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 조미조약의 체결
  • 2) 조미조약의 성립과 속방조회

2) 조미조약의 성립과 속방조회

 보정부에서 제5차 회담(2월 26일)을 가진 이후 이홍장은 오랫동안 김윤식과 접촉하지 않았다. 이미 슈펠트와의 협상을 위임받았고, 그에게 제시할 중요 조문까지 검토한 뒤였으므로 김윤식과 만나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홍장이 김윤식과 다시 만난 것은 1882년 2월 17일(양 4월 4일)에 가서였다. 제6차 회담으로 슈펠트와 제2차 회담(2월 18일, 양 4월 5일)을 갖기 직전이었다. 북양아문에서 가진 이 회담에는 국왕의 봉서를 가지고 온(1월 8일) 역관 이응준도 배석하였다.354)宋炳基, 위의 책, 243∼244쪽.

 고종 18년 11월 25일자로 된 국왕의 봉서는 국내 사정상 결코 천진에 관원〔使節〕을 파견할 수 없으며, 동봉하는 一件 冊子, 즉 修信使 趙秉鎬의 일본과의 관세규칙 협상 기록, 러시아측 서함을 다룬 함경북도병마절도사와 함경도관찰사 사이의 夾紙 등을 이홍장에게 전달하라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런 봉서를 보낸 국왕의 의도는 조약 체결 협상을 이홍장에게 맡기되 충실한 내용이 되도록 하여 일본과의 관세규칙 협상이나 러시아의 조약체결 요청에 대비하려는 데 있었던 것 같다.355)宋炳基, 위의 책, 244∼245쪽.

 국왕이 봉서에서 지시한 내용과 一件 책자는 곧 周馥을 통하여 이홍장에게 전달되었고, 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으므로 제6차 회담에서 그것이 특별하게 거론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회담에 임하는 이홍장의 태도는 시종 불평조였다. 그는 국왕의 手札을 건네주지 않은 것을 힐책하였으며, 조선에 洋語·洋文 해독자가 있는지 따지듯 물었다. 김윤식은 전전긍긍하여 국왕의 수찰을 건네줄 것을 약속하였고, 중국 관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리고 美使의 조선행을 알리기 위하여 이응준을 먼저 귀국시킨다는 데도 합의하였다.356)宋炳基, 위의 책, 245∼246쪽.

 이홍장이 국왕의 수찰을 요청한 것은 곧 있을 슈펠트와의 제2차 회담 때 그것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조선측 대변자이며, 천진에서의 협상이 국왕의 뜻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또 양어·양문 해독자를 물은 것은 슈펠트와의 제1차 회담(2월 7일, 양 3월 25일) 때 중국 관원 파견문제가 거론되었던 것 만큼, 그것을 김윤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요청하도록 하는데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시종 불평조였던 것도 아마 이런 것들 때문이었을 것이다.357)宋炳基, 위의 책, 246쪽.

 제6차 회담 이후 이홍장은 슈펠트와 네 차례나 회담을 갖고 협상을 벌였지만, 한 번도 김윤식과 만나지 않았다. 혹 김윤식과 연락할 일이 있으면 회담에 배석하고 있는 막료 주복을 통하여 하였다. 김윤식도 협상의 진전 상황을 주복을 통하여 막연하게나마 엿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김윤식은 조약체결 협상에서 오직 제3자의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358)宋炳基, 위의 책, 247∼248쪽.

 김윤식은 이홍장·슈펠트회담이 진전되어감에 따라, 그가 보낸 (고종 19년 12월 20일) 전권파견 요청 서함에 대한 본국의 회신을 고대하게 되었다. 그는 국내 실정이나 국왕의 봉서로 미루어 전권대신의 파견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하위의 관원 파견은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시한인 다음 해 2월 초순이 지나도록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가 魚允中·李祖淵(1843∼1884)을 考選官에 임명·파견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2월 28일에 가서였다.359)宋炳基, 위의 책, 248∼249쪽.

