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2. 동학의 창도와 동학사상
  • 3) 동학사상

3) 동학사상

 동학사상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강렬한 민족주의와 당시 백성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진 대외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동학의 서학과 서세에 대한 관점을 보면, 서양을 위정척사사상처럼 무조건 사학으로 보거나 奇技淫巧에 의존한 금수와 같은 세력으로 경멸하지 않고, 도리어 ‘道成德立하여 無事不成하고 전쟁과 전투에서도 無人在前하는’137)<論學文>,≪東經大全≫. 막강하고 두려운 세력으로 보았다. 또한 서학의 운수도 동학과 동일하게 융성하는 운이오, 道는 서학과 동학이 모두 ‘天道’라고 본 것은 동학이 가진 보편주의적 天道觀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자기 종교의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모든 종교들보다 훨씬 더 보편주의적 객관적 관점을 정립한 것이었으며, 위정척사처럼 서양문명을 금수·오랑캐의 문화라고 폄하하지 않고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을 대등하게 본 합리적 사고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서학은 천국을 지상에 건설하려 하지 않고 죽은 후에 건설하려 하고, 개인의 구원만 빌어 부모형제를 제사할 줄 모르며, 서세의 앞장 노릇을 하는 동학보다 부족한 종교라고 그는 지적하였다.

 한편 최제우 동학의 천국에 대한 관점은 과거 청의 ‘병자호란’ 침략에 대하여 “汗夷(만주 오랑캐)의 원수를 갚아보세”라고 하여 만주족의 침략사실에 대한 적의를 나타내었다.

대보단에 맹세하고 汗夷 원수 갚아보세. 重修한 汗夷碑閣 헐고나니 초개 같고 붓고 나니 박산일세(<安心歌>,≪龍潭遺詞≫).

 그러나 明·淸을 포함한 현실의 중원을 차지한 중국에 대해서는 이를 ‘입술과 이의 관계’로 파악하며, 서세와 서학의 침입으로 중국이 멸망해가는 추세에 대해서, 조선은 중국이라는 입술이 없어지는 근심에 직면했다고 설명하였다.138)위와 같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국과 조선을 ‘입술과 이의 관계’로 파악하면서도 ‘조선을 이’, ‘중국을 입술’에 비유하여 언제나 조선중심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최제우 동학의 일본에 대한 관점은 과거의 침략에 매우 강력한 적개심을 나타내었으며, ‘개같은 왜적놈’이라고 표현하였다.

기험하다. 기험하다 아국운수 기험하다. 개 같은 왜적놈아 너의 신명 돌아보라. 너희 역시 하륙해서 무슨 은덕 있었던고(<安心歌>,≪龍潭遺詞≫).

내나라 무슨 운수 그다지 기험할고, 거룩한 내집부녀 자세 보고 안심하소. 개 같은 왜적놈이 전세 壬辰 왔다 가서 술싼 일 못했다고 쇠술로 안먹는 줄, 세상사람 누가 알고 그 역시 원수로다(<安心歌>,≪龍潭遺詞≫).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최제우는 만일 미래에 일본의 재침략이 있을 경우에는 그가 죽은 후에 영혼이 되어서도 이를 멸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또한 神仙되어 飛上天한다 해도, 개 같은 왜적놈을 하나님께 造化받아 一夜에 滅하고서 傳之無窮하여 놓고(<安心歌>,≪龍潭遺詞≫).

 최제우가 만일 그가 죽은 후에 일본이 재침략하는 일이 있으면 영혼이 되어서라도 이 ‘개같은 왜적놈’을 하룻밤 사이에 멸하겠다고 굳은 결의를≪龍潭遺詞≫의<安心歌>로 노래하여, 그후 모든 동학도들이 이 노래를 찬송가처럼 복창했으니, 동학이 얼마나 일본의 재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졌었는가를 알 수 있다.

 동학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는 한사코 이를 싸워 물리치려는 강력한 저항민족주의를 정립하여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의 민족주의를 더욱 근대적으로 만들어 하위신분층과 농민층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게 한 것은 그 평등사상과 휴머니즘(인본주의)이었다.

 동학사상은 우주와 만물이 모두 ‘至氣’로 구성되었다는 ‘至氣一元’論을 주창하면서 ‘天一合一’論을 도출하고 ‘侍天主’사상을 정립하여 매우 독창적인 구조의 평등사상과 휴머니즘을 만들어 냄으로써 사회신분제도의 폐지와 인간다운 대우를 갈망하는 농민층의 요구에 잘 부응하였다. 즉 최제우는 동양의 전통적인 ‘天一合一’사상에서 종래에는 ‘天’에 무게와 중심을 두었던 것을 그는 이를 역전시켜 ‘人’에 무게와 중심을 둠으로써 ‘人’이 모두 마음 속에 ‘天’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사상을 만들었다. 동학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데, 이 하나님은 신분·계급·남녀·노소·빈부에 젼혀 차별없이 모두 똑같은 하나님이며, 모든 사람들이 바로 동일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동학의 새로운 평등사상을 정립한 것이었다. 예컨대 신분평등의 경우를 보면, 양반도 그의 마음 안에 하나의 하나님을 모시고 있고, 양인(평민·상민)과 천민·노비도 마음 안에 똑같은 하나의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양반과 양인과 천민·노비는 서로 완전히 평등하다고 설파한 것이었다. 이러한 평등사상은 양인·천민·노비 등 하위신분층과 농민층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은 더욱더 평등사상을 강조하고, “우리 도를 깨달을 자는 호미를 들고 지게를 지고 다니는 사람 속에서 많이 나오리라”139)吳知泳,≪東學史≫, 42쪽.고 했으며, “富한 사람과 貴한 사람과 글 잘하는 사람은 도를 통하기가 어렵다”140)위와 같음.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학은 여성도 ‘하나님을 낳는 하나님’이라고 하여 남녀평등을 강조했으며, 어린이는 ‘어린 하나님’이라고 하여 어린이 존중을 강조하였다.141)崔時亨,<內修道文>및<內則>.
愼鏞廈,<崔時亨의 ‘內則’ ‘內修道文’ ‘遺訓’>(≪韓國學報≫12,≪東學史≫), 64쪽) 참조.

