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2. 개항 초기의 조청관계
  • 1)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서양 각국과의 수교권고

1)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서양 각국과의 수교권고

 興宣大院君 李昰應(1820∼1898)을 하야시키는데(고종 10년:1873년 11월)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閔升鎬(1830∼1874), 閔奎鎬(1836∼1878), 趙寧夏(1845∼1884) 등이 중심이 된 척족세력이었다. 그러나 아직 정치적 식견이나 경험이 부족한 이들을 배후에서 도운 사람은 대원군의 정적인 전 좌의정 李裕元(1814∼1888)이었다. 그가 국왕 고종의 친정과 동시에 영의정으로 발탁된 것도 그런 논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265)宋炳基,≪近代韓中關係史硏究≫(檀國大 出版部, 1985), 12∼13쪽.

 국왕이나 국왕의 친정에 협력하고 있는 척족은 書契의 수리를 거부함으로써 야기된 고종 9년(1872) 이후의 조·일 양국 사이의 긴장, 즉 국교 중단사태를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취해 온 대일 강경정책을 수정하려고 하였다. 일본과 서계 수리문제를 타협함으로써 전통적인 交隣關係를 회복,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국외정세에 밝은 朴珪壽(1807∼1877)를 우의정에 임명한 것도(12월) 그러한 배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266)宋炳基, 위의 책, 13∼15쪽.

 그러나 일본 국서의 수리, 즉 대일국교 조정문제는 선뜻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전통적인 배일감정도 작용하였겠지만, 대원군의 위세가 廟堂을 지배하여 급격한 대일정책의 수정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나 척족은 청국의 지지를 얻어 묘당의 배일론을 깨트릴 것을 고려하게 되었고, 그러한 사명이 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하여 청국으로 떠난(고종 12년 7월) 이유원에게 맡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원은 이 무렵 영의정에서 물러나 領中樞府事로 있었다.267)위와 같음.

 奏請使 이유원은 북경에 도착하여(10월) 세자 책봉문제를 매듭짓는 한편 비밀리에 總理衙門 과원들과 대일국교 조정문제를 협의하였다. 또 귀국하는 길에 直隷 永平府에 들러 知府 游知開(?∼1898)와 면담하고, 그를 통하여 청국 외교를 이끌고 있는 北洋大臣 李鴻章(1823∼1901)에게 서함을 보내었다. 12월 13일자로 이홍장에게 전달된 이 서함에는 인사말 이상의 어떤 공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서함도 대일국교 조정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268)위와 같음.

 이유원의 서함을 받은 이홍장은 바로 다음 날인 14일자로 回函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 회함에서 조일 양국간의 교섭이 어떠한지를 묻고, 청국이 ‘閉關自治’를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밝히고 있다. 비록 조선의 대일국교 조정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외교해야 한다는 뜻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일본과의 국교가 필요하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269)위와 같음.

 주청사 이유원이 청국으로 떠난 직후 운요호(雲揚號)사건이 일어났고(고종 12년 8월), 그가 귀국 복명한 것은 일본이 전권을 江華府로 파견한다는 통고를 해오기 직전인 고종 12년 12월 중순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과의 국교가 필요하다는 이홍장의 회함도 도착되었을 것이다. 이 이유원의 복명이나 이홍장의 회함은 국왕이나 척족으로 하여금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대일국교 조정방침이 청국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운요호사건에 따른 일본과의 분규에도 유화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70)宋炳基, 위의 책, 15∼16쪽.

 또 조일 양국대표가 강화부에서 회담하기 직전에 청국 禮部에서 보낸 咨文도 도착하였다(1876. 1). 운요호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森有禮(1847∼1889)를 주청공사에 임명, 북경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총리아문과 접촉을 갖고 조청간의 이른바 종속관계에 대하여 문의하는 한편, 일본은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운요호사건을 협의하고 수호조약도 체결할 뜻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에 청국 예부에서는 총리아문과 삼유례 사이에 왕복한 문서와 이에 대한 총리아문의 견해를 밝힌 上奏文 등 일건문서를 조선으로 보내왔던 것이다.271)宋炳基, 위의 책, 16쪽 주22.
―――,<고종초기의 외교>(≪한국민족독립운동사≫1, 국사편찬위원회, 1987), 47∼48쪽.
≪同文彙考≫4 (國史編纂委員會, 1978), 3746∼3749쪽(乙亥 禮部知會抄錄 總理衙門與日本使臣往來節略及原奏咨回咨 謝禮部兼程飛咨兼陳與日本使臣辦理條約咨).

