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3. 대원군의 대외정책
  • 2) 천주교 탄압:병인사옥

2) 천주교 탄압:병인사옥

 전 승지 남종삼이 ‘한·영·불 3국동맹’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남침기도를 저지하는 대가로 조선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달라는<새 건의문>을 휴대하고 雲峴宮을 방문, 이를 올리자, 대원군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그렇다면 프랑스 선교사를 속히 서울로 불러와 나와 면담할 기회를 주선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는 천주교인으로서는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남종삼은 지방에 피신하고 있다가 상경한 김면호와 대책을 상의하였으나, 베르뇌 주교가 있는 平山에 긴급 연락원을 보낼 경비마저 마련할 수 없어서 시일만 천연하게 되었다. 앞서 홍봉주의 운현궁 방문을 주선한 조기진의 경비조달로 겨우 베르뇌·다블뤼 주교를 서울로 불러오게 되었으나 이미 시일이 너무 지나 대원군의 격노만 사게 되었다. 일찍이 부대부인 민씨가 베르뇌 주교에게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조선에서의 종교자유를 청하러 오라는 편지를 보내라”177)Dallet, ibid., vol. 1, p.512.
≪한국천주교회사≫앞의 책, 하, 374쪽.
라고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뇌 주교는 “선교사가 정치에 관여할수 없다”는 태도로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병인사옥의 발생은 프랑스 선교사의 정치개입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조선 천주교 지도자들은 선교사를 이용, 러시아의 남침을 막아주는 대가로 대원군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어보자는 ‘3국동맹안’은 프랑스 주교와 사전 협의없이 입안한 방아책이었다. 둘째로 대원군은 주교와의 방아책협의까지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교들의 소극적 대응으로 마침내 선교사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선교사는 단순히 포교만이 아니라 정치적 불안을 조성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선교사들은 조선을 외국에 개방해야 한다는 조선개항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에 정면 도전이 아닐수 없다. 셋째로 선교사의 정치개입설은 조·불 양국이 시인하고 있다. 駐上海 프랑스 영사도 선교사의 조선 정치간여를 시인하고 있다.178)Ch. Martin, "Expédition de Corée-1866," Le Spectateur militaire, Ⅳ Série, t. 22(jouillet-septembre) 1883, pp.184∼185.
Archives du Ministère des Affaires Estrangères and Archives Nationales, Marine(Paris) on Korean-French Relations Between 1866∼1867 (<韓佛關係資料(병인양요)>,≪敎會史硏究≫2, 1979), 201∼202쪽.
禹澈九,<19C 후반 프랑스의 대외정책과 병인양요>(≪누리와 말씀≫3, 인천가톨릭대학교, 1998), 67∼68쪽.
병인사옥 후 조선정부가 청에 보낸 咨文에서도 프랑스선교사 학살이유를 “우리 나라는 지난 겨울 이래 兇徒匪類들이 당을 모으고 糾結하여 不軌를 은밀히 도모했기에 법에 따라 처형했을 뿐이다”179)≪日省錄(고종편)≫권 3, 328∼330쪽, 고종 3년 7월 8일, 「回咨文」.
≪高宗實錄≫권 3, 고종 3년 7월 8일.
라고 병인사옥의 정치적 연관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집정 2년여간(1864. 1. 17∼1866. 3. 10) 천주교 관용정책을 견지해 온 대원군이 갑자기 대박해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그것은 조선천주교 지도자들은 ‘외세개입’을 기도했다는 것, 그러므로 이들을 은밀히 不軌를 도모하는 ‘불궤집단’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원군은 외국의 군사개입은 곧 정부타도와 왕조멸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면서 ‘안보위기감’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北伯으로부터의 장계를 분석해보면 러시아의 국경침범(犯越行爲)과 통상요청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대원군은 천주교 대박해정책을 수립하게 되었다.

 남종삼은 그래도 일루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베르뇌·다블뤼 주교와 대원군과의 면담여부를 타진하기 위하여 1866년 1월 31일 운현궁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대원군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고향에 돌아가 춘부장(南尙敎)에게 안부나 전해주게”라고 말하자, 남종삼은 “모든 일이 전혀 가망없다”라고 직감하면서 크게 실망했다. 남종삼이 고향에 돌아가 부친께 대원군의 안부를 전하니, “네가 종교를 위하여 진력하는 것은 좋다마는 이미 너의 목숨은 위태롭게 되었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한다해도 종교를 욕되게 하는 언동은 삼가라”라고 유언으로 당부했다.

