 줄을 아니 보고 어찌 알꼬. 대저 인간 百千萬事 보고 나니 恨이 없네(<勸學歌>,≪龍潭遺詞≫).

 최제우는 11년의 전국 유랑을 끝내고 귀가하면서 기존의 사상과 종교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바에는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여 保國安民, 廣濟蒼生할 수 있는 새로운 道를 자기 자신이 창도하려는 뜻을 세웠다. 그는 귀가 후 5년간 울산과 그 부근의 명산을 전전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사색하며 치성을 드렸다. 그러나 최제우는 득도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제우는 절망적 상태에서 36세 때인 1859년 10월에 처자를 이끌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130)<修德文>,≪東經大全≫. 그러나 그가 태어난 柯亭里의 팔아버린 집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가정리 남쪽 龜尾山 계곡에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지어놓고 책을 읽던 정자인 龍潭亭을 찾아가 거처를 정하였다. 부모가 남겨준 유산마저 모두 탕진하고 득도에도 성공하지 못한채 부모가 남겨놓은 정자에 초라하게 찾아와 몸을 기탁한 불효막심한 자신을 까막까치들도 조롱하는 둣 했다고 최제우는 스스로 기록하였다.131)<龍潭歌>,≪龍潭遺詞≫.

 최제우는 이 구미산 용담정에서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道를 깨치지 못하면 세상에 다시 나아가지 않을 굳은 결심을 한 다음, 이름을 본래의 ‘濟宣’에서 ‘濟愚’로 고쳤다.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를 ‘性黙’이라고 지었다.132)<敎訓歌>,≪龍潭遺詞≫. 그는 이곳에서 정결한 곳에 제단을 차려놓고 정성껏 기도를 드렸으며, 매일같이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득도를 위한 명상과 정신통일을 계속하였다. 그의 이러한 비장하고 처절한 求道의 노력으로 그의 몸은 쇠약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편에 들리는 소문은 안으로 조정의 정치가 더욱 어지러워지고, 밖으로 서양세력은 다시 중국을 침략하여 굴복시켜서 중국 수도 북경에 천주교회당을 높이 짓고 포교를 활발히 한다는 소식이었다.

 최제우에게 마침내 득도의 날이 왔다. 1860년 음력 4월 15일(양력 5월 25일), 최제우가 치성을 드리고 정신집중을 하는 중에 정신이 無我之境에 든 가운데 공중에서 천지가 진동할 때와 같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제우가 벌떡 일어나 물으니 대답이 들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 하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너를 택하여 하나님의 道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고 하면서 ‘東學’의 원리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최제우는 이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4월이라 초5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 (<安心歌>,≪龍潭遺詞≫).

뜻밖에도 庚申년(1860) 4월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리기 시작하여 무슨 병인지 병의 증세를 알 수 없고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디선가 갑자기 神仙의 말씀이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캐어 물어보았더니 하나님(上帝)이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上帝)이라 하니 너는 하나님(上帝)을 모르느냐’고 하였다.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나 역시 지금까지 功이 없으므로 너를 世間에 태어나게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 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내가 묻기를 ‘西道로써 사람을 가르쳐야 합니까’하니,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布德文>,≪東經大全≫).

 최제우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큰 소리로 들려왔으나, 아내와 아들 등 집안 사람들에게 물으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최제우는 이것을 보고 이것이 자기만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더욱 확신하였다.

 최제우는 나라를 보전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새로운 道를 찾으려고 몇년 동안을 밤마다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지극한 정성을 드리며 정신통일을 하여 명상과 사색을 거듭해 오다가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문득 靈感이 떠올라 새로운 道의 원리를 깨치고 희열에 넘쳐서 그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최제우는 결국 온갖 정신적 작업과 노력 끝에 종래의 유교·불교·도교(선교)를 종합 지양하고 음양오행설, 역학사상, 풍수지리설, 영부신앙 등 각종 동양사상을 흡수 지양해서 그 자신의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창도한 것이었다.

 최제우는 자신의 새로운 도를 창도하자, 그 이름을 ‘東學’, ‘天道’라고 명명하고, 문답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묻기를, 그렇다면 道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대답하기를, 天道이니라.

묻기를, 西洋의 道와 다름이 없습니까.

대답하기를, 서양의 學은 우리 道와 같은 듯 하나 다름이 있고 기도하는 것 같으면서 實이 없다. 그러나 運數인즉 같고, 道인즉 한가지로되, 理인즉 다르니라. …

묻기를, 道는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름을 ‘西學’이라고 합니까.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는 東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도를 받았으니 道는 비록 天道이나 學인즉 ‘東學’이다. 하물며 지구가 동과 서로 나뉘어 있는데 서를 어찌 동이라 하며 동을 어찌 서라 하리오.

