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1. 강화도조약과 개항
  • 1) 조약체결 전의 국내외정세
  • (1)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조선정책

(1)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조선정책

 메이지유신 이후 강화도조약 체결까지 조·일간의 외교관계의 전개과정은 대체로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조일간의 외교창구가 전통적인 통로 즉 쓰시마번(對馬蕃)을 매개로 이루어지던 시기(1868∼1870), 두 번째로는 메이지정부가 국내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조선과의 교섭사무를 중앙의 외무성 관할로 흡수하면서 외무성의 관료가 파견되어 교섭을 추진하였던 시기(1870∼1873), 끝으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나고, 운요호사건을 거쳐 조약을 체결하였던 시기(1874∼1876)이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토쿠가와(德川)막부는 열강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1854년 화친조약을, 1858년에는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 각기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주요내용은 영사·공사의 교환과 내지여행권, 카나카와(神奈川)·나가사키·니이카타(新潟)·효고(兵庫)·시모타(下田) 등 5개 항구의 개방, 도쿄(東京)·오사카(大阪) 지역에서 외국인의 상업활동 허용, 외국인 거주권·임차권인정, 개항장에서의 자유무역과 협정관세, 아편무역금지, 화폐교환규정 등을 설정하고, 외국인의 유보규정 폐지와 영사재판권 등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열강은 일본에서의 자유무역을 규제하는 조항을 거의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종속적으로 편입되었던 것이었다.236)宮地正人,≪國際政治下の近代日本≫(山川出版社, 1987), 20∼26쪽.

 이와 같이 막부가 열강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자 굴욕외교를 비판하면서 막부와 대립해왔던 사츠마(薩摩)·쵸슈(長州) 연합세력은 攘夷를 기치로 그들의 세력기반을 확장해 나갔다. 막부의 지방영주에 대한 통제력 약화와 국내 불안을 계기로 반막부세력은 마침내 1867년 12월 23일 尊王攘夷를 내걸고 쿠데타로 왕정복고(메이지유신)를 선언하였다. ‘洋夷’를 내세운 유신정변에 대하여 막부는 1868년 1월 10일 영국·프랑스·미국·네덜란드·이탈리아·프러시아 6개국 대표와의 회담에서 정변의 불법성을 강조하고, 기존의 조약체제 준수를 약속하면서 열강의 지지를 호소하였으며, 이에 각국 대표 또한 막부가 정통정권임을 인정하였다. 이어 17일 막부는 미국 공사관원 포트만에게 에도(江戶)-요코하마(橫浜)간 철도부설권을 주었다. 막부와 천황정권의 대립은 곧 전국적인 내전으로 확대되었다(戊辰戰爭).

 내전 초기 양이를 기치로 봉기하였던 유신정권은 열강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1월 17일 불평등조약체제의 유지를 보장함으로써 외국과의 화친을 국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열강은 자국민의 보호와 내전 이후 자국의 이익 확보를 위해 국외중립을 선언하여 불간섭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 시기 구미열강은 과격한 수단에 의한 개국과 자유무역의 강제가 상대국 국내의 혼란과 기존정권의 약체화를 초래하여 무역의 확대를 저해하는 무정부상태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것을 세계 각 지역에서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열강이 취한 외교정책의 기본방침은 국내세력 중 대외강경파의 반발이 강할 때에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강경 대처하되, 자유무역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존정권에 대해서는 정권의 존립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만약 기존 정권의 유지가 불가능해질 경우에는 그와 같은 정권을 비폭력적으로 위로부터 조기에 수립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전에서 천황세력이 전세를 유리하게 끌어가는 가운데 신정부는 1868년 3월 막부체제 하에서 조선외교를 담당하던 쓰시마번의 특별한 권익과 지위를 인정하고 신정부 하에서도 조선외교를 위임할 것임을 통고하였다. 신정부는 쓰시마번으로 하여금 일차적으로 조선정부에 대하여 천황정권의 성립과 신정부가 외교권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통고하도록 명령하였다. 쓰시마번으로서는 신정부의 명령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조선외교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쓰시마번은 왕정복고 통고가 조·일간의 새로운 외교관계의 시작이라는 중요성을 감안하여 중앙정부의 외교담당관과 상의하여 왕정복고를 알리는 외교문서의 원안을 작성하였다.

