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2. 개항 초기의 조청관계
  • 2) 제2차 수신사의 파견과 주일청국사절의 연미론

2) 제2차 수신사의 파견과 주일청국사절의 연미론

 이홍장의 밀함은 조선으로 하여금 국제정세, 특히 일본의 동정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조선측은 비록 이홍장이 밀함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본의 침략이 임박하였다고 보고 있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정보가 적어도 청국의 ‘伯相’〔이홍장〕으로부터 있는 이상 현지에 가서 그것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제2차 수신사의 일본 파견을 결정하고 고종 17년(1880) 3월 하순에 예조참의 김홍집을 수신사로 임명하게 되었던 것이다.294)宋炳基, 위의 책, 51∼53쪽.

 미국이 해군제독 슈펠트(Shufeldt, R.W., 1822∼1895)를 파견하여 조선측에 수교를 요청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슈펠트는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호 世界周航 계획의 하나로서 일본의 소개를 받아 평화적인 방법으로 조선과 개항교섭을 하라는 해군성 및 국무성의 훈령에 따라 1878년 말 미국을 출발, 아프리카·페르샤만·인도양을 거쳐 고종 17년(1880) 3월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입항하였다. 그는 주일미국공사 빙햄(Bingham, John A.)의 주선으로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일본영사 콘도마스케(近藤眞鋤)에게 하는 소개장을 받아가지고 3월 하순 부산에 입항하였다. 그리하여 곤도를 통해서 東萊府使 沈東臣에게 수교를 희망하는 그의 書契를 조정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동신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나가사키로 회항할 수밖에 없었다.295)李普珩,<Shufeldt提督과 1880年의 朝美交涉>(≪歷史學報≫15, 1961), 67∼70쪽. 국왕이 김홍집을 제2차 수신사로 임명한 직후의 일이었다.

 슈펠트는 다시 빙햄과 같이 이노우에를 찾아가 직접 교섭에 나서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슈펠트의 서계는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권유하는 이노우에의 서계와 함께 조선측에 전달되었다(6월). 그러나 조선정부는 ‘美國國書’를 접수할 뜻이 없음을 밝히고 부산주재 일본영사 곤도를 통하여 예의 서계를 반환하였다.296)李普珩, 위의 글, 70∼75쪽.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이해 5월말, 7월 초순에 동경에 도착하여 약 1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의 조야인사는 물론 주일청국공사 何如璋(1838∼1891), 參贊官 黃遵憲(1848∼1905) 등과 접촉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라고 하는 급박한 정세 앞에서 오히려 조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고 있으며,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 혹은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는 서양, 특히 미국에 대한 문호개방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청국공사 하여장의 권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 만큼 그의 권고는 구체성을 띠고 있었다. 미국과의 입약 통상권고, 즉 聯美論이 그것이었다.297)宋炳基, 앞의 책, 55∼59쪽.

 하여장이 조선측에 연미론을 제기하게 된 배경으로는, 우선 1880년으로 들어오면서 청국은 러시아와 伊犁문제로 긴장이 더욱 고조된 위에, 러시아가 두만강 입구 등지에 계속 병력을 증강하고 있어서 조선이 미구에 그 침략을 받으리라 우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하여장은 북양대신 이홍장이 조선측에 밀함을 보내어 입약 통상을 권고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南洋大臣 劉坤一(1830∼1902)로부터도 조선에 그러한 권고를 하라는 서신을 자주 받고 있었으며, 김홍집의 도일에 즈음하여 總理衙門으로부터 문호개방을 종용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것도 들어야 할 것이다.298)宋炳基, 위의 책, 59∼63쪽.

 그러나 하여장이 김홍집에게 문호개방, 즉 聯美를 권고한 데는 또 다른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이 입약 통산 권고를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중재에 의한 조미조약의 성립을 우려한 이홍장이 나가사키 주재청국영사 余瓗을 통하여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슈펠트에게 조선과의 수교를 알선하겠다는 양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홍집이 동경에 도착하기 직전의 일이었다.299)李普珩, 앞의 글, 81∼84쪽.
宋炳基, 위의 책, 63∼66쪽.