 당시 수렴청정하던 趙大妃는 보수적인 여성이어서 西學·西敎를 싫어했고, 영의정 趙斗淳·좌의정 金炳學을 비롯하여 각부 대신들도 위정척사정신이 강해서 철종 이래의 對천주교 완화정책을 지양하고 강경한 금압책을 채택할 것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대원군의 천주교 대금압령이 내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조대비는 드디어 금압전교를 발표했다.

요사이 서양 오랑캐의 일은 일대 변괴가 아닐 수 없다. 수만리 밖에서 온 兇種醜類(불 선교사)들이 함부로 출입하면서 邪術(천주교)을 자행하고 있다. 이리하여 나라를 원망하고 희망을 잃은 무리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의 인륜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風敎를 더럽히고 있다. 이는 天道로도 용서받지 못하고, 王章으로도 容赦할 수 없는 소행이다. 이들을 차례대로 잡아들여 빠짐없이 誅討하라(≪承政院日記(고종편)≫권 2, 고종 3년 1월 24일.≪龍湖閒錄≫권 3, 496∼497쪽, 938:大王大妃傳敎).

 이리하여 대원군은 마치 로마 제정기 황제숭배를 거부했다해서 그리스도교도를 비공인 종교단체(religio illicita)로 단죄, 대박해를 가했듯이 천주교도를 유교적 전통질서에 반항하는 ‘不軌집단’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마침내 이를 邪敎로 규정, 대금압령을 내렸다. 병인사옥은 이미 조대비의 금압전교가 내리기 전부터 개시되었다. 2월 14일 포도청은 경복궁 중건의 재정염출을 위한 재산조사라는 명목으로 태평동 소재 홍봉주의 가택을 수색하면서 베르뇌 주교의 행장도구까지 엄밀하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 체포의 예비검속이었다. 조대비의 전교가 발표된지 이틀후인 2월 23일 홍봉주·베르뇌를 체포하였고, 이어 2월 25일에는 丁義培와 신부 브르뜨니애르를 검거하였고, 2월 27일에는 龍仁·廣州에서 볼리외·도리 두 신부를 체포하였으며, 3월 1일에는 남종삼을 체포함과 동시에 3월 2일 이들 전원을 義禁府로 송치하였다. 대원군이 직접 문초하면서 베르뇌 주교에게 천주교를 버리고 개종(背敎)할 것을 강요했으나, 베르뇌는 聖敎의 진리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고 강조하면서 結案書를 손수 작성하여 단호히 배교를 거부하자, 대원군은 이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180)≪高宗實錄≫권 3, 고종 3년 정월 9∼16일.

 3월 7일 남종삼·홍봉주를 謀反不道罪로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고, 베르뇌·브르뜨니애르·볼리외·도리 등 4명은 ‘犯越入國傳道罪’로 露梁 사장에서 처형 효수했다.

 정부는 3월 4일 천주교 대금압을 선전하는 조대비의 교명을 추가로 발표하면서 압수한 천주교 관계서적과 그 판본을 불살라 버리라고 전국 八道四都에 시행령을 내렸고, 3월 7일에는 五家作統法을 시행, 천주교도를 철저 수색 검거할 것, 3월 10일에는 吏民 중에 사학도당을 고발하는 자에게는 공로를 표창하고 이들을 은닉하는 자는 중형을 내린다고 발표하는 동시에 海西 湖西 연해를 왕래하는 모든 선박을 감시, 본국인과 다른 서양인이 있으면 선참후계하라는 엄명을 내렸다.181)≪高宗實錄≫권 3, 고종 3년 정월 18∼24일.