 쓰시마번으로서는 특히 조선정부로부터 받아 사용하였던 圖書의 변경 등을 조선정부가 승인하리라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쓰시마번은 조선국 담당관리의 양해를 얻기 위하여 정식 사절(大修大差使)의 파견에 앞서 선발관원(幹事裁判)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간사재판이 전달할 외교문서는 신정부와 협의하여 작성하였던 大修大差使 서계의 원안에 덧붙여 가까운 시일내 정식 사절을 파견하여 왕정복고를 통지한다는 사실과 외교문서에는 신정부가 수여한 新印을 사용한다는 점을 미리 알리는 것이었다.

 간사관 가와모토 큐자에몬(川本九左衛門)이 1868년 9월 29일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다. 정식 사절 히구치 테츠시로(樋口鐵四郞) 일행은 12월 19일 초량 왜관에 도착하였고, 이에 앞서 문정을 위해 입관한 동래부 왜학훈도 安東晙에게 가와모토는 재판서계 등본을 제시하고 왕정복고와 이에 대한 통지를 위한 대수대차사의 파견, 그리고 신인 날인의 이유 등을 설명하였다. 서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日本國 左近衛小將對馬守 平朝臣義達

 呈書 朝鮮國 禮曹參議公 閤下

아뢰올 바는 우리 나라의 시세가 크게 바뀌어서 정권이 황실에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귀국과의 隣宜를 굳게 하는 데에도 크게 기뻐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머지않아 別使를 보내어 그 전말을 具陳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갖추지 않겠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교토(京都)에서 조정으로부터 勅命을 받아 특별히 상을 받고 작위를 올려 받아 좌근위소장으로 進官하였습니다. 거기에 또한 교린의 직을 영원토록 담당하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證明印記를 받았으니, 요컨대 양국 교제는 더욱 誠信을 두터이 하고 영원히 변함이 없도록 하라는 叡慮(천황의 뜻)이니 은혜가 지극합니다. 이번 서한에는 특히 신인을 찍어 조정에 성의를 표합니다. 귀국 역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날 圖書를 받아 (교제를 해) 온 것은 후의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특명이니 어찌 以私害公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제 뜻이 이와 같습니다. 귀조가 다행히 이를 체량하시길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日本外交文書≫1권, 690쪽).237)玄明喆,<개항전 한·일 관계의 변화에 대한 고찰>(≪國史館論叢≫72, 國史編纂委員會, 1996)에서 재인용.

 조선측 접대관인 동래부 왜학훈도 안동준은 ‘황실’·‘봉칙’ 등 종래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와 함께, 전통적으로 교역에 사용하였던 조선으로부터 받은 도서를 무단으로 폐지한 것 등은 외교 격식에 어긋나는 사실임을 들어 접수를 거부하였다. 왜관의 관수와 간사관은 거듭하여 일본국내의 정치상황을 설명하고 서계의 접수을 요청하였으나 훈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사재판이 왜학훈도를 면접하였던 다음날 대수대차사가 왜관에 도착하였다. 같은 달 21일 대수대차사 히구치는 간사관이 언급하였던 일본국내의 사정을 설명하고 선례에 따라 대수대차사를 위한 접위관과 차비역관의 파견과 연향설행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훈도는 대수대차사는 규외의 것이며, 또 서계 내용 중 위격의 문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여 즉각 귀환을 요구하였다.238)田保橋潔, 앞의 책, 상, 150∼156쪽.

