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1. 흥선대원군의 집권

1. 흥선대원군의 집권

 1863년 12월 8일 33세의 젊은 철종이 재위 13년만에 후사도 없이 죽었다. 그의 소생으로는 5남 6녀가 있었으나, 제4녀 永惠翁主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죽고 말았다. 왕위 계승자를 남기지 않은 채 왕이 죽었기 때문에, 신왕을 옹립하는 것이 초미의 급무로 떠올랐다.

 이날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대왕대비(翼宗의 妃) 趙氏는 왕위 후계자를 선정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서 조대비는 “興宣君의 嫡嗣 第二子 命福으로 익종대왕의 대통을 入承키로 定하라”는 한글 교서를 내렸다.143)≪高宗實錄≫권 1, 고종 즉위년 12월 8일.

 조선왕조의 제26대 국왕으로 지목된 ‘명복’은 당시 12세의 소년으로서, 영조의 4세손인 興宣君의 둘째 아들이었다. 대왕대비 조씨는 신왕을 선왕인 철종의 후사가 아니라 자신의 지아비인 익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그 후사로 삼았다. 이것은 풍양 조씨 가문 출신인 조대비가 신왕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왜냐하면 선왕인 철종은 안동 김씨 가문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그들 문중에서 왕비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흥선군의 아들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자로 지목될 수 있었던 것은 궁중의 최고위자인 대왕대비 조씨와 흥선군 사이에 묵계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 철종의 유지가 그러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당시 왕가의 계보로 보아 고종이 왕위계승 후보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순번에 있었음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결정은 별다른 반대를 받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44)成大慶,<대원군 초기 집정기의 권력구조>(≪大東文化硏究≫15, 1982), 94쪽.

 자신의 아들이 왕에 즉위함에 따라 흥선군은 大院君에 봉작되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대원군의 존재는 전례가 없었기에 그에 대한 예우는 대군의 예에 따라 시행되었다. 하지만 대군도 역시 종실이므로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따라서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봉작되었다고 해서 곧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2월 13일 고종이 즉위한 날, 대왕대비는 백관을 거느리고 垂簾聽政의 의례를 거행하였다. 대왕대비 조씨는 수렴청정의 권한을 갖기는 하였으나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이 약하였다. 그의 친정인 풍양 조씨 가문은 이미 철종 治世中에 안동 김씨 세력에게 밀려서 영락하였고, 친정 조카인 趙成夏·趙寧夏 등이 있었으나 척신으로서 세도의 지위에 올라 보좌의 중임을 감당하기에는 나이도 힘도 부족하였다. 대왕대비는 풍양 조씨 세력을 끌어 올리고 안동김씨 세력을 억제해 줄 강력한 존재를 필요로 하였는데, 흥선군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145)田保橋潔,≪近代日鮮關係の硏究≫上卷, 朝鮮總督府中樞院, 244쪽.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의 명목 아래 실제로는 흥선군에게 모든 정사를 위임하였다. 즉 “嗣王이 年幼하고 국사가 多難하니 대원군이 大政을 協贊하고, … 百官有司로 하여금 대원군의 지휘를 聽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146)玄采,≪東國史略≫1906 권 4, 近世史, 朝鮮記, 下, 43쪽.

 이렇게 해서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원군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흥선대원군 李昰應(자:時伯, 호:石坡, 1820∼1898)은 순조 20년 12월 21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종 즉위 초기 10년간에 ‘大院位大監’, ‘國太公’, ‘大老’ 등으로 불렸으며, 사후인 1907년에 ‘大院王’으로 추봉되었다.

 그의 가계는 영조의 아들 思悼世子에서 파생되고 있다. 사도세자가 세자빈 혜빈 홍씨에게서 얻은 아들이 정조이고, 궁녀에게서 얻은 아들 셋 가운데 둘째 아들이 恩信君이었다. 은신군이 후사가 없어 인조의 셋째 아들인 麟坪大君의 5대손 秉源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는데 바로 그가 대원군의 친아버지인 南延君 球였다. 대원군은 네 형제 중 막내였다. 이렇게 따져볼 때 대원군은 실세한 왕족이긴 하지만 그당시 얼마 안되는 왕족 가운데 당당한 왕손이었던 것이다.

 그는 15세(순조 34년, 1834)에 興宣副正에 봉해지고, 이후 몇 차례 加資를 통해 24세 (헌종 9년, 1843)에 興宣君으로 봉해졌다.