 3월 6일 충청도 堤川에서 뿌르띠에·쁘띠니꼴라를 체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날 全長雲·崔炯이 참수되었고, 3월 11일 뿌르띠에·쁘띠니꼴라 두 신부와 丁義培·禹世英이 노량 사장에서 처형되었다. 특히 전장운·최형 양인은≪聖敎日程≫과≪省察記略≫등 가톨릭교 서적을 간행, 천주교 발전에 공헌하였고 신앙심이 독실한 천주교 교인이다. 이날 충청도 內浦에서 黃錫斗와 함께 다블뤼 주교를 체포했고, 오매트르·위앵 두 신부는 스스로 자수하여 구금되었다. 특히 다블뤼 주교는 조선에 밀입국한 지 21년간 천주교 전도에 진력하였기 때문에 유창한 조선어로 천주교의 교리를 위해 변호했다. 이들 프랑스 선교사 3명은 保寧 公忠水營으로 압송, 황석두·張周基와 함께 3월 23일 처형되었다.182)≪高宗時代史≫권 1, 고종 3년 정월 25일, 185쪽.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고, 나머지 리델·페롱·깔래 등 신부 3명은 조선인 천주교도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 있었다. 정부는 남종삼·홍봉주를 처형한 후 후환을 미리 방지한다는 조치로 처자를 죽이는 형벌인 孥戮之典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근세조선정감≫에는 병인사옥의 처참한 학살행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때 나라 안을 크게 수색하니 포승에 결박된 죄인이 길에서 서로 바라보일 정도였다. 捕廳獄이 만원되어서 이루 裁決할 수 없었다. 그중에는 어리석은 백성, 어리석은 아낙, 어린 아이들 등 무식자가 많았다. 포장이 민망히 여겨 천주교를 배반한다는(背敎) 맹세를 하도록 설득했으나, 신도들은 듣지 아니했다. 이에 刑杖으로 때려서 기어코 회개시키고자 하니,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고 피가 청위에까지 튀어 올랐다. 신도들이 환호하기를 血花가 몸에서 나니 장차 천당에 오르겠다 하였다. 포장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죄인을 묶어 옥에 가두어 놓고 차례대로 목졸라 죽였다. 죽일때마다 배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신문하면, 비록 어린 아이들이라도 그들 부모를 따라 천당에 오르기를 원했다. 대원군이 듣고서 다 죽이도록 명하고 어린 아이들만 살려주었다. 시체를 水口門 밖에다 버려서 산같이 쌓이니 백성들이 벌벌 떨며 威令을 더욱 두려워했다(朴齊絅 저, 李翼成 역,≪近世朝鮮政鑑≫, 탐구당, 1981, 56∼57·154쪽).

 이러한 처참한 살륙행위는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에도 자행되었다. 평양 永明寺구내에 서 있는 巡撫中軍 鄭志鎔의<斥邪紀績碑>에 살륙참상이 기록되어 있다.

천주라는 가르침(종교)이 서양으로부터 우리 나라 안에 유입되었다. 선교사는 도시로 드나들며 민심을 어지럽히면서 유혹하기를 ‘귀신에게는 제사지내지 말고, 조상의 사당을 철폐하라’고 했다. 또 通貨(재물을 나누어줌) 通色(내외하지 않음)으로 상통하면서 남녀가 뒤섞여 생활하고 있다. 그들의 가르침은 墨子의 兼愛說과 불교의 허무설과도 비슷하다.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천주교를 전도하니, 그 세력은 날마다 불어났다. 이에 순무중군 정지용은 병인년 정월 초하룻날 三門을 활짝 열고 군민을 모아서 수십 수백 명의 邪類들을 뜰 아래로 잡아다가, 그들 졸개들은 귀양을 보내고 괴수는 杖殺해서 강물에 던지고, 그들의 책과 牌(십자가)는 불태우고 부수어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무리들에게는 충효로서 가르치고 이해로서 타이르니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새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李能和,≪朝鮮基督敎及外交史≫下, 朝鮮基督敎彰文社, 1928, 44쪽).

 “수구문 밖에 버린 시체더미가 산처럼 쌓였다”는 서울의 천주교도 학살행위와 “괴수를 쳐죽여서 강물에 던졌다”는 평양의 잔인상은 조금도 다를바 없다. 병인사옥 당시부터 3년 동안 이같이 처형된 천주교도수는 약 8천 명이라고 전하고 있다.183)≪朴殷植全集≫(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75), 상, 70쪽:≪韓國痛史≫, 제2편, 10쪽.
Homer B. Hulbert, The History of Korea(Seoul, 1905), vol. 2, p.211.
Joseph H. Longford, The Story of Korea(London, 1911), p.190.
≪한국천주교연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55), 244쪽.
≪한국통사≫에 의하면, 대금압령이 내린 초기에 서울에만도 1만 명이고 전국 8도에서 체포된 교도 12만 명을 진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하나 이는 과장된 숫자이고, 천주교회측 자료의 공통된 숫자는 3년간 학살된 교인수는 대략 8천명이라고 집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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