 동래부의 외교문서 접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은 외교문서의 접수와 회답을 거듭 요청하였다. 쓰시마번주의 거듭되는 서계접수 요청에 2월 7일 훈도 안동준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대개 귀국과 폐방이 교호한 이래 義理가 형제의 孔懷와 같고 信義가 강산이 帶礪한 것과 같아서 왜관을 설치하여 서로 交隣하는 데 힘쓰니, 진실로 이는 大經이요 大法이다. 이후 300년 간 어찌 조금이라도 경법상에 소홀한 점이 있었는가. 이는 비단 위에서 행했을 뿐만 아니라 밑에서 본받는 것도 역시 그러하여, 양국에서 主幹하고 斡施하는 사람들이 經法을 服膺하여 전에 닦은 것에서 어긋남이 없으니, 오늘날 그 직을 맡고 그 일을 장악하는 사람이 이를 버리고 무엇을 구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순부된 서계가 왜관에 도착한 후 여러 달 동안 수리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서계의 왕복은 매우 소중한 일이며, 대격식에 非違하지 않는다면 왜 지체하여 봉납하지 않겠는가. 貴船이 온 것을 조정에 전달하고 또 가져온 서계도 역시 당연히 南宮(예조)에 올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먼저 살펴보았는데, 외면상 직함이 전과 다르고, 비록 승진하였다는 것을 안다고 하여도 姓字 밑에 朝臣이라는 두 글자를 붙이는 것은 무슨 格例인가. 이를 따라서 회답한다고 하면 상관이 없겠지만, 아마 각국에서 듣고 조롱할 것이다. 이는 오히려 두 번째 문제이다. 또 서계 문자에 격외의 단어가 많고, 심지어는 以私害公이라는 말과 그리고 우리 나라가 鑄送한 圖書를 還納한다는 說에 이르러서는 不覺 중에 입이 열려서 다물어지지 않고 혀가 올라가서 내려 오지를 않는다. 당초에 주송해 주기를 청한 것은 貴方이며 우리 나라가 총애하여 내려준 것인데 갑자기 변개하여 새로 주조한 新印을 찍도록 요구하는 것이 과연 舊章을 따르고 隣好를 두텁게 하는 뜻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모두 봉출할 수 없는 大旨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동래부와 부산 양 사또께 이미 아뢰어 來船 啓聞 중에 거론한바, 回下한 것을 삼가 보니 ‘퇴각시킴이 가하다’는 가르치심 말씀 뿐만 아니라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책망이 있었다. 우리들은 정상이 황공하여 대죄하여도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왜관의 여러분께 말하니 마땅히 이 사정을 貴州(대마주)에 통고하여 갑자기 新印을 찍어서 무한한 공한을 만들어 다만 事面을 손상하는 일이 없기를 깊이 바라는 바이다. 1869년 2월 훈도.239)玄明喆, 앞의 글, 250쪽에서 재인용.

 전통적으로 조선의 대일외교 창구였던 동래부와 왜학훈도의 입장에서는 구래의 예를 벗어나는 서계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학훈도의 회답에서 드러난 것처럼 조선의 입장에서 특히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쓰시마 영주의 직함이 다른 점, ‘朝臣’·‘皇’·‘勅’ 등 일본왕을 황제의 예로 전제한 용어, 그리고 종래 일본측의 요구에 의하여 무역과 외교에 사용하였던 확인 인장을 자의적으로 변경하여 사용한 점 등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강화조약 체결시까지 양국 외교의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었던 이른바 ‘서계문제’는 서계의 내용과 표현 가운데 국내외 정세변화에 따라 때때로 외교적 분쟁의 핵심부분이 달라질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위와 같은 점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쓰시마의 거듭되는 서계접수 요청에 동래부는 조정에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하였고, 동래부의 장계를 받은 조정은 중신회의를 거쳐 다음과 같이 고종에게 최종적으로 보고하고 처리하였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방금 동래부사 정현덕의 장계를 접해보니, ‘훈도와 별제 등의 수본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대마도주 평의달의 서계 가운데, 좌근위소장이라고 써서 보낸 것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끌어댈 만한 사례가 있다고 하겠으나, 평자 아래 조신이라는 두 글자는 일찍이 없었던 일로 격례에 크게 어긋난다. 통역을 맡고 있는 무리들로 하여금 책임있게 타일러서 다시 수정하여 올리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관직의 명칭이 이전과 다르니 이미 일정한 법식과 예가 아닙니다. 3백년 간이나 약속해 온 본래의 취지가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은 것이었겠습니까. 특별히 말로 타일러서 깨우쳐 주어 서계를 다시 수정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承政院日記≫, 고종 6년 12월 3일).

