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3. 대원군의 대외정책
  • 5) 대일 강경책

5) 대일 강경책

 조선시대의 대외관계는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외교를, 일본에 대해서는 교린외교를 고수하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事大交隣정책에 따라 중국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동지사 등 燕行使節을 파견함으로써 대중 사대의례를 고수했고, 일본에는 通信使를 부정기적으로 파견해서 대일 교린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일본의 경우 일본의 왕이 즉위한다든가 새 장군이 교체된다든가 국가적 행사시에 통신사를 부정기적으로 파견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草梁 倭館(부산시 중구 동광동 龍頭山 公園 일대) 또는 對馬島主를 중개로 대일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19세기 후반기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일본의 토쿠가와막부(德川幕府)는 쇄국정책을 타파하고 개항정책을 채택, 구미 여러 나라와 수교하면서 문호를 개방했다. 토쿠가와 막부는 미·영·프·러 등 구미 제국과 입약한 후 그 사유를 조선에 통고하자, 조선은 “구미 4개국과 통상하는 일은 柔遠之道에 해로움이 되지 않는다”220)≪哲宗實錄≫권 12, 철종 11년 8월 8일.
≪通文館志≫(조선총독부, 1944), 229쪽, 철종 11년조.
라고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일본은 철종이 승하함에 哲宗弔慰使를 파견, 대한 선린외교의례를 지켰다. 1866년 11월 프랑스함대를 물리친 후에도 조선은 병인양요 전말을 적은 書契를 대마도주를 통해 토쿠가와 막부에 전달하면서 조일간 우호관계를 돈독히 했다.221)≪龍湖閒錄≫권 4, 68∼69쪽, 1007:10월 14일.

 1867년 토쿠가와(德川慶喜)장군은 조선의 병인양요 통고에 대한 회답국서를 작성하여 히라야마(平山圖書頭)·고가(古賀筑後守) 등 친선사절단을 파견한다고 통고했다. 국서에서 병인양요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邊海가 소요해진데 대한 위로와 이웃 나라의 의리로 보아 사절단을 파견하니 접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홍콩(香港)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하치노해(八戶順叔)가 친선사절단 파한설을 침공설로 과장 날조해서 廣東발행≪中外新聞≫에 투고하여 보도했다. 이같은 일본의 한반도 침공설이 기사화되자 청국정부는 예부를 통해 조선에 보도내용을 기록한 咨文을 보냈다. 1867년 4월 10일자 자문에 의하면, “근래 일본은 무비가 번성하여 현재 화륜군선 80여 척을 보유하면서 해외의 조선을 征討할 뜻을 가지고 있다. … 조선국왕은 매 5년마다 반드시 에도(江戶)에 가서 大君을 배알하고 獻貢하는 것이 古例로 지켜오고 있다. 조선국이 이같은 고례를 폐지한지 오래 되므로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겠다는 것이다.”222)≪龍湖閒錄≫권 4, 163∼166쪽, 1029:禮部咨文(3월 6일).
≪同文彙考≫권 3, 2479∼2480쪽.
≪日本外交文書≫권 1-1, 69∼79쪽.
이같은 자문을 접수한 조선정부는 대마도주에게<일본의 조선침공계획설>의 사실여부를 질문하면서 해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토쿠가와 막부의 사절단 파견을 정식으로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1868년 1월 3일 王政復古를 선언하면서 대마도주 소오(宗義達)를 外國事務補로 임명하고(4. 15), 메이지(明治)維新의 뜻을 조선정부에 통고케 했다. 이에 소오는 1월 23일 히구치(樋口鐵四郞)를 大修大差使에 임명하면서 부산 草梁왜관에 보내어 국서를 전달케 했다. “요사이 우리 나라에는 시세일변하여 大政이 황실에 귀일하였다. 귀국과의 정의가 돈독하므로 귀국에 別使를 파견, 그 전말을 알리고자 하니 양해하기 바란다”223)≪龍湖閒錄≫권 4, 211∼212쪽, 1060:對馬島主 書契.라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다.