 김윤식의 전권 파견 요청 서함이 서울에 도착된 시기는 1월 10일경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어윤중 등이 問議官으로 改差되어 사폐한 것은 2월 17일, 그 출발부터 시한을 넘기고 있었다. 그들이 천진에 도착한 것은 3월 28일, 이미 가조인이 끝나고, 마건충·슈펠트 등이 조선에 入境한 뒤였다. 또 어윤중 등은 조약체결 협상에 관한 어떤 文憑(信任狀)도 휴대하지 않았다. 總理統理機務衙門事 李最應(1815∼1882)이 이홍장에게 보낸(2월 3일자) 고선관 파견 등을 알리는 서함에도 그런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은 조선측이 문의관에 의한 협상을 포기한 것, 다시 말하면 이홍장에 의한 협상의 재확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국내의 척사여론 때문이었다.360)宋炳基, 위의 책, 249∼251·255∼256쪽.

 어윤중의 도착을 기다리던 김윤식은 주복의 요청에 따라 역관 이응준과 함께 3월 4일(양 4월 21일) 북양아문으로 이홍장을 방문하여 제7차 회담을 가졌다. 조약체결에 관한 한 이홍장과의 마지막 회담이었다. 이홍장은 김윤식에게 가조약 내용을 통보하는 한편, 속방조회·중국관원 파견문제를 매듭짓기 위하여 이 회담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361)宋炳基, 위의 책, 251∼252쪽.

 김윤식은 가조약 내용에 기꺼이 동의하였고, 그 내용을 함부로 수정할 수 없다는 이홍장의 요청에 대하여도 정부에서 가벼이 刪增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그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 있다면, 제9관의 미곡 禁輸 규정이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미사가 입경한 뒤 다시 협의할 수 있다는 이홍장의 양해가 있었다. 김윤식은 또 속방조회에도 동의하였으며, 중국 관원 파견 문제는 오히려 먼저 요청하여 이홍장의 약속을 받았다.362)宋炳基, 위의 책, 252∼254쪽.

 회담이 끝나자 이응준은 미사의 조선행을 알리기 위하여 곧(3월 6일) 귀국길에 올랐다. 이홍장은 이응준편에 가조약본과 回函(3월 5일자)을 이최응에게 보내었다. 그는 이 서함에서, 황제에게 주청하여 마건충을 파견하는 것은 김윤식의 중국 관원 파견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속방조회는 반드시 이행되어야 하며, 조문의 수정은 가조약본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김윤식과 합의한 바를 거듭 강조한 것이었다.363)宋炳基, 위의 책, 254∼255쪽.

 馬建忠·丁汝昌(?∼1895) 등은 슈펠트와의 약속대로 3월 20일 아침 일찍 烟臺를 출발하였다. 일행중에는 상무조사차 招商局에서 파견하는 5명의 요원도 끼어 있었다. 앞으로 있을 조청간 海禁의 해제와 통상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364)宋炳基, 위의 책, 256∼258쪽. 조선진출을 위한 청국측의 발빠른 움직임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마건충은 이홍장이 국왕에게 보내는 咨文을 휴대하였다. 그 내용은 이최응에게 보낸 회함과 비슷한 것이지만, 마건충 등의 주청 파견은 미사나 김윤식의 요청뿐 아니라 미사의 東來는 오직 중당(이홍장)에게 맡기겠다는 총리통리기무아문사 이최응의 서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사실은 동래를 막아 달라는 내용을 잘못 읽은 것이지만) 점을 강조하고, 조약을 체결한 뒤 조약문과 속방조회문을 예부와 북양아문으로 移咨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365)宋炳基, 위와 같음.

 마건충 등이 탄 중국 함정 威遠·揚威·鎭海는 3월 21일 오후 한강 입구 虎島(月尾島) 부근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그 직전에 辦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다다(花房義質)가 탄 일본함정 磐城도 도착하여 닻을 내렸다. 하나부사가 귀임한 것은 조선측과 관세규칙에 관하여 협의하는 한편, 슈펠트를 만나 조미조약에서 높은 관세를 인정하지 않도록 교섭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는 슈펠트의 도착이 늦어지자 마건충을 만난(3월 24일) 뒤 서울로 떠났다.366)宋炳基, 위의 책, 258쪽.

 마건충은 영접나온 伴接官 趙準永(1834∼1886), 역관 이응준 등을 통하여 조약체결과 속방조회에 대한 조선측 반응을 탐문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체적 답변을 회피하였다. 마건충은 마침내 그의 거처로 정해진 仁川行館에서 철수하였다(3월 24일).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 관원들에게 중국 관원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리고, 나아가 조약체결 과정에서 그가 뜻하는 대로 조선측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를 예방한(3월 27일) 接見大官 申櫶(1810∼1888), 副官 金弘集(1842∼1896) 등에게 청제에 대한 3跪 9叩의 예를 올리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367)宋炳基, 위의 책, 258∼261·263∼264쪽.

