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4) 민란 대책

4) 민란 대책

 1862년 전국적 규모로 전개된 임술민란에서 비롯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대원군 정권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집권 초기 대원군은 향촌사회의 토호들의 사적 권력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는 한편, 부세제도의 운영을 개선하여 향촌사회를 안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 초기에 실시한 정책들은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모순이 치유되지 않는 한 소기의 성과를 볼 수 없었다. 지주제라는 기본적인 모순은 그대로 둔채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정책만으로는 이미 체제가 동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원군 집정기에 농민항쟁은 민란과 변란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대원군 집권 10년 동안 군현을 단위로 한 민란은 그전 시기에 비하여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 성격도 일률적이지 않았다.

 고종 원년(1864)에 발생한 황해도 豊川민란은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놓고 鄕任層과 서리·군교 층의 대립이 격화된데서 연유하였다. 향임세력은 부세운영의 권한을 획득하기 위해 기존에 그 권한을 쥐고 있던 서리·군교의 비리를 폭로하였다. 아울러 면·리 단위의 공동체적 결속력에 힘입어 농민들을 동원하여 합법적인 呈訴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민란으로 전환되었다. 농민들은 관청을 습격하고 서리와 군교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부세운영 과정의 비리를 폭로한 세력이 바로 향임세력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요구사항이 다른 지역의 농민항쟁에 비해 매우 구체적이었다. 이 민란은 鄕戰이 민란으로 전화한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대원군 정권은 이 민란의 원인을 향촌사회 유력자층이 수령의 통제를 벗어나 벌이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문제의 발단을 야기한 향임층과 서리·군교 출신의 당사자들이 모두 처벌받았다. 그에 반해 민란에 가담한 농민층에 대해서는 철종조의 대책에 비하면 훨씬 관대한 조처를 취하였다.

 고종 5년(1868)에 발생한 柒原민란은 수령의 부정탐학에 연유한 것으로, 농민들이 면·리의 공동체적인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수령을 몰아낸 사건이었다. 이 민란은 이 시기 광범하게 형성되고 있던 농민적 지식인층으로서 관에 의해 ‘營訴로 가산을 탕진하고 민폐에 가탁하여 수령의 정사를 헐뜯는 자’로 지목된 黃上基라는 사람이 주도하였다.

 칠원민란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응은 풍천민란의 경우와는 달리 가혹한 처벌로 일관하였다. 이것은 1862 임술민란에 대한 강력한 탄압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는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동요하는 조짐을 보인 농민층을 강력한 탄압을 통해 통제해 보려는 대원군 정권의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었다. 결국 현감에 대해서는 파직처분에 그쳤지만 항쟁에 가담한 황상기 등의 지도층은 모두 효수하였다.

 고종 6년에는 경상도 통영에서 민란이 발발하였다. 이 민란은 고성현의 戶籍監色이 통제영이 소재한 춘원면민의 호적을 엉터리로 작성하여 군전을 걷고자 하였다가 民所라는 농민자치기구의 주도하에 69개 동의 동민이 참여하여 문제의 호적감색을 타살한 사건이었다.

 통영민란의 보고에 접한 중앙정부는 호적감색을 살해하는데 앞장 선 자들을 처형하였다. 또한 정부는 固城縣과 統制營의 관할 구역간의 대립이 민란을 야기한 원인이었다고 파악하고,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대원군 집권기 민란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폭력적 봉기로 발전하기 이전에 다양한 發通聚會, 정소운동이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단계의 운동은 대부분 향촌의 유력자들로서 향임이나 民所와 같은 자치기구의 지도적 인사들이었다.

 민란에서 군중을 동원하는데 활용된 것은 면·리 조직이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면·리 단위의 부세 공동납이 강화된 것과 연관된다. 원래 면·리 조직은 자치적인 기구였으나, 봉건정부에 의해 하나의 말단 행정기구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국가권력과 재지 중간층의 수탈이 강화되자 이러한 말단 지배기구들은 농민의 저항을 조직화하는 기구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이때 面任이나 里任들이 주도적으로 농민동원에 앞장섰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하지만 이 양상은 1862년 임술민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 바 있었다.

