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우리 나라 書院의 효시는 중종 때 豊基郡守 周世鵬이 安珦을 제사하고 근린 자제에게 유학을 강론한 白雲洞書院이다. 그후 명종 때 이곳에 부임한 李滉이 건의하여 紹修書院이란 사액과 함께 서적과 면세전토 그리고 노비를 하사하였으니, 이것이 곧 賜額書院의 효시이다. 이후 이를 본떠서 전국 각지에 서원이 남설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원이 이미 광범하게 설립되어 국가재정에 역행적 작용을 하고 있었다. 서원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면세의 書院田과 군역을 면제받은 院奴를 비롯하여, 건물의 건축과 수리, 그리고 春秋祭享의 祭需를 지방관아나 국가에서 보조받는 특권이 있었다. 이러한 법외의 특권이 부여되기 때문에 남설, 첩설이 유행하여 수많은 서원이 설립되었고, 이 서원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양반유생이 늘어나며, 서원의 위세로 관민을 협박하며 금품을 강요하는 비행이 자행되었다.

 서원 외에도 鄕賢祠라는 것이 있었다. 향현사는 서원으로 하기에는 부족한 것을 일컫는 것인데, 서원과 동일한 기능을 하였다. 서원과 향현사의 남설은 곧 지방유림의 세력신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세력의 증강을 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국가재정에 대한 막대한 결손을 초래하였다.

 이 때문에 봉건 정부에서는 가능한 한 서원의 증설을 막고자 하였다. 이미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의해 전국 서원의 재산 몰수 조치가 행해진 바 있었고, 영조 재위시에도 300여 군데에 달하는 서원이 철폐된 바 있었다. 또한 철종 13년에도 신설 서원들을 일제히 철폐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대원군도 서원을 정리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집권 직후에는 과다하게 설립된 서원을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고종 원년 7월에 대원군은 전국 서원과 향현사를 엄밀히 조사시키는 한편 그 존폐문제를 검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이어서 서원과 향현사의 폐단이 매우 심하니 그들의 죄악상을 일일이 적발 처분하고 그 私設, 濫設을 엄금하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대원군은 집권 초에는 다만 서원의 남설을 막고 그 불법적 행태를 규제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기반이 확고해지자 고종 2년 3월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萬東廟의 철폐명령을 내렸다. 서원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노론의 영수인 宋時烈을 배향한 청주의 華陽書院이었으며,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중국 명나라의 神宗, 毅宗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만동묘였다. 특히 화양서원에서 임의로 발행하는 이른바 ‘華陽墨牌’는 그 누구도 감히 어길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의 이 조치는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전국 유림의 반대운동에 부딛혔다. 하지만 이 조치는 전국적 규모의 서원철폐령의 전주곡에 불과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이 본격화한 것은 병인양요를 치룬 뒤 대원군 정권이 재정적으로 가장 큰 곤란을 겪던 1868년경 부터였다. 이 해에 서원전에 대한 면세규정을 폐지함으로써 서원의 물질적 기초에 규제를 가하였고, 사액서원을 유림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각 군현의 수령이 직접 주관하게 하였다. 이는 대원군 정권이 향촌의 재지 지배층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고종 8년(1871)이었다. 이해 3월에 마침내 전국의 거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는 명령이 발령되었다. 즉 1人 1院 이상으로 중복 설립된 서원과 향현사는 설혹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모두 없애고, 사액서원으로서 마땅히 존속시켜야 할 47개 처만 남기도록 하였던 것이다.158)成大慶,<대원군의 서원철폐>(≪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정음문화사, 1985).

 전국 각지의 유생들은 서원철폐 정책에 반대해 나섰다. 유생들은 ‘儒通’이라 불리는 격문을 돌려 반대여론을 규합하였으며, 대표자를 선출하여 서울에 집결하여 대궐 앞 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한 결의를 표명하면서, 포도청에 명령하여 유생들의 집회를 해산시키는 등 탄압책으로 일관하였다.

 서원철폐 정책의 본질은 지방의 토호권을 약화시키고 그 대신 전제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지방 관아의 서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서도 드러났다. 대원군은 자의적으로 부세를 운영하여 민폐를 야기하고 있었던 서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고종 원년(1864) 전국 還穀逋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포흠서리에 대한 처벌 규정을 더욱 엄격히 하였다. 포흠량이 1,000석 이상인 경우는 모두 효수형, 900∼200석까지는 등급을 나누어 정배형, 100석 이하는 감영에서 엄형하여 석방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조치는 그후로도 계속되어 환곡을 포흠하였다는 명목으로 효수된 서리들은 상당수에 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원군 정권은 종래 향촌사회의 자치에 맡겨졌던 서리 임명도 중앙에서 간여하도록 하였다. 중앙통제력을 강화하여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대원군 정권의 향촌 정책의 핵심은 수령-서리로 이어지는 봉건왕조의 공적 권력의 확립을 통하여 사적 권력을 배제하고 향촌사회의 운영권을 장악하고자 한 것이었다.

 대원군이 집권 후 심혈을 기울인 다른 한 가지 사업은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왕실의 존엄을 과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은 방대한 예산을 요구하는 사업이었으며, 당시 조선왕조의 재정상태에 비추어 보면 힘겨운 일이었다.