 그러나 이응준 등이 답변을 회피한 것은, 마건충의 지적처럼 그들이 매우 교활해서가 아니라 조정의 공론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약체결 교섭은 비밀리에 다루어져 왔다. 그것이 정부 관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준영을 반접관에 임명하면서(3월 15일)부터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협의과정에서 소외된 정부 대신들, 특히 聯美論을 지지하여 온 이최응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368)宋炳基, 위의 책, 261∼262쪽.

 이최응은 이홍장에게 보낸 서함에서 단지 미사의 동래를 막아달라고만 하였을 뿐, 통상을 요청한 사실이 없음을 들어 조약체결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는 국왕이 신헌을 접견대관에 내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국왕이 신헌의 직함을 밝히지 않은 채 인천으로 보내어 협상을 담당케 하고, 김홍집을 그 부관, 徐相雨(1831∼?)를 從事官에 差下하는(3월 24일) 기이한 발령을 낸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369)宋炳基, 위의 책, 262쪽.

 이런 정부내의 사정은 서울을 다녀 온(3월 25일) 이응준에 의하여 비밀리에 마건충에게 전달되었다. 이응준은 그렇기 때문에 立約할 때 신헌 등이 전권을 띠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마건충에게 당부하였다. 또 조약체결 협의는 국왕이 親信하고 있는 김홍집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충고도 하였다. 이응준의 이 충고는 조약체결을 김홍집이 주관하고 있으며, 그가 실질적인 전권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370)宋炳基, 위의 책, 262∼263쪽.

 이응준이 마건충을 방문하던 날(3월 25일) 슈펠트를 태운 스와타라(Swatara, 汕島)호가 호도에 도착하였다. 마건충은 다음 날(3월 26일) 슈펠트와 회담을 갖고 제1관을 거론하여 속방조회로 대체한다는 것을 재확인하였다. 마건충은 속방조회로서도 조회일자를 조인전으로 한다면, 미국이 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조선이 중국의 ‘屬國’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제1관’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371)宋炳基, 위의 책, 263쪽.

 슈펠트와 속방조회 문제를 재확인한 마건충은 이응준의 권고에 따라 조선 관원들, 특히 그를 예방한(3월 27일) 김홍집과 필담을 나누면서 조약의 조속한 체결과 全權諭旨의 발급을 독촉하는 한편, 속방조회를 설득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전혀 사실과 다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가령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기 때문에 슈펠트는 중국과 조미관계조약을 체결하기를 희망하였다던지, 조선과 ‘平行相待’하는 데 난색을 표시하고 속방조회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372)宋炳基, 위의 책, 263∼265쪽.

 마건충에 의하면 속방조회는, “자주라는 명분을 빌리어 실제로는 속방의 뜻을 밝히는(申明)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김홍집은 이에 선뜻 동의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과 ‘평행상대’ 할 수 있는 방도를 일러준 데 대하여 오히려 감사하였다.373)宋炳基, 위의 책, 265쪽.

 마건충은 인천행관을 다시 방문하였다(4월 1일). 신헌·김홍집 등의 내방에 대한 답방을 겸하여, 행관 철수 등 그가 취한 강경한 태도로 인하여 생겼을지도 모를 조선 관원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전권유지·속방조회문·조약체결을 독촉하고, 조약초고를 미리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김홍집은 초고에 찬성하였다. 다만 미곡 수출에 난색을 표하고, 그 타협안으로 인천항에 한하여 수출을 금지하도록 수정할 것을 요청하였다.374)宋炳基, 위의 책, 265∼267쪽.

 조약의 조속한 체결을 바라고 있던 슈펠트는 조선측의 미곡 금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건충은 미곡 문제를 빙자, 김홍집에게 서함을 보내어(4월 2일) 전권유지와 속방조회문을 독촉하였다. 즉 미사가 두 문건을 받으면 미곡 문제를 승낙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김홍집은 곧 마건충을 방문하여(4월 3일) 두 문건을 건네주었다. 속방조회문은 마건충이 초해준 문안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전권 유지도 그가 초해준 그대로였을 것이다.375)宋炳基, 위의 책, 267∼268쪽.