 그는 격조높은 한시를 많이 남긴 사실로 미루어 유교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그는 추사 金正喜에게 師事하여 글씨와 난초 그림을 배워 격조높은 서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

 주요 관직 경력을 보자. 대원군은 17세 때에 童蒙敎官 일을 하였다. 이어서 守陵官, 綏陵遷葬都監의 代尊官 직을 거쳐 28세(헌종 13년) 때 冬至使에 임명된 바 있으나 무슨 이유인지 使行에 참가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그는 典醫監, 司圃署, 典設司, 造紙署의 提調 직을 맡았다. 이것은 모두 종실들에게 녹봉을 나누어 주기 위한 의례적인 한직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권있는 관직도 거친 바 있다. 종친부 有司堂上과 오위도총부 都摠管 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직책들은 결코 한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흥선군이 주로 활동하던 직책은 종친부의 유사당상이었다. 그는 헌종 13년 2월 종친부 유사당상에 임명된 이후 철종 연간의 대부분 시기에 그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고종이 즉위할 당시에도 여전히 그 직위에 있었다.147)유영익,<흥선대원군>(≪한국사 시민강좌≫13, 일조각, 1993), 88∼91쪽.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한 당시의 조선왕조의 국내외 정세는 복잡다난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봉건왕조의 여러 모순이 말기적 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왕조 지배체제의 쇠퇴는 만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봉건사회의 해체과정은 모든 사회부문에서 진행되었다. 이를 가능케 한 기본적 동력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이었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사회적 분업이 진전되었다. 그 결과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도 변하였다. 종래의 상품화폐경제는 국가가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수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거나 또는 지주가 전호농민들로부터 지대를 수취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주로 관료나 양반지주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사치품이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그러나 봉건 말기에 이르러 사치품 외에도 농민들의 농업생산에 필요한 농기구 면화 면포 미곡 등이 중요 상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상품들은 농촌의 장시에서 교환되었고, 이를 토대로 상업적 농업을 영위하는 농민들이 출현하였다.

 봉건사회의 위기는 신분제의 변동에 따른 봉건적 신분 질서의 동요, 지주제의 확대에 따른 지주와 전호 농민의 계급대립의 심화, 농민층 분해의 진전으로 인해 초래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농촌 사회 내의 계급구성은 재편되었다. 지주계급은 구래의 양반특권지주와 새롭게 성장한 서민지주로 분화되었고, 농민층도 부농 빈농 농촌노동자로 분화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농촌 사회내의 계급대립을 첨예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봉건사회의 위기를 조성하는 객관적 조건이 되었다.

 더구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토지의 상품화가 진전되었으며, 그 결과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강화되어 지주제가 확대·강화되었다. 19세기 중엽 경상도 진주지역의 사례연구에 따르면 관내 토지소유자 가운데 16%에 달하는 지주들이 전체 토지의 62%를 점유하고, 63%에 달하는 농민들이 18%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토지소유의 집중현상은 지주와 전호농민의 토지소유관계를 둘러싼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봉건사회의 위기는 정치적인 면에서도 드러났다. 이 시기에 양반세력 일반의 광범한 참여가 보장되는 정치질서가 붕괴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도정치가 출현하였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자신의 딸을 순조의 비로 책봉하는데 성공한 金祖淳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성립시켰다. 순조 말년부터 헌종대까지는 풍양 조씨 일파의 외척세력이 대두하여 한때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였으나,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정국은 다시 안동 김씨에 의해 주도되었다. 철종 재위시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절정에 달하였다.

 세도정치 시기에는 18세기 이래 진행되어 오던 권력의 집중현상이 서울의 소수 명문가문을 중심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정권의 지지기반은 더욱 축소되었고, 그 결과 지배계급 내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정권을 잡은 세도가문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벼슬자리가 중요한 치부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자들은 관직의 임기를 단축시켜 자주 교체하였다. 이러한 관직의 불안정 상태는 관리들에 의한 탐학행위를 더욱 조장하였고, 농민수탈은 가중되었다.

 세도정치 시기에 국가재정의 위기가 만성화되었다. 국가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세도정권은 새로운 재원의 확보에 열중하였다. 大同米의 중앙 상납분을 늘리고, 환곡의 총액을 증가시키고, 심지어 주화의 질을 떨어뜨려 화폐발행에서 생기는 이익을 늘리는 등의 조치가 행해졌다. 이로 인해 지방관청의 재정상태도 허약하게 되어, 각종 잡세의 부과나 환곡, 고리대 등을 통해 재정부족을 보충하는 경향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19세기의 만성적인 삼정수탈의 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와 더불어 봉건적 지배 이데올로기도 그 영향력을 서서히 상실해 갔다. 실생활과 유리된 채 四端七情論, 理氣論, 禮論을 둘러싸고 부단히 논쟁을 되풀이하는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적 상황은 봉건체제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새로운 사상적 모색이 정권에서 소외된 지식층에 의해 이루어졌다. 천문학, 曆算 등 자연과학의 연구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鄭齊斗의 양명학은 소론 학자들에게 계승되어 李匡師·李忠翊에 이르러 더 한층 발전하였다.