 조선정부가 국서를 열어보니 종래 조일간 교린외교문서와는 서식상 큰 변화를 발견하게 되었다. 우선 문구의 변화이다. “우리 나라 황조는 연면하여 한줄기로 계승해오고 있다”는 것, 대마도주 이름 밑에 ‘朝臣’을 붙였다는 것, ‘皇上之誠意’와 ‘奉勅’등 생소한 용어가 나열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마도주 소오씨(宗氏)의 직함을 ‘左近衛少將’이라 변경했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종래 대마도주는 조선정부가 새겨서 보낸 圖書[印符]를 사용해 왔는데, 이제 새로 새겨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조선정부가 이같은 격식에 맞지않은 ‘格外國書’를 수리한다면 조일간 교린형식이 對淸 사대형식과 동일하게 된다고 간주, 대일강경정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동래부사는 1868년 4월 8일 이같은 격외의 서계를 수리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국서와 함께 일본사신을 되돌려 보내고 말았다.224)≪龍湖閒錄≫권 4, 214∼215쪽, 1064:東萊府使謄報草(3. 16).

 조성정부는 일본이 왕정복고를 선언할 때까지 도서와 歲賜米를 급여하면서 대마도 島守를 藩臣대우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직후 대마도의 藩士(對州參政) 오시마(大島友之允)는 歲遣米와 함께 도서문제도 改新할 것을 일본 외무성에 건의한 바 있다. “文引은 조선에서 보낸 도서(인부)를 말한다. 이는 조선국 군주가 관직을 신하에게 줄 때 급여하는 銅印인바, 각기 성명을 새긴 도장으로서 勘合之印이라 칭한다. 이같이 도수가 전례대로 받아왔으니, 이는 對州의 無知不文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이 대마도주를 藩臣대우함은 非禮로서 참을 수 없는 유감지사이다.”225)≪日本外交文書≫권 2-2, 261∼265쪽, 320:附記 7.

 조선시대 수백년 동안 조선은 교린정책 아래 회유와 무마라는 강온 양면으로 대일 교린외교를 전개해왔는데, 이제 메이지유신 후 일본은 외교문서의 서식을 청국황제와 동등한 격식으로 작성하고 있다. 이에 부산 倭學訓導 安東晙은 국서수리 거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마도주 성씨 밑에 ‘朝臣’이란 문구, 조선정부가 만들어 보낸(鑄送) 도서를 반납하고 새 도장을 만들어 사용한다 함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 더군다나 도서주송은 일본의 소청에 따라 시행한 것인데, 갑자기 이를 변개하여 새 도장을 만든다함은 舊章을 지켜서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는 처사라고 볼 수 없다고 해명했다. 이에 동래부사 鄭顯德은 1869년 2월 이같은 두 가지 이유를 들면서 왕복서계의 문구를 격식에 맞게 개수한다면 수리하겠지만 그대로는 접수할 수 없다고 강조, 일본의 국서와 差使를 되돌려보내고 말았다.226)≪龍湖閒錄≫권 4, 212∼213쪽, 1062:東萊府使狀啓.

 일본은 1869년 8월 15일 외무성을 설치하면서 대마도주에게 왕정복고를 알리는 서계를 조선정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서식상 격식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 요시아키라(宗義達)의 서계를 반환하고 말았다(12. 20). 이와 같이 메이지 정부의 국서수리여부 문제는 1년 동안 교섭해보았지만 조선의 강경한 대응조치로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일본은 대마도주 소오씨(宗氏)의 직임을 회수하고 정부가 직접 나서 대한 외교교섭을 절충해보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리하여 일본은 1870년 1월 7일 權大錄 사다 모토이치로(佐田素一郞)·少錄 모리야마(森山茂)를 대표로 부산에 파견했다. 그러나 역시 동래부사는 종전과 같이 편지를 고쳐쓰라는 ‘書契改修’를 요구하면서 수리를 거부했다. 이들 일본 대표는 부산 초량 왜관에서 동래부사를 상대로 국서 수리교섭을 별여보았지만 끝내 실패하고 1870년 4월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일본에는 대한 온건정책을 지양하고 대한 강경정책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 메이지유신 직후 대마도주의 ‘도서 개정’을 건의한 바 있는 오시마(大島友之允)는 조선정부의 국서수리 거부를 계기로 대한 소극정책을 지양하고 대한 적극정책으로 침략전쟁에 의해 정복한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동양제패를 주장했고, 나아가 가쓰(勝海舟)는 해군확장으로 한반도를 근거지로하여 청국까지 정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국서수리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마침내 征韓論이 대두되었다.227)≪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외무성, 1965) 상, 60∼61쪽.