 1869년의 시점에서 메이지 신정권의 외교문서에 대한 동래부와 왜학훈도의 입장과 의정부를 비롯한 집권세력, 그리고 국왕 고종의 대일외교자세는 서계의 접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사건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장기화되고 있었다.

 1869년 6월 27일 천황정부군이 하코다테(箱館)를 점령함으로써 천황정부에 의한 일본의 정치적 통일은 일단 완성되었다. 7월 25일 천황은 제번의 版籍奉還을 받아들여, 藩主를 藩知事에 임명하고 정부에 의한 권력집중을 한층 강화시켰다.240)메이지정부는 8월 15일 ‘정부령’을 공부하여 중앙정부 관제를 혁신하였다. 그것은 겉으로는 복고적이고 신권적인 색채를 띠는 것으로 백관의 위에 신기관을 두고 별도로 대정을 통리하는 태정관을 설치하였다. 태정관의 밑에 민부·대장·병부·형부·궁내·외무의 6성을 두었다. 이 때 처음으로 외무성이란 명칭이 생겼다. 태정관은 10월 28일 이즈하라(嚴原)번지사 소 요시아키라(宗義達)에게 이후 조선교제는 외무성이 직접 관할하므로, 쓰시마번이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지 않도록 명령하였다. 이로써 쓰시마가 가지고 있었던 대조선외교의 특권은 박탈되었고, 외교는 중앙정부의 관할로 들어갔다.

 천황정부는 1870년 1월 7일 外務省出仕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外務少錄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등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유신정부의 외무성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에 파견된 이들은 부산에 도착한 뒤 자신들을 서계수리를 독촉하기 위한 일본정부의 관리라고 설명하고 그간의 경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래부 왜학훈도 안동준은 동래부사와 협의하여 대수대차사 척퇴가 조정의 뜻임을 확실히 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은 1868년 12월에 쓰시마주를 통해 파견한 사신에 대하여 조선정부가 최종적으로 거절한 것을 확인하고 외무대신에게 보고하였다.241)≪日本外交文書≫3권<朝鮮國交際始末>동 88호 부속서 1·2·3, 131∼143쪽 참조. 조선정부의 서계거부에 대하여 일본 조야에서는 이른바 征韓論이 비등하였다. 사다와 모리야마는 귀국 후 복명서에서 천황정부가 무력을 배경으로 직접 사절을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특히 사다는 50일만에 약 30개 대대 병력으로 조선정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幕末과 유신내전(戊辰戰爭)기의 정한론이 일본정부 내외에서 다시 논의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절단의 의견서를 바탕으로 외무성은 교착 상태에 빠진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안을 마련하였다. 즉 제1안은 조선과 단교하여 사태를 방임한다는 斷交論이었다. 그러나 이 안을 실행에 옮길 경우의 문제점은 러시아가 조선을 합병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제2안은 ‘皇使’를 파견하여 ‘開港開市兩國往來自由’를 보장하는 조약 체결을 요구하며, 조선측이 거절할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한다는 안, 제3안은 對淸交涉先行論으로, 조선과의 수교에 앞서 청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한 다음 조선과 교섭한다는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안이었다.242)≪日本外交文書≫3권 89호, 144∼145쪽. 청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체결한 다음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개항을 요구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만약 거절하면 전쟁을 일으켜도 청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메이지 정부 성립 초기의 대조선정책은 위와 같은 이른바 사절파견을 통한 직접교섭론과 무력정한론, 그리고 청국과의 교섭을 선행시키는 우회안 등이 각 시기 정부내 여러 세력의 정치적 위상과 맞물리면서 시도되었다.