 경복궁은 원래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4년 12월부터 이듬해 9월에 걸쳐 정도전의 지휘 아래 건립된 궁궐이었다. 경복궁은 그후 약 200년간 조선왕조의 정궁으로서 기능하다가 임진왜란 당시에 화재로 소진되고 말았다. 그후 250여년 동안 순조, 헌종년간에 두 차례 중건을 계획한 적이 있으나 재정궁핍으로 인해 중건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대원군은 고종 2년(1865) 4월에 營建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스스로 진두에서 사업을 지휘하였다. 이 공사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대원군은 우선 왕실로부터 內帑金 11만 냥을 지출하고, 종친을 내세워 願納錢 36만 냥을 걷도록 하였다. 이어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원납금을 염출케 하였다. 경복궁 중건에 사용된 개인 원납금의 총액은 1865년 4월부터 1868년 8월까지 약 750만 냥이었다.159)成大慶,≪大院君政權性格硏究≫(成均館大의 博士學位論文, 1984), 87쪽.

 대원군은 원납금의 납입을 독려하기 위해 1만 냥 이상의 금전을 헌납한 이들에게 벼슬자리를 주었다. 보기를 들면 1866년 3월 현재 53인의 고액 헌납자들에게 지위와 액수에 상응하는 직책이 부여되었다. 10만 냥을 원납한 3사람은 수령에 임명되었고, 3만 냥을 원납한 5인은 初任調用되거나 六品職에 임용되었으며, 1만 냥 이상을 납부한 45인도 모두 수령직이나 그 밖의 적당한 직책에 임용되었다. 가장 많이 임명된 직위는 수령직이었는데 53명 가운데 21명이 그에 임용되었다. 출신지를 보면 함경도가 가장 많았는데 咸興 출신이 4명, 利原과 洪原 출신이 각각 3인씩 모두 10인이었다.160)≪日省錄≫, 고종 3년 10월 1일. 이처럼 고액의 원납전을 헌납한 자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경복궁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후기에 갈수록 원납 액수가 줄어들어 고액헌납자에게 더욱 후한 직첩으로 포상하였다.

 원납전의 수금은 경복궁 중건 공사가 끝난 뒤에도 군비확장을 명분으로 계속 되었다. 이제 원납전은 일상적인 조세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경복궁 중건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특별세가 신설되었다. 1결당 100문씩의 結頭錢을 새로이 부과한 것은 그 사례이다.

 또한 當百錢을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이 화폐는 고종 3년(1866) 11월부터 호조의 전관 아래 금위영에서 주조하였다. 명목가치가 실질가치의 1/20에 지나지 않은 이 악화는 약 6개월 동안에 총 1,600만 냥이나 발행되었다. 당백전은 막대한 주조차익을 얻을 수 있는 화폐였다. 당백전은 경복궁 중건 사업에 쓰였을 뿐만 아니라 병인양요로 인해 파괴된 강화부와 경기 연안의 문수산성을 비롯한 성곽 수리 등에도 사용되었다. 당백전은 직접 대원군이 관장하여 자신의 필요한 재정에 유용할 소지가 많은 화폐였다. 이 때문에 유통시장에 혼란을 가져와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백전 발행으로 인해 사회경제적 폐단이 심각해지자 결국 이 화폐 발행은 6개월만에 중지되었다.

 고종 4년(1867) 5월에는 값싼 淸錢(嘉慶通寶·同光통보·同治통보 등)을 수입해서 급증하는 재정수요에 충당하기 시작했다.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1/2 내지 1/3에 불과한 청전은 常平通寶를 유통시장에서 구축했다. 상평통보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악성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났다.

 경복궁 중건사업은 농민층의 동요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원납전 징수에서 상당한 문제가 야기되었다. 願納錢은 말 그대로 자원해서 바치는 돈은 아니었고, 오히려 빈부의 구분없이 매호마다 강징되는 ‘怨納錢’이었다. 대원군의 측근 가운데 하나인 張淳奎는 특히 원납전 염출에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마치 새를 숲에다 몰아넣고 그물로 사로잡는 방식으로 토색하였기 때문에 都城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였다고 한다.

 원납전 징수를 빙자한 농민토색 사건도 빈발하였다. 고종 3년(1866)에는 영건도감 서리를 가칭하여 여러 읍을 돌아다니면서 수령을 위협하고, 평민을 침학하여 징수한 원납전을 횡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종 9년 평안도 정주에서는 지방의 유력자들이 원납전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농민들을 토색하였다고 고발한 사람이 무고 혐의로 처벌을 받은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 사건들은 원납전을 빙자한 농민토색이 널리 행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수 있다.

 이에 따라 원납전에 대한 농민들의 납부거부사건도 나타났다. 예컨대 고종 5년에 함경도 홍원군의 박인희·현익상 두 명은 원납전 납부 기피 혐의로 포도청에 끌려가서 처벌을 받았다.

 또한 경기지역 농민들에게는 경복궁 중건 사업에 동원되는 부역이 큰 고통이었다. 특히 부민들이 원납전 만을 내고 부역에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농민들은 이중의 고통을 당하였다. 또한 중건사업에 필요한 기술인력이 모자라자 강제적으로 승려중의 장인들에 대한 동원령을 내렸으며, 나아가 자금부족이 심화되자 민간인 工匠도 강제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착공 3년되던 해인 고종 5년(1868)에 경복궁은 완공되었다. 그해 7월 고종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사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토목사업은 경복궁이 완공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대원군은 종묘·종친부·육조 이하 각 관서는 물론이고, 동대문·북한산성 등의 성곽의 개축을 계속하였다. 영건도감은 고종 9년 9월까지 존속하였으니, 대원군 집정기 거의 전 기간 동안 도성 정비를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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