 또한 동학은 ‘사람이 곧 하나님이오 하나님이 곧 사람이다’라는 ‘人是天’사상을 정립하여 인간의 지고지귀한 존업성을 강조하였다. 최시형은 최제우를 계승하여 “사람은 곧 하나님이다(人是天). 사람 섬기기를 하나님같이 하라(事人如天”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내 꿈인들 어찌 선생(최제우)의 遺訓을 잊으리오. 선생이 일찍이 遺敎가 있어 가로되 ‘사람은 하늘이니라. 그러므로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 하였도다(李能和,≪天道敎創建史≫, 제2편의 37∼38쪽).

 동학의 ‘사람이 곧 하나님이다’라는 ‘人是天’사상은 하나님을 사람 밖에 있는 별개의 主宰者로 설정하고 사람은 하나님 밑에서 그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종’라고 가르친 모든 다른 종교들의 사상과는 크게 다른, 고도의 휴머니즘의 사상이었다. 동학은 인간을 지고지귀한 하나님과 同格에 설정함으로써 그 때까지 전세계 모든 종교들이 창안한 휴머니즘 중에서도 최고도의 휴머니즘을 창도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동학의 위와 같은 독특한 구조의 평등사상과 최고도의 휴머니즘은 당시 양반관료들로부터 차별받고 학대받으며 천시되어 오던 평민들과 천민들에게 인간의 평등성과 지고지귀함을 가르쳐 주어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그들로부터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또한 최제우의 동학은 ‘後天開闢’ 사상을 정립하여 보급하였다. 최제우는 인류역사를 ‘先天’과 ‘後天’으로 나누어 ‘선천’의 시대 5만년이 다하면 時運에 따라 ‘후천’ 5만년이 시작되는 ‘개벽’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조선왕조 말기 자기의 시대를 ‘선천’시대가 마지막 종언을 고하는 시대라고 보았으며, 그의 ‘동학’의 득도와 포교의 시작이 ‘후천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최제우 동학의 이러한 ‘후천개벽’ 사상에는 일반적으로 ‘선천세계’를 모두 부정하면서 실제로는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의 뜻을 그에 내포했다는 의미에서 혁명성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142)金龍德,<東學思想硏究>(≪中央大論文集≫9, 1964) 참조.

 또한 최제우의 동학은 天國은 서학에서와 같이 죽은 후에 하늘에 세울 것이 아니라 생전에 地上에 세워야 한다는 ‘地上天國’사상을 정립하여 강조하였다. 최제우는 사람들이 ‘守心正氣’하여 수양을 하고 동학에 귀의하여 ‘地上神仙’과 ‘地上君子’가 되면 이 땅위에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동학이 지상에다 동학에 입도한 교도들을 중심으로 ‘군자공동체’의 유토피아 건설을 추론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학의 위와 같은 ‘후천개벽’사상과 ‘지상천국’사상은 당시 동학의 민족주의와 평등사상과 휴머니즘에 의하여 해방과 자유의 의지를 갖게 된 하위신분층의 농민들에게 외세를 몰아내고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이 땅 위에 건설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했다고 볼 수 있다. 최제우는 후천개벽 후의 지상천국의 오는 시절을 다음과 같이 가사로 기록하였다.

富하고 귀한 사람 이전 시절 貧賤이오, 貧하고 賤한 사람 오는 시절 富貴로세(<敎訓歌>,≪龍潭遺詞≫).

 동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독특한 구조의 민족주의와 휴머니즘과 평등사상과 개벽사상·지상천국사상 등은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근대적 사상이었을 뿐 아니라, 당시 열강을 비롯한 외세의 침입을 염려하면서 양반관료들의 학대와 차별 앞에서 신음하며 사회신분제 폐지와 평등과 인간적 대우를 갈망하고 있던 하위신분의 농민들에게 고도의 ‘선택적 친화력’을 갖고 결합되어 수용되었다. 농민들은 동학을 그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주고 용기와 자부심을 주는 복음과 구세종교로 생각하여 연이어 입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 조정은 1864년 동학을 불법화하고 이의 시행을 엄금하여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하위신분층의 농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에 입도하여 최제우의 순교 이후에도 산촌과 농촌을 중심으로 농민들 사이에서 동학세력은 날로 증대하게 되었다.

 동학사상은 이상과 같이 서양 열강의 동양 및 조선왕국 침입에 대한 사상적 대응의 한 양식으로 형성 창도된 한국민족의 매우 독창적인 사상과 종교였다. 동학은 保國安民과 廣濟蒼生을 목적으로 독창적인 민족주의와 근대적 평등사상 및 휴머니즘을 정립하고 새 시대를 열려는 후천개벽 사상까지 갖추어 광범위한 하위신분층의 농민들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후에 동학세력이 서양 열강과 외세의 침입에 대응하고 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실제로 ‘보국안민’·‘광제창생’의 민족운동을 일으키며 거대한 영향을 전국에 끼치도록 성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愼鏞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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