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4. 대원군 정치의 성격과 의의

4. 대원군 정치의 성격과 의의

 19세기 중엽의 조선왕조는 봉건말기적 제 모순의 심화로 붕괴에 직면해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농민항쟁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자본주의 열강이 침입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당시 역사에 제기된 과제는 봉건왕조체제를 지양하고 새로이 싹트고 있는 근대적 요소들을 보호·육성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순조·헌종·철종 연간에 정권을 장악하였던 외척 문벌세력은 봉건체제의 위기를 치유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1862년의 임술민란은 비단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을 위태롭게 하는 정도에 머문 것이 아니라 지배체제 자체의 위기를 가져왔다.

 봉건 지배층은 왕조 자체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서로 타협해서 강력한 구원자를 만들어 냈다. 대원군이 바로 그러한 존재였다. 안동 김씨 가문을 대신해서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으로 인해 정국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진적 세력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근대 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길과 멸망의 경지에 빠진 봉건왕조체제를 옹호재편하는 두 가지 길이 대원군의 앞에 놓여 있었다. 대원군은 두번째 길을 걸어갔다.

 대원군의 집권은 정변으로 쟁취한 것도 아니며 사회혁명적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대원군은 신속하게 새 정치권력을 조직해야 하였다. 그는 선파 종친세력과 고위 무신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그는 일부 안동 김씨 세력, 풍양 조씨 세력과도 타협하였으며, 과거제도를 활용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을 형성하였다. 또한 중인·서리층도 포괄하였다. 대원군이 새로이 조직한 정치권력은 조선봉건왕조에서 전통적으로 지배집단에 포함되어 온 기존 문벌세력의 재편성에 불과하였다.

 대원군은 무엇보다도 우선 왕조체제를 재건하려 하였고, 이 일은 그에게는 곧 왕실을 강성하게 하는 일로 인식되었다. 대원군은 조선왕조 초기의 중앙관제를 복원시켰으며, 경복궁 중건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대원군 정권은 임술민란이란 미증유의 농민봉기를 겪은 직후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향촌사회를 안정화하는 시책에 착수해야 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위해 향촌사회의 토호무단을 금압함으로써 사적 지배권력을 억제하고 수령을 중심으로한 공적 지배권력의 공고화를 꾀하였다. 서원철폐령을 내린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민란의 직접적 동기로 작용하였던 삼정의 문란을 부세운영의 합리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대원군 정권은 전정의 합리화를 위해 전국적인 査結작업을 통해 收稅結을 확대하였고, 還政과 관련해서는 社倉制적 운영방식을 도입하였다. 또한 軍政을 정비하기 위해서 양반에게도 군포부담을 지우는 戶布制를 실시하였다. 대원군 정권의 부세운영 개선노력은 이전 시기 삼정운영의 문란상을 개선한 것이지만, 당시의 수취관계의 모순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세운영의 개선책은 일시적인 효과만을 거두었을 뿐, 향촌사회의 지속적인 안정을 가져다 주는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대원군의 향촌사회 안정화 정책은 임술민란에 분출된 농민들의 저항에 겁먹은 양반 부호층을 위협해서 봉건수취체제 안에서의 중간착취자의 자의적 수탈과 횡포를 일시적으로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정치적 압제와 경제적 착취 속에서 절망적인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던 백성에게 대원군이 마치 그들의 소망을 풀어줄 수 있는, 즉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권력자인 것 같은 환상을 갖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원군 집권기에는 종래와 같은 형태의 민란의 발발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향촌사회 안정화 정책은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의 변혁을 전제로 하지 않았고, 부세체제의 운영을 개선하는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민란의 재발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대원군 정권 후반기에는 민란이 다시 발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전에 보기 어렵던 새로운 형태의 농민항쟁이 대원군 집권기에 더욱 격화되었다. 종래의 민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특징이 대원군 집정기 농민항쟁 속에 표출되었다. 그것은 고을 단위의 고립성을 벗어났고, 장기간에 걸쳐 몇몇 인물이나 세력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준비되었으며, 봉건왕조 자체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변란이었다. 변란의 주도세력은 병인양요 이후로는 반외세적인 구호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농민항쟁을 전국적 차원의 농민전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조직적·이념적 기반으로 성장해 갔다.

 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은 대외적 위기에 직면한 대원군 정권이 봉건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위정척사사상에 의거하여 전개한 정책이었다. 위정척사사상은 외래침략에 대해 일시적으로 강고한 저항사상이 될 수는 있으나 변혁사상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도 대원군이 봉건왕조의 옹호자라는 역사적 시각에서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봉건지배층은 천주교를 유학의 가치관과 고유질서를 파괴하는 이단세력으로 간주하였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도 봉건왕조 이데올로기의 순수성을 고수하고 종묘사직을 보호하기 위한 동기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봉건왕조 지배체제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위정척사 사상과 쇄국양이정책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19세기 중엽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나라를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스스로 중세적 봉건제도를 지양하고 조선후기 사회의 태내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발전하고 있던 근대적 요소들을 보호·육성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또한 외부로부터 거세게 밀어닥치는 자본주의 열강의 침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면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능동적으로 적응해 가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대원군 정권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대원군 정권은 근본적으로 양반관료 지주계급의 이익과 요구에 기초하여 그들의 물질적 기초인 봉건제도를 지키려 하였고, 국제관계에서 새롭게 조성된 민족적 위기를 전진적으로 인식하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이에 대처하기 위한 민족역량도 키워내지 못한 보수반동정권이었다.

<成大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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