 또한 17세기에 발생한 실학사상이 18,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柳馨遠을 위시한 李瀷·洪大容·朴齊家·丁若鏞으로 대표되는 실학자들은 정치·경제·문화·군사 면의 현실적 모순을 구체적으로 비판·분석함으로써 인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나라의 부강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經世致用의 실학 일파는 천주교 탄압 사건에 휘말려 노론 집권세력으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아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利用厚生의 실학 일파는 文體反正으로 몰려 쇠퇴하게 되었다. 현실문제를 외면하고 典章 制度 金石 연구로 몰입한 實事求是의 일파 만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이제까지 지배의 대상으로만 치부되었던 농민들도 유교적 이데올로기에서 이탈하는 양상을 보였다. 鄭鑑錄의 영향력이 민중들 사이에 확대된 것은 그 보기이다. “이씨왕조가 망하고 정씨왕조가 도래한다”든가, “十勝地로 들어가면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으리라”는 정감록의 예언은 의지할 곳 없는 민심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리하여 정감록에 의거한 모반사건도 잇달아 일어났다.

 1860년에 崔濟愚에 의해 東學이 창시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中老少問答歌>에 나타난 時運의 사상이나, 풍수지리관, 초인적인 운명관과 新生觀·救濟觀 등의 後天開闢사상은 정감록 사상보다 더욱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농민들 속에서 지배이데올로기에 매몰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사유체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사상적 경향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봉건왕조 지배체제의 위기는 19세기에 들어서 전국적 규모의 농민봉기에 의해 전면화되었다. 19세기는 민란의 시대였다. 그중에서도 1811년 洪景來가 지도한 농민봉기와 1862년 壬戌民亂은 두개의 커다란 봉우리를 이루었다.

 1862년 2월에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임술민란은 5월에 접어들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도에서는 20개 군현에서, 전라도에서는 37개 군현에서, 충청도에서는 12개 군현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그밖에 함경도 함흥, 황해도 황주, 경기도 광주 등지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1862년 한해 동안 민란이 일어난 지역은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만도 71개 군현에 달하였다.148)망원한국사연구실 19세기 농민항쟁분과,≪1862년 농민항쟁≫(동녘, 1988), 59∼62쪽.

 민란의 주요 형태는 饒戶富民層과 상층부를 점하는 양반토호층에 의해 지도되고 가난한 농민층이 주력이 되는 것이었다. 토호층이 주도하는 항쟁은 대부분 향권 탈취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초군이나 두레와 같은 농민조직이 항쟁에 가세함으로써 鄕會 중심의 투쟁을 뛰어넘어 폭력적인 반봉건 항쟁으로 나아갔다. 초군이 주도한 민란의 진행과정에서 농민들이 스스로 조직하였던 民會 등은 농민층이 변혁주체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안동 김씨 가문을 필두로 한 봉건 지배층은 민란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민란의 원인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였다. 봉건 지배층은 민란의 원인을 부세제도 운영상의 문제로 파악하였다. 그해 윤 8월에 三政釐正廳을 설치하고 삼정의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다. 이러한 삼정 개선책은 농민층의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 것이었지만 본질적으로 지주층 중심의 개선방안이었다. 그나마 보수적인 지배층의 반발에 부딪쳐, 겨우 3개월 남짓 추진되다가 10월 말에 백지화되고 말았다. 봉건사회 위기를 초래한 사회모순은 미해결된 채로 더욱 심화되었다.

 봉건지배체제의 위기는 대외적으로 자본주의 열강의 침투에 의해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1831∼1860년까지 기록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30차례 가깝게 異樣船이 출몰하였다. 이들은 조선에 교역·통상할 것을 요구해 왔다. 중국과 일본 두 나라에 국한하여 事大交隣의 의례적인 사신왕래만 행하던 조선왕조의 봉건지배층은 다른 어느 나라와의 통교도 엄격히 금지하였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의 완숙기에 접어든 구미 여러 나라들은 상품판매 시장을 확보하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거스릴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수반한 것이었다.