 이홍장의 이 수교 알선에 관한 양해는 하여장·황준헌이 김홍집과 접촉중이던 때에 열린 이홍장·슈펠트의 天津會談(7월 21일)에서 확실하게 다짐되었다. 이 회담에서 이홍장은 슈펠트가 수교교섭을 개시할 수 있도록, 조선정부에 대하여 그의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을 확약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와 관련하여 청국 해군을 강화하는 문제와 동아시아의 정세도 토의되었다. 회담을 마친 슈펠트는 곧 일본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8월 7일).300)위와 같음.

 하여장이나 그의 지시를 받은 황준헌 등은 전후 여섯 차례에 걸쳐 김홍집과 만나 筆談을 나누었다. 이 회담에서 하여장 등은 조일 양국간의 현안문제에 대하여 자문하기도 하고 일본이나 러시아의 동정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하여장 등이 역점을 두어 강조한 것은 러시아의 남하와 이에 따른 대책으로 제시한 미국과의 수교, 즉 연미론이었다. 미국은 민주국가요 國勢가 넉넉한 데다가, 여러 나라와 通好함에 있어 신의를 존중하고 동양에 대하여 너그럽다고 역설하였다. 더욱이 그런 미국이 조선과의 조약체결을 희망하고 있으므로, 조선은 미국과 수교하여 러시아의 남하 혹은 침략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01)宋炳基, 위의 책, 66∼69쪽.

 필담이었기 때문에 의사전달이 미흡했다고 생각한 하여장은 황준헌을 시켜 앞으로 조선이 취할 대외·대내정책을 요약한<朝鮮策略>을 작성하여 김홍집에게 수교하였다. 약 6천자에 달하는<조선책략>의 요지는 조선의 급무는 ‘防俄’에 있고, 防俄策은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하며 自强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핵심은 미국과의 수교를 강조한 것으로, 하여장의 연미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이었다.302)宋炳基, 위의 책, 69∼73쪽.

 그런데<조선책략>에는 조선이 북경에 陪臣을 상주시킬 것, 부산 등지에서의 일본 상인의 농단을 막기 위하여 청국 상인의 통상을 허락할 것, 龍旗(청국국기)를 조선의 旗幟로 삼을 것 등의 대목이 들어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끌게 한다. 그것은 미국과의 수교에 즈음하여 청국의 ‘속방’으로서의 조선의 지위를 강화하는 한편, 조선으로의 경제적 진출을 노렸던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303)宋炳基, 위의 책, 66쪽. 청국은 이미 이홍장을 통하여 문호개방을 권고할 당시부터 조선의 내정에 간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하여장이 제기한 연미론은 결국 이홍장이 고종 15년(1878) 9월 4일자로 이유원에게 보낸 서함에서 제시한,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한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론과 취지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다만 다른 점은 입약 통상할 상대가 서양 여러 나라에서 미국으로 좁혀졌을 뿐이다. 그런 만큼 연미론은 이홍장의 대조선정책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국왕은 수신사 김홍집의 복명(8월 28일)과 그가 가지고 온<조선책략>등을 통하여 조선이 경계할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이며, 러시아의 남하 혹은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는 시급히 미국과 수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홍집이 복명한지 불과 4일만인 9월 3일에 李東仁·卓挺埴 등을 밀사로 발탁하여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하여장에게 미국과의 수교 주선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국왕이 이런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는 김홍집은 물론, 閔泳翊(1860∼1914)·劉大致(1831∼?) 등과도 논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04)宋炳基, 위의 책, 75∼77쪽. 러시아의 남하, 혹은 침략이라고 하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국왕은 이제까지 조선이 굳게 지켜오던 척사 내지 쇄국정책을 수정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국왕은 밀사 이동인 등이 서울을 떠난 직후 곧 時·原任大臣에게 명하여,<조선책략>을 검토케 하는 한편, 領議政과 政府堂上을 重熙堂으로 인견하여 러시아의 남하에 따른 대책을<책략>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대미수교 방침을 정부의 공론으로 수렴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희당회의의 결과는 대미수교를 적극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원임대신들의 회의 결과는 선연치가 않았다. 일단 찬성은 하되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元山에 머무르고 있던 밀사 이동인 등은 서울로부터의 이러한 회의 결과와 국왕이 김홍집으로 하여금 대미수교 주선을 요청하는 서함을 하여장에게 보내도록 했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으로 떠났다(10월 12일).305)宋炳基, 위의 책, 77∼83쪽.