 이유원의 복명이나 이홍장의 회함을 통하여 조일국교문제에 관한 청국정부의 분위기를 짐작하고 있었던 국왕이나 척족은 이 자문을 통하여 일본이 요구하는 바가 수호조약 체결에 있으며, 청국은 이 조약의 성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만큼 확인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원의 복명, 이홍장의 회함과 함께 예부의 자문도 조선이 일본과의 수교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272)위와 같음.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청양국의 원로대신 이유원과 이홍장이 처음으로 서함을 주고 받은 것은 고종 12년(1875) 12월 중순이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조선이 대미수교방침을 청국측에 통보하는 고종 18년(1881) 초까지, 거의 매년 서함이 왕래되었다. 그리고 이홍장은 이 서함을 통하여 이유원, 즉 조선측에 “러시아인을 備禦하고 일본에 대응하는 방책에 대하여 늘 언급하였다”273)原田環,<朝中兩截體制成立前史-李裕元と李鴻章の書簡を通して->(≪近代朝鮮の社會と思想≫, 東京, 未來社, 1981), 70∼71쪽.
宋炳基, 앞의 책, 16쪽
≪淸季中日韓關係史料≫2 (臺灣: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2), 373쪽.
고 한다. 그 중에서도 우선 주목되는 것이 고종 14년 10월 15일자 이유원의 서함에 대한 회함으로 보내 온 고종 15년 9월 4일자 서함이 아닌가 한다.274)權錫奉,<李鴻章의 對朝鮮列國立約勸導策에 대하여>(≪歷史學報≫21, 1963), 105쪽.
宋炳基, 위의 책, 16∼17쪽.

 막료 薛福成(1838∼1894)을 시켜 작성한 이 서함에서, 이홍장은 ① 일본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분수를 깨닫기 시작하였으며, 러시아를 경계하여 조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것, ② 영·미 등 서양 여러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어 그 뜻이 통상에 있을 뿐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는다는 것, ③ 그러나 러시아가 도모하는 바는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이에 대한 은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야 하며, 이를 위하여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고 영·미와의 입약·통상도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275)宋炳基, 위의 책, 23∼25쪽.

 청국의 당로자들은 江華島條約이 성립(1876)함으로써 운요호사건으로 빚어진 조일 양국 사이의 분규가 평화적으로 타결됨에 따라 일본의 조선 침략보다 러시아의 그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는 운요호사건 이후 黑龍江 지역에 파병하여 남진할 형세를 보이고 있으며, 터어키와의 전쟁(露土戰爭, 1877∼1878)을 끝내는 대로 그 방향을 조선으로 옮길 것을 우려하였다. 이홍장의 이 서함은 바로 그러한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었다.276)宋炳基, 위의 책, 21∼22쪽.

 이처럼 이홍장을 비롯한 청국의 당로자들이 조선을 둘러싼 동북아정세, 특히 일본과 러시아의 동정에 주의를 기울여 온 것은 조선의 안전이 東三省(滿洲)의 안전, 나아가 중국 본토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가령 임진왜란 때 明의 원군 파견 배경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1870년대로 들어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위협이 증대되고 여기에 러시아의 남하에 따른 불안이 곁들여져 그것이 한층 더 고조되었던 것이다.277)위와 같음.

 이 무렵 청국의 대러시아 관계는 伊犁((Ili, Kulja)문제로 악화되어 갔다. 러시아는 新疆省 일대를 휩쓴 회교도의 반란을 틈타 이 지역 북부의 요충인 이리를 강점하였었다(1871). 청국이 반란을 진압하는 대로 반환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반란이 진압되었음에도(1877)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청국은 사절을 러시아로 파견하여(1878) 다시 반환을 약속받았지만(Livadia조약, 1879), 그 내용은 청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나라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278)宋炳基, 위의 책, 59∼60쪽.

 청국이 이리 문제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인 고종 16년(1879) 2월에 일본은 그 틈을 타 돌연 琉球를 병합하였다. 이 사건은 이제까지 청국이 가지고 있었던 어느 정도의 확신을 동요시켜 일본이 머지않아 조선마저 병탄하리라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조선 병탄은 물론 청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였다. 이 사건은 자연 청국 당로자의 관심을 러시아로부터 일본으로 되돌리게 하였다.279)宋炳基, 위의 책, 2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국은 조선문제에 깊이 개입할 수가 없었다. 조선과 청국은 朝貢體制(tribute system)하에서 宗藩關係를 맺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청국은 전통적으로 조선의 ‘政敎 禁令’에 관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조선문제에 개입하고 나아가 그 안전을 책임질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280)宋炳基, 위의 책, 19∼20쪽.

 이런 상황하에서 청국이 선택한 대책은 조선의 외정에 비공식적으로 간여하는 방식, 즉 이홍장으로 하여금 그와 서함을 왕래하여 온 이유원을 통하여 조선측에 서방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하도록 종용하는 것이었다. 조선을 이른바 條約體制(treaty system)에 편입시켜 한반도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이룩함으로써 일본이나 혹은 러시아의 침략에 대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총리아문의 주청에 따른 것이었다.281)Key-Hiuk Kim, 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Berkeley: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1980), pp.200·239∼340.
宋炳基, 위의 책, 23·25∼27쪽.