 특히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애로우호 사건을 구실로 삼아 北京을 함락하고 청의 咸豊皇帝가 熱河로 피신하는 사태가 전개되자, 서양에 대한 조선 봉건 지배층의 위기의식은 더욱 심화되었다. 봉건 지배층은 西勢東漸의 위기를 斥邪衛正의 방법으로 막으려고 시도하였다. 봉건 지배층은 천주교의 신앙체계를 조선왕조의 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엄중한 도전으로 간주하였으며, 그에 대한 엄중한 탄압정책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자본주의 열강에 의해 주어진 이 위기는 쇄국정책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내외적으로 조성된 봉건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발전의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이제 막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정권 앞에 제기된 시대적 임무였다.

 특히 1862년 임술민란은 봉건체제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웅변해 주었다. 하지만 당시의 집권세력인 안동 김씨 세도정권은 이를 치유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임술민란은 비단 안동 김씨 권력을 위태롭게 하는 정도에 머문 것이 아니라 지배체제 자체의 위기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 때문에 왕조지배체제를 재편성하는 것이 이 시기 지배층 전체의 일치된 소망이 되었다.

 다시 말해 대원군의 집권은 1862년의 전국적 농민봉기에 대한 진압대책에 자신을 잃은 지배계급 중추부의 동요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봉건지배층은 농민의 봉기에 의해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층은 왕조 자체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서로 타협해서 강력한 구원자를 만들어 냈다. 대원군이 바로 그러한 존재였다. 대원군 집권의 의의는 그가 집권한 다음 추진하고 시행한 여러 정책이 당시의 봉건왕조 및 지배층의 요망에 전적으로 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대원군이 집권하게 된 원인도 여기 있으며, 그의 정책 수행이 강력한 독재적 형태를 취할 수 있었던 조건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의 동맹으로 새 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일이 필요하였다. 고종 즉위 당초에는 아직도 철종조 외척 벌열세력인 안동 김씨 가문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철종 사망 당일에 발표된 宗戚執事와 葬儀都監提調의 명단은 거의 전부가 안동 김씨계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안동 김씨의 영향력은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 직후 강진 신지도에 유배되어 있던 慶平君 李世輔를 석방하려 하였을 때 승정원 홍문관 대사헌 대사간 시원임 대신들이 일제히 상소를 올려 반대하고 나선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149)≪高宗實錄≫권 1, 고종 즉위년 12월 20일. 경평군 이세보는 철종 말년에 척족을 경유하지 않고 왕에게 직품하여 자신의 아우로 하여금 直閣 벼슬에 오르게 하려다가 대간의 논핵을 받아 작위를 환수당하고 유배된 바 있었다.

 정치권력에서 밀려나게 된 척족 안동 김씨 세력은 국면의 반전을 꾀하였다.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정계로부터 격리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고종이 즉위하고 조대비의 수렴청정 의례가 거행된 그날, 金左根과 金興根을 필두로 한 외척 안동 김씨 세력은 국왕에게 대원군의 칭호를 갖는 생부가 있었던 예가 일찍이 국조에 없었던 일임을 명분삼아 대원군의 정치 간여를 막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즉 왕의 사친인 대원군을 정치적인 일로 수고롭게 해서는 안되며, 대원군과 대신들이 대궐에서 마주칠 일이 없어야 한다는 논리에 입각하여, 대원군으로 하여금 국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 세력에게는 이미 급선회하는 정치권력의 이동을 억제할 능력이 없었다. 당시 안동 김씨 세력은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 金左根·金興根을 필두로 하는 세력과 金炳學·金炳國을 중심으로 하는 양 세력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후자가 대원군의 집권에 협력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김좌근·김흥근 계열의 안동 김씨 세력의 반대원군 운동은 약화되었다. 안동 김씨 세력이 종래와 같은 권세를 회복하기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150)成大慶,≪大院君政權性格硏究≫(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1984), 13쪽.

 독자적인 세력 기반이 없었던 대원군은 수렴청정의 권한을 쥐고 있던 조대비의 협력을 얻었고, 김병학·김병국 계열의 안동 김씨 세력의 지지를 얻은데 힘입어 집권에 성공하였다. 이들은 대원군의 권력이 취약하던 집권 초기에 대원군 정권의 중요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日省錄≫이나≪承政院日記≫의 기록으로는 고종 초기의 정치가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은 고종 3년(1866)에 철회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종 즉위 초창기부터 크고 작은 정무가 처음부터 대원군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자체의 권력 기반을 확고하게 굳히기까지에는 중앙관제의 개편, 새 관료층의 발탁, 京外 胥吏의 포섭, 宗親 璿派人 중심의 병권 장악 등이 완료될 때까지 얼마간의 기간이 필요하였다.

<成大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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