 이동인 등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10월 중순, 그는 곧 청국 공사관을 방문하여 황준헌·하여장 등과 접촉을 갖고(10월 17, 18일) 조선의 朝議가 변하여 미국과의 수교를 희망하고 있으며, 머지 않아 수교 알선을 요청하는 김홍집의 공함이 있을 것임을 알렸다. 이에 격려된 하여장은 곧(10월 19일) 이 사실을 총리아문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타전하여 앞으로의 조처에 대한 지시를 요청하는 한편, 조선이 미국 등과 조약을 체결할 경우 청국이 취할 대책을 적은<主持朝鮮外交議>도 작성 보고하였다.306)宋炳基, 위의 책, 83∼86쪽.

 하여장이 황준헌을 시켜 작성한<주지조선외교의>는<조선책략>과 한 짝을 이루는 문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약 1,300자에 달하는<외교의>의 요지는, 먼저 조선이 러시아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국 등과 수교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그럴 경우 조선은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되고 따라서 중국은 ‘속국’을 잃게 될 우려가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청국의 관원이 조선의 조약 체결을 주관하고 조약문 머리에 “중국정부의 명을 받들어 結約한다”고 성명케 함으로써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宗藩관계도 강화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청국의 龍旗를 사용하게 하고, 조청 양국 상인의 왕래 무역을 허가하며, 조선 학생을 중국으로 보내어 語學·造船·機械·洋銃을 익히게 해야 한다는 것도 거론하고 있다.307)<主持朝鮮外交議>에 관하여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郭廷以,<中國與第1次美韓條約>(≪中國外交史論集≫, 1957), 1∼28쪽.
權錫奉,<朝鮮策略과 淸側意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集≫, 一潮閣, 1981), 421∼449쪽.
宋炳基, 위의 책, 91∼121쪽 참조.

 하여장은 이동인이 알려준 김홍집의 공함을 기다렸다. 그는 총리아문의 訓電에 따라 김홍집의 공함이 도착하는 대로 그 내용, 즉 조선이 미국과의 수교를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일미국공사 빙햄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김홍집의 공함은 11월 29일에 가서야 하여장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김홍집의 공함에는 하여장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과의 조약체결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여장은 김홍집의 공함내용을 빙햄에게 전달하고 나아가 조·미 양국간 수교의 주선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308)宋炳基, 위의 책, 83∼86쪽.

 국왕이나 그 지지세력들이 대미수교 방침을 결정하고 밀사 이동인을 파견하여 하여장에게 이를 통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홍집의 공함에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는 것은 서울 정계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홍장과 서함을 왕래하여 온 원임대신 이유원이 여론에 영합하여 수교 반대에 나섰고, 쇄국을 고집하던 대원군 이하응과 그 지지세력이 건재하고 있었다. 또 여론의 압력도 예상되는 것이었다. 이동인이 원산에서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인 10월 1일부터 벌써 衛正斥邪論이 대두하고 있었던 것이다.309)위와 같음.

 김홍집이 하여장에게 보낸 공함 말미에 “말은 짧고 뜻은 깊어 모두 다 들어낼 수 없다(言短意長 不能實暴)”는 구절은 이런 서울의 사정을 함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명은 아직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탁정식으로부터 있었다. 그는 김홍집의 공함이 도착한 직후 하여장과 만나, 국왕과 영의정, 그리고 2, 3 대신은 대미수교를 결심하고 있으나 이유원을 꺼려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고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를 마지막으로 조선의 미국과의 수교에 관한 주일청국사절과의 교섭은 당분간 끊어지고 그 대신 북양대신 이홍장과의 교섭은 청국과 무비강구문제를 매듭짓는 과정에서 급진전되어 갔다.310)위와 같음.

 조선측에서 이홍장의 밀함에서 권고한 바의 일단을 받아들여 청국측에 무비강구문제를 교섭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 16년(1879) 8월부터였다. 그뒤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다음해 7월 청국에 파견된 역관 卞元圭는 9월 천진에서 이홍장과 그의 막료 鄭藻如 등과 회담을 갖고 무비강구문제를 매듭지었다.311)宋炳基, 위의 책, 123쪽.

 그런데 변원규와 이홍장의 회담에서는 무비강구문제보다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 등 조선의 外政문제가 주로 논의되었다. 뿐만 아니라 변원규는 이홍장의 밀함에 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변원규의 청국 파견이 무비강구문제에 대한 교섭도 교섭이지만 이홍장을 직접 만나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을 권고하게 된 사정을 좀더 확실하게 파악하려는데 비중이 놓여졌던 것으로 생각된다.312)위와 같음.