 위의 세 가지 정책안 가운데 특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1871년 당시에 이미 조선과의 교섭 목적이 국교 재개라는 한정된 것이 아니었고, 개항과 개시 및 일본인의 자유 왕래를 요구하는 조약이었다는 점이다. 서계를 문제삼던 당시 조선의 입장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243)高橋秀直,<維新政府の朝鮮政策と木戶孝允>(≪人文論集≫, 26-1·2, 神戶商科大學, 1990), 93∼94쪽. 외교문서의 형식과 격식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조선의 태도와 비교하면, 일본의 대조선외교의 목표와 해결방안은 대단히 구체적이었고 다양한 접근방법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73년 일본정부는 외무성 7등 出仕 히로츠 히로유키(廣津弘信)를 조선주재 외교관으로 임명하고, 부산의 왜관을 일본공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조선외교를 완전히 외무성 관할 하에 두었다. 쓰시마번 소속의 관원과 한정된 상인의 근거지였던 왜관을 중앙정부가 관할하게 되면서 쓰시마상인이 아닌 도쿄의 상인이 공공연히 무역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는 쓰시마상인이 아닌 상인의 불법적인 상행위와 밀무역을 엄격히 규제할 것이라고 통고하였다. 일본정부는 동래부가 왜관 앞에 게시한 방문의 내용 중 일본을 ‘무법지국’으로 표현한 점 등을 들어 강경한 대응책을 모색하였다.244)≪日本外交文書≫6권 282-283<일본상인 조선무역에 대한 취체방법에 관한 초량공관수문장에 대한 전령서>. 이른바 정한론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이 ‘전령서’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는 우리측 관련사료에는 나타나지 않는 점 등을 들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李瑄根, 앞의 책, 332∼334쪽.

 일본정부내에서는 이를 기회로 무력으로 조선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비등하였다. 각의에서 太政大臣 산죠 사네도미(三條實美)는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파병을 제안하였는데, 參義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먼저 사절을 파견하여 교섭하되, 교섭이 결렬될 경우 곧바로 개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만약 파견된 사절이 조선에서 ‘폭살’이라도 당한다면 천하의 인심이 이에 집중하여 유신정부에 대한 국내 사족과 농민의 반감을 밖으로 돌릴 수 있는 호기가 될 것이라고 파악하였다.245)≪大西鄕全集≫2권 754∼756쪽, 1873년 8월 17일자 板垣退助 앞 西鄕隆盛 서간(田村貞雄,<「征韓論」政變の史料批判>(≪歷史學硏究≫615, 1991, 19쪽 재인용).

 각의는 8월 17일 사이고를 조선에 파견할 대사로 결정하여 천황의 재가를 얻었다. 다만 출발은 당시 메이지정부의 중심 세력이었던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서구열강들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의 예비교섭 및 문물제도 시찰을 위해 구미에 파견 중이었던 관계로 이들의 귀국 이후로 미루었다. 9월 13일 1년 10개월 만에 귀국한 이와쿠라·오쿠보 등은 사이고의 征韓策이 성공할 경우 자파의 정치적 위상 약화를 우려하여 정한책에 제동을 걸었다. 外遊派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와쿠라는 樺太優先解決論을, 오쿠보는 內治優先論을 내세워 사이고의 조선파견에 반대하였다. 이와쿠라와·오쿠보 등은 정치 공작 끝에 천황의 동의를 얻어 정한책을 물리쳤고, 이에 정한론을 주장하였던 사이고 이하 참의 소에지마(副島種臣)·이타카키(板垣退助)·에토(江藤新平)·고토(後藤象二郞) 등은 일제히 사직하였다. 조선문제는 정부 내의 파벌 대립과 얽혀, 마침내 메이지정부의 정변으로 비화하였던 것이다.246)藤村道生,<征韓論爭における外因と內因>(≪國際政治≫37, 1967. 日本外交史の諸問題3;毛利敏彦,≪明治六年の政變硏究≫일본정부가 征韓 정책 대신 주장된 화태 문제 해결에 착수할 즈음 일본국내에서는 사족의 반정부운동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사이고를 제외한 사직 참의들은 이타카키를 중심으로 민선의원설립건백서를 제출하여 ‘자유민권운동’을 개시하였고, 또 조선의 무례를 심문한다는 명분으로 사가(佐賀)지방에서 무장봉기하였다. 충격을 받은 정부는 정한파의 불만을 국외로 돌릴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마침 표류한 유구인을 대만원주민이 살해한 사건을 이유로 대만침공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사이고의 난이 3월 1일 진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만출병을 서둘러 5월 2일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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