孔子는 魯나라에서 태어나 鄒나라에서 도를 폈으므로 鄒魯의 風이 이 세상에 전하여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 道는 이 곳에서 받아 이 곳에서 펴고 있으니 어찌 西學이라고 이름하겠는가(<論學文>,≪東經大全≫).

 최제우의 위의 설명을 보면, 그가 창도한 동학과 서양의 서학은 道와 時運은 같고 學과 理만 다른데,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지역’과 ‘문화’이다. 그에 의하면 道는 ‘天道’로서 동일하다 할지라도 지구가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어져 있으니 ‘동학’과 ‘서학’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의 ‘東’은 ‘東洋’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최제우는 새로운 도의 창시자인 자신이 ‘東’에서 태어나서 ‘東’에서 도를 받았으니 學이 또한 ‘東學’이 된다고 하였다. 이 때의 東은 ‘東國’(朝鮮)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최제우의 설명에 의하면, 마치 공자가 魯나라에서 태어나 鄒나라에서 유학의 도를 폈기 때문에 공자의 유학에 鄒魯의 문화가 전하여 내려오는 것과 같이 최제우 자신은 이 땅 동국(조선)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도를 받아 이 땅(동국=조선)에서 도를 펴니 역시 ‘동학’이라고 하였다. 이 때의 東도 또한 동국(조선)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동학’은 두 개의 의미를 하나로 통합한 개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 하나는 ‘東學의 天道學’이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동국=조선의 천도학’이라는 의미이다. 동학의 ‘東’에는 ‘東洋’과 ‘東國’의 의미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최제우의 자기가 창시한 ‘동학’에 대한 자부심은 매우 커서 자기의 학문을 자주 孔子의 학문에 비유했으며, 자기의 동학을 이제도 듣지 못했고 예전에도 듣지 못했으며 이제도 비교할만한 것이 없고 예전에도 비교할만한 것이 없는133)<修德文>,≪東經大全≫. ‘만고에 없는 無極大道’134)<論學文>,≪東經大全≫.라고 스스로 표현하였다.

 최제우는 그의 ‘동학’을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소문이 퍼지자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과 농민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6개월 동안에 약 3천 명의 인사들이 최제우로부터 도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최제우는 이때의 첫 성공을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일에 비유하였다.135)<修德文>,≪東經大全≫.

 최제우의 첫 포교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동학을 天主敎=西學의 일종으로서 邪敎라고 모함하는 일이 증가하였다. 그는 동학을 서학이라고 몰아붙이는 세상 인심과 관헌의 핍박을 감당하기 어려워 1861년말부터 1862년까지 전라도 남원에 피란하였다. 최제우가 경주로 돌아온 후 1862년 9월에 경주관헌은 邪學을 퍼뜨려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최제우를 체포했으나, 수백 명 교도들이 경주 군아에 몰려가 집단항의를 했기 때문에 석방하였다.

 최제우는 교도들이 계속 물밀듯이 밀려오자 1862년 12월에 경주·영덕·영해·대구·청도·청하·연일·안동·단양·영양·신녕·고성·울산·장기 등지에 接所를 설치하고 接主를 두어 이른바 ‘接主制’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의 중앙조정에서는 동학세력의 급속한 성장에 큰 위협을 느끼고, 1863년 1월 중앙관리를 경주에 파견하여 최제우를 체포하였다. 처음에는 최제우를 서울에 데려다 처형할 계획이었다가 계획을 바꾸어 대구감영에 투옥시키고 1864년 2월 29일 참형을 결정하여 지시하였다. 대구감영은 1864년 3월 10일 최제우에게 참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자기가 창도한 東學에 순도하였다.

 최제우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참형을 맞으면서 경상관찰사를 훈계하여, “나의 하는바 道는 나의 私心이 아니오 天命이니 巡相은 그 뜻을 알라, 오늘날은 비록 순상이 나를 죽이나 순상의 손자대에 가서는 반드시 내 道를 따르고야 말리라”136)吳知泳,≪東學史≫, 18쪽.고 최후의 말을 남겼다. 최제우의 자기 ‘동학’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이 얼마나 확고부동했는가를 알 수 있다.

 최제우의 순교 이후 1864년부터 동학은 제2세 교주 崔時亨에 의하여 지도되고 포교되었다. 최시형은 관의 탄압을 피하여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산촌에 잠행하면서 비밀리에 포교하였다. 조선조정은 동학을 사학으로 규정하여 완전히 불법화하고 동학에 입도하는 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백성들은 정부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세력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동학은 당시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고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상으로 형성되어, 당시 백성들이 죽음을 무릅쓰면서도 입도하고 싶어하는 사상적 요소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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