 민란이 폭력적인 봉기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주도층의 변화가 나타났다. 면임, 리임들의 지도성은 소멸되고 그 대신에 농민들의 정소를 대리해주던 농민적 지식인층이나 몰락양반들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즉 민란의 지도층은 평소에 정소운동을 통해 농민들 사이에 신망을 얻고 있던 인물들이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칠원민란의 지도자 황상기가 營訴로 가산을 탕진하였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166)고동환,<대원군집권기 농민층 동향과 농민항쟁의 전개>(≪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대원군 집정기의 민란은 그 이전 시기의 민란과 비교하여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민란의 전개과정이나 군중의 동원, 민란의 지도층 등의 측면에서 1862년 임술민란의 특성들이 대원군 집정기의 민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향촌사회에 뿌리를 두고 생산활동이나 그 결과인 잉여생산물의 분배에 직접적인 이해를 갖는 사람들이 국가권력의 부세수탈이나 수령·이서 층의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발통 취회, 정소 등을 거쳐 봉기를 일으키는 양상을 보였다. 이 시기의 민란은 고을 단위에 국한된 지역적 제한성을 보이고, 투쟁목표도 경제적 차원에 머무르며, 국가권력 자체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이나 이서층을 공격하고 읍권을 장악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원군 집정기의 농민항쟁에서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던 특징적인 것은 민란과는 구분되는 變亂이라는 형태가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변란은 향촌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의생, 훈도, 지관 등을 생업으로 삼아 각지를 편력하는 몰락양반 일부가 중심이 되어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에 불만을 품고 鄭鑑錄類의 이단사상을 이념적 무기로 삼아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변란은 특정 고을을 벗어나 지역 간에 연계된 조직에 기반하여 읍권을 장악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 자체를 전복, 장악하려는 동향을 드러내고 있었다.167)배항섭,<19세기 ‘변란’의 추이와 성격>(≪1894년농민전쟁 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고종 6년(1869) 3월에 전라도 光陽亂은 19세기에 들어 허다하게 기도된 모의 가운데 처음으로 거사를 일으키는데 성공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주도한 閔晦行은 20여년 전부터 異圖를 품고 영남과 호남을 편력하면서 동지를 규합해 왔으며, 또한 1년 전에도 이미 전라도 장흥에서 변란을 기도한 바 있었던 자였다. 변란 참가자들은 계획적으로 사전에 봉기를 준비하였으며, 봉건왕조 자체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대원군 집정기의 변란 사건들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李弼濟의 亂이었다. 이필제는 고종 6년에서 9년에 걸쳐 충청도 진천, 경상도 진주·영해·문경 등 네 곳에서 연속적으로 변란을 기도하였다. 이중에서 영해 변란은 네 차례의 변란 시도 중에서 유일하게 거사에 성공한 사건이었다. 봉기 참가자들은 모두 무기를 가졌을 뿐 아니라, 투쟁양상이 격렬하였고, 관아습격을 끝낸 뒤 재빨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유격전술을 구사하는 등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崔鳳周·張赫晋에 의해 주도되던 변란세력은 일찍이 1850년대부터 조직적 결속을 시작하였고, 구월산과 일월산을 근거로 무장봉기를 준비하였으며, 영남·호남·황해도 일대의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비록 거사를 일으키는데는 실패하고 사전에 적발되었지만, 조선왕조 자체를 적대시하고 있으며, 그 뿌리가 2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 변란세력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변란의 주도층은 세도정권이 성립함으로써 더욱 소외되고 그 몰락을 재촉받고 있던 몰락양반들이었다. 이들은 향촌사회에서 현실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향촌사회를 떠나 각지를 편력하다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변란을 기도하게 된 것이다.

 변란의 이념적 배경은 주로 정감록이었다.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는 정감록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 열강의 침공이 본격화하면서 조선사회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정감록이 내포하고 있는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한 부정과 결합함으로써 변란의 이념이 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대원군 집정기의 변란은 종래의 민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체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고을 단위의 고립성을 벗어났으며, 장기간에 걸쳐 몇몇 인물이나 세력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준비되었으며, 봉건왕조 자체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나타났다. 또한 병인양요 이후로는 반외세적인 구호도 이들에 의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농민항쟁을 전국적 차원의 농민전쟁으로 끌어올릴수 있는 조직적, 이념적 기반으로 성장해 갔다.

 그러나 대원군 집정기의 변란세력은 농민대중과의 결합이 절연된 상태로 머물렀다. 변란주도층이 내건 왕조타도라는 구호는 농민들의 정서나 현실적인 요구와는 괴리가 컸다. 1862년 임술민란 당시 전국 70여 개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지만 이서배가 아닌 수령을 죽인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던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반 농민들에게 왕조타도의 구호는 오히려 생각조차 할 수없는 불경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계성은 변란의 이념적 무기가 된 정감록의 성격과 변란주도층이 갖고 있는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정감록에는 새로운 사회의 숙명적인 도래와 병란과 재해, 질병으로부터의 도피나 살아남는 방법만 언급될 뿐이었다. 새 사회의 도래 과정이나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변란 주도층은 특권을 상실하였다고는 하나 신분적 속성은 양반이고 지식인이었다. 특히 이들이 처해있는 생활 역시 직접적인 생산자의 그것과 달리 대체로 떠돌이 생활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정서와 일반 농민의 그것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1869년 광양란과 1871년의 이필제의 난에서는 민란과 변란이 결합될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지만 변란주도층이 농민대중과 결합하게 된 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비로소 가능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볼때 대원군 집정기의 변란은 철종 말년의 지방분산적 임술민란에서 전국적 조직과 지도체계를 갖춘 동학농민전쟁으로 발전해가는 과도적 양상을 띠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成大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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