 대한교섭에 실패하고 돌아온 사다(佐田) 등은 동년 3월 대한온건책을 지양하고 조선정벌을 주장하는 建白書를 정부에 제출했다. 건백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무관을 중용하면서 兵制를 개편하고 있다. 문관은 일본과 수호를 희망하지만, 무관은 일본과의 국교수립을 반대하면서 서계수리를 방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력으로 문죄, 정벌하지 않으면 皇威가 서지 않는다. 병력 30개 대대를 편성하여 전후 4路로 침공한다면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 만약 청국이 조선을 원조한다면 청국에 까지 진격해야 한다. 국제관계로 보아도 불·로·미 3국이 한반도 침공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어서 이 기회를 놓치면 脣亡齒寒의 후회를 하게될 것이다. 재정면을 따지더라도 조선정벌은 北海道개척보다 유익한 일이다.228)≪日本外交文書≫권 3, 138∼140쪽, 88:附屬書 1(庚午 3월). 위에 든 건백서는 3백년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한반도 정복야망을 근대화한 정복 이론으로서 정한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1870년 6월 1일 주일독일공사 브란트(Von Brandt)는 3백 명의 장병을 태운 군함 헤르다호를 이끌고 부산에 기항하면서 조선이 영·프와 전쟁을 할 경우 독일 조난선원 구제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조선측은 일본인 5명이 동승한 것으로 보아 필시 館倭가 洋醜등과 화응했다고 간주, ‘倭洋同類’라고 규탄하면서 교섭을 거부했다.229)≪高宗實錄≫권 7, 고종 7년 5월 11일.
≪同文彙考≫권 3, 2488쪽.

 한편 일본정부도 1870년 10월 12일 外務權少丞 요시오카(吉岡弘毅)·權大錄 모리야마(森山茂)·히로조(廣津弘信) 등을 파견했다. 이들은 1870년 12월에 부산에 도착, 1871년 5월 17일까지 6개월간 머물면서 훈도 안동준과 서계수리문제를 교섭했지만 동래부사 정현덕의 대일강경책으로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조일간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일본은 대한 무마책으로 현직 외무대승 마루야마(丸山作樂)가 조선침공을 기도했다 해서 이들에게 禁獄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이에 대마도주는 通詞 우라세(浦瀨最助)를 파한하는 동시에 도주자신이 직접 방한, 국면전환을 시도해보려 계획했지만, 때마침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침입(신미양요)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다. 1872년 7월 14일 요시오카(吉岡) 등은 조선과 이 이상 서계수리교섭사를 재론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전원 철수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일 교린관계는 일시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일본은 국면전환을 위하여 外務大丞 하나부사(花房義質)를 초량 왜관에 급파하면서 대한교섭의 전권을 부여했다.230)≪高宗實錄≫권 9, 고종 9년 6월 7일.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상, 64∼70쪽.