 변원규와의 회담에서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하여는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이 부득이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조속한 실현을 촉구하였다. 이홍장은 또 이유원에게 보내는 서신을 변원규에게 건네었다. 9월 28일자로 된 이 서신은 이유원의 무비강구 주선 요청에 대한 회함의 형식을 빌어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을 거듭 권고하는 것이었다.313)宋炳基, 위의 책, 124쪽.

 변원규가 귀국한 것은 이해 10월말이었다. 이미 밀사 이동인 등을 일본에 파견, 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미국과 수교할 뜻을 밝힌 바 있는 국왕은 이제 다시 변원규를 통하여 이홍장의 서양 여러 나라와의 조약 체결 권고를 받게 된 것이다. 이는 국왕의 대미수교 방침을 더욱 굳히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14)宋炳基, 위의 책, 125∼126쪽.

 국왕의 대미수교방침은 미구에 이홍장에게 통보되었다. 이 사명을 띠고 ‘國王委員’ 李容肅이 이해(고종 17, 1880) 11월 초순에 청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다음해 1월 20일 천진에서 이홍장과 회담을 갖고 그가 작성한 문의사항 즉,<請示節略>을 제시, 다른 나라와 수교할 때의 선후·조만의 대책을 묻고, 청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한 수호통상장정 등의 사본을 요청하였다. 또 1월 28일 2차 회담에서 그는 서양 여러 나라가 “좋은 뜻으로 와서 조약 체결을 청한다면 굳게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국왕은 이용숙을 통하여 이홍장에게 완곡한 방법으로 미국은 물론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뜻이 있음을 통고하였던 것이다.315)宋炳基, 위의 책, 126∼133쪽.

 한편 이해(고종 18, 1881) 2월 초에 탁정식이 다시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대미수교에 관한 김홍집의 서함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4월초 하여장에게 전달된 이 서함의 요지는 미국과 수교는 하되 여론 때문에 “卽地에 裁斷할 수 없다”, 즉 시간적 여유를 갖고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용숙을 청국에 파견하여 대미수교방침을 이홍장에게 통보한 조선측은 이제 탁정식을 일본에 파견하여 연미론을 처음으로 권고하여 온 하여장에게 대미수교 방침을 역시 완곡한 방법으로 재통고하였던 것이다.316)宋炳基, 위의 책, 133∼134쪽.

 李容肅을 중국에 파견한 직후부터 조선은 國書受理, 公使駐京, 仁川開港 등 일본과의 현안문제들을 거의 일괄 타결하는 한편, 官衙(統理機務衙門)를 신설하고 여기에 필요한 인재의 수용령을 내리는 등 일련의 개화정책을 펴 나갔다. 이는 이르는 바 이 ‘初期의 開化政策’이 미국과의 수교에 대비해 가면서 추진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 통리기무아문은 미국 등 외국과의 외교 통상에 대비하고 自强策을 추진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였다.317)宋炳基, 위의 책, 134∼152쪽.

 國王은 일부 소장관원들과 함께 이처럼 연미에 대비하여 나갔는가 하면, 연미를 저지하고 나선 조야 인사도 적지 않었던 것 같다. 그 중에는 개화당 멤버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수신사 金弘集을 수행했던 姜瑋(1820∼1884)도 연미를 지지한 재야인사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점차 연미를 저지하는 관원도 불어났다. 그리하여 朝臣 중 미국과의 수교를 원하는 수가 7할쯤 헤아리겠금 되었다.318)文一平,≪韓米五十年史≫(朝光社, 1945), 25∼27쪽.
李光麟,≪開化黨硏究≫(一潮閣, 1974), 25·34∼35쪽.
宋炳基, 위의 책, 159∼160·163∼164쪽.

 그러나 당시의 여론은 ‘朝鮮策略’이나 연미론은 물론 개화정책도 지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 선편을 잡은 것은 일부 官員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儒生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 거센 반발, 이른바 ‘辛巳斥邪運動’을 불러 이르켰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大院君 계열의 재집권을 위한 쿠데타모의, 즉 安驥泳事件(고종 18, 1881)으로 이어져 나갔다.319)宋炳基, 위의 책, 164∼187쪽.

<宋炳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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