 이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辦理臺灣等處海防大臣 沈葆楨(1820∼1879)의 프랑스인 고문 지켈(Giquel, Prosper Marie, 日意格, 1835∼1886)이었다. 그는 고종 11년(1874) 일본의 대만 출병에 즈음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을 경고하고 그 대책으로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282)宋炳基, 위의 책, 23쪽.

 이어 이홍장도,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 15년에 이유원에게 보내는 서함에서(9월 4일자)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론을 시사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총리아문의 주청에 따른 淸廷의 결정에 따라 조선에 대하여 입약 통상론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총리아문의 주청도 前福建巡撫 丁日昌(?∼1882)의 ‘海防事宜摺’(1879)과 주청영국공사 웨이드(Wade, Thomas F., 威安瑪, 1818∼1895)의 견해가 참작된 것이었다.283)宋炳基, 위의 책, 25∼27쪽.

 이홍장이 청정의 결정에 따라 이유원에게 서함을 보내 온 것은 이해(1879) 7월 9일자로, 역시 막료 설복성을 시켜 작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유원에게 전달된 시기는 이해 8월 그믐께라는 견해도 있지만, 7월 그믐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서함은 비밀리에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을 권고하였다 하여 ‘密函’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李書’라고도 하였다.284)權錫奉, 앞의 글, 113쪽.
宋炳基, 위의 책, 16∼17·27∼28·32∼36쪽.

 이홍장이 ‘이서’, 즉 ‘밀함’에서 권고한 요지는, 유구 병합으로 미루어 일본의 조선 침략이 임박하였으므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하여 일본을 견제하여야 하며, 그것은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備禦의 수단이 되리라는 것, 조선 스스로 武備를 密修하여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경우 그 자신이 적의 충고하겠다는 것도 덧붙이고 있다.285)宋炳基, 위의 책, 28∼32쪽.

 이홍장의 밀함에 대한 이유원의 회답(함)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유원은 우선 이해 8월 하순에 출발한 譯官 李容肅편에 永平府守 游智開에게 서함을 보내어 이홍장의 입약 통상권고를 간접적으로 거부하였고, 다시 11월에 출발한 冬至使 韓敬源편에 이홍장에게 서함을 보내어 입약 통상권고를 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286)權錫奉, 앞의 글, 114쪽.
宋炳基, 위의 책, 36쪽.

 이유원이 입약 통상을 거부하는 이유로 든 것은 조선은 외교를 할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泰西學問’이나 ‘內地傳敎’, ‘阿片販賣’ 등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물산은 보잘것 없어 설사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한다 하더라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287)宋炳基, 위의 책, 37∼39쪽.

 이유원의 회함은 私信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그것은 국왕과 논의된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외교문제에 적극적이었다고 전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이유원의 회함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288)權錫奉, 앞의 글, 115쪽.
宋炳基, 위의 책, 39∼40쪽.

 생각건대 조선에서는 유구의 병합으로 청국이 우려하는 만큼 일본의 침략이 임박하였다고 보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한 이유가 될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러시아의 경우에도 동일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홍장의 권고는 조선의 당로자들이 보는 일본이나 러시아의 정세를 감안하지 못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설득력을 갖지 못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89)위와 같음.

 한편 서양 여러 나라와 갑작스레 입약 통상한다는 것은 중대한 외교적 모험을 감행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여유를 두고 검토해 볼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또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은 이른바 ‘淸議’가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의 여론하에서는 서양과의 수교 통상 같은 것은 감히 입도 벌리지 못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290)위와 같음.

 이홍장의 밀함을 통한 청정의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권고는 이유원의 회함을 통한 조선측의 거부로 일단 좌절되었다. 본래 청국은 서양과의 수교를 계기로 조선의 외정에 개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조청관계의 변화, 혹은 수정을 뜻하는 것이어서 우리의 주목을 끌게 한다. 그러나 조선측이 서양 여러 나라와의 수교를 거부함으로써 청국의 그러한 의도는 일단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291)宋炳基, 위의 책, 31∼32·41쪽.

 청국의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권고가 조선측의 거부로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無爲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으로 하여금 국제정세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고종 17년(1880) 제2차 修信使 金弘集(1842∼1896)의 일본 파견이 그러한 것이었다.292)宋炳基, 위의 책, 41∼42쪽.

 수신사의 파견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밀함을 받은지 얼마 안되는 8월 하순에 역관 이용숙을 청국에 파견하여 武備講究(무기제조 학습과 군사훈련)를 교섭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그것은 서양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함으로써 일어날지도 모를 모험과 여론의 압력을 피하는 동시에 이홍장이 밀함에서 권고한 바의 일단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조선측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고종이 강화도조약 이래 관심을 가져온 신무기 貿取의 실현을 위한 첫 시도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293)權錫奉,<領選使行에 對한 一考察-軍械學造事를 中心으로->(≪歷史學報≫17·18, 1962), 279∼280쪽.
宋炳基, 위의 책, 4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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