 일본이 1871년 청일조약을 체결하고 1873년 3월 일본외상 소에지마(副島種臣)가 비준서 교환차 청국을 방문, 李鴻章과 교섭하면서 조청간의 관계에 언급, “조선의 和戰권리에 청국이 간여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고 7월 26일 귀국했다. 한편 일본의 침략위협을 우려하던 대원군은 동지사 閔致庠으로부터 “일본은 이미 중국의 臣服之國이 아니기에 청황제에 대해 稱臣하지 않는 것같다”는 보고를 받고, 일본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미양요를 치른 직후라 대원군은 일본은 서양오랑캐와 다를바 없다는 ‘倭洋一體’라 규정하면서 대일 강경책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대원군은 예부상서 萬靑藜에 보낸 서한에서 “우리 나라는 文事와 武備를 일신하여 안으로는 정치를 개수하고 밖으로는 외침을 막으리라”라고 전제하면서, “지키며 싸우되 결단코 왜의 跳梁을 방치하지 않겠다”라고 강경한 斥倭政策을 강경책을 밝히고 있다. 심지어 대원군은 경제봉쇄령을 내리면서 동래 왜관에 양곡과 薪炭공급마저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왜관은 자구책으로 밀무역(潛商) 암거래로 식량난을 타개하려 했다. 이에 대원군은 1873년 6월 “잠상 암거래행위를 철저히 단속하라”는 傳令書를 내리면서 밀무역을 단속했다. 일본정부는 “조선정부가 이같은 무례한 政令을 공포한 것은 일본 거류민을 축출하려는 의도이다”라고 비난하면서 실력행사로 대한 강경대응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231)≪日本外交文書≫권 6, 282∼283·303쪽.
≪日省錄(고종편)≫권 9, 고종 9년 4월 4일.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상, 71∼72쪽.

 정한론은 이같은 조일간 서계수리문제를 둘러싸고 대두되었다. 1873년 8월 17일 삿슈우(薩州)軍閥 사이고(西鄕隆盛)·이다가키(板垣退助)·외상 소에지마(副島種臣) 등 정한파는 지금 당장 특사를 파한, 조선과 담판해보다가 조선이 불응할 경우 대병을 동원 조선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한편 이와쿠라(岩倉具視)·기도(木戶孝允)·오쿠보(大久保利通)·이토(伊藤博文) 등 遣外使節團이 구미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2년만에 귀국하면서 성급한 정한론강행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 문치파(비정한론파)는 外征에 국력을 소모함은 시기상조이며 현재 일본은 무엇보다도 내치에 충실을 기하면서 국력을 배양할 때라고 강조했다. 조선에 遣韓사절파견을 주장하는 정한파와 이를 반대하는 문치파간에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문치파 參議들은 사표를 제출하면서 정한론을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1873년 10월 24일 ‘遣韓使節件’은 칙명으로 무기연기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873년 12월 14일 同副承旨 崔益鉉은 時政의 폐단을 논하면서 대원군을 배척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의하면, 대신 六卿은 建白의 논의가 없기 때문에 정치가 문란하고 정론 직언이 없다는 것,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 들이니 생민은 어육이 되고, 공직자는 사리에 어긋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私人들은 계책만 추구하고 있어서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232)≪高宗實錄≫권 10, 고종 10년 10월 25일.
≪龍湖閒錄≫권 4, 291∼292쪽, 1113:同副承旨崔益鉉上疏.
최익현은 1873년 12월 22일(음 11. 3) 2차상소문을 올리면서 대원군의 “國政干預를 금지할 것”을 주장, 대원군은 하야했다.

 이로써 대원군의 10년 집정은 종식되고, 국왕의 친정이 개시되었다. 12월 24일(음 11. 5) 정부는 “국왕이 서무를 親裁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다.233)≪高宗實錄≫권 10, 고종 10년 11월 3일.
≪龍湖閒錄≫권 4, 297∼303쪽, 1115:戶曹參判崔益鉉疏略.
심지어 영의정 李裕元은 “우리 나라가 일본과 통신한 지 3백년, 그동안 양국간 전쟁이 없었고, 오로지 화호만 있었더니, 지난 3년간 양국간 무단히 隔阻가 발생, 이제 양국관계가 단절되기에 이르렀다”234)≪高宗實錄≫권 11, 고종 11년 6월 29일.라고 대원군의 척왜정책은 실책이라고 규탄했다.

 대원군의 실각을 계기로 일본은 정한론 구현을 위해 적극적인 대한강경책을 수립, 마침내 1876년 대한포함책략에 의해 조일조규를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조선을 개항,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구축했다.

<金源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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