 마건충은 김홍집과 약속한 대로 신임장(전권유지)을 교열하기 위하여 4월 4일(양 5월 20일) 오후, 슈펠트와 같이 인천 행관으로 갔다. 슈펠트로서는 신헌·김홍집의 내방(3월 27일)에 대한 답방을 겸한 것이었다. 잠시 동안 김홍집·마건충은 필담을 갖고 조인을 4월 6일에 하기로 결정한 뒤, 양측 대표들은 곧 신임장을 교열하였다.376)宋炳基, 위의 책, 268∼269쪽.

 예정대로 4월 6일(양 5월 22일) 濟物浦 연안인 仁川府 花島鎭 萬石洞(現 仁川直轄市 東區 花水洞)에 설치된 帳房에서 양측 대표들은 漢·英文 각 3통의 조약문에 조인하였다. 조인을 마치자 신헌·김홍집은 ‘約外照會’, 즉 속방조회를 슈펠트에게 수교하였다. 그 요지는, 조선은 본디부터 중국의 속방이지만 내치 외교는 자주하여 왔으며, 중국의 속방으로서 조선이 갖는 의무는 미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이었다. 일자는 3월 28일, 즉 조약체결전으로 되어 있고, 朝鮮開國年紀와 中國年號를 병기한 것이었다.377)馬建忠,≪適可齋記行≫(臺灣:文海出版社) 4,<東行初錄>光緖 8년 4월 6일.
Paulin, op.cit., pp.495∼496.
奧平武彦, 앞의 책, 136∼138쪽.
金源模,≪韓美修交百年史≫(韓國放送事業團, 1982), 119쪽.
宋炳基, 위의 책, 269∼270쪽.

 조인을 마친 뒤 마건충은 김홍집·슈펠트 등을 위원함으로 초청하여 오찬을 대접하였다. 조약체결 축하연이었다. 마건충은 틈을 타 김홍집과 필담을 갖고 조약 체결에 대한 국왕의 자문과 관계 문건, 즉 조약문과 속방조회문 등을 청국으로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이홍장이 국왕에게 보낸 자문에서 요청한 바를 이행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김홍집은 그렇게 할 것을 다짐하였다.378)宋炳基, 위의 책, 270∼271쪽.

 한편, 하나부사 요시다다가 반성호로 돌아 온 것은 4월 6일 저녁 때, 마건충이 베푼 조약체결 축하연이 끝난 뒤였다. 하나부사는 다음 날 아침에 마건충을 방문하였고, 이어 슈펠트를 방문하였지만, 이미 조약에 간여할 기회를 잃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이 날 슈펠트는 마건충 등을 오찬에 초청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들과 같이 조약체결의 축배를 들었을 뿐이었다.379)宋炳基, 위의 책, 271쪽.

 국왕 배알(4월 10일)까지 마친 마건충은 4월 12일 본국으로 回航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약 체결차 호도에 온(4월 11일) 영국 전권 윌스(Willes, George O.), 뒤이어 온(4월 20일) 프랑스 전권 딜롱(Dillon)과 다시 협상을 시작해야만 하였다. 귀국이 늦어지자 그는 4월 15일 양위함을 烟臺로 보내어 북양대신에게 조미조약 체결 경위를 보고하게 되었다. 4월 5일 진해함을 보내어 보고한 데 이은 두번째 보고였다. 조선 정부도 양위함 편에 이응준을 청국에 파견, 조약체결에 관한 국왕의 자문과 관계 문건, 즉 조약문과 속방조회문 등을 북양아문과 예부로 移咨하였다.380)宋炳基, 위의 책, 271∼273쪽.

 국왕의 자문 및 마건충의 보고를 받은 서리 북양대신 張樹聲(1824∼1884)은 곧<朝鮮與美國議立和約事竣摺>을 작성하여(4월 24일) 광서제에게 상주하였다. 그리고 이 날 같은 내용의 서한을 총리아문으로 보냈다. 조미조약의 성공적인 체결을 알리는 장수성의 상주문에는 “조선을 지켜 잃지 않았다(朝鮮守而不失)”는 우리의 주목을 끄는 구절이 들어 있다. 마건충은 그에게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였던 것이다.381)≪淸季中日韓關係史料≫2 (臺灣:中央硏究院 近代硏究所, 1972), 606∼609·666∼668쪽.
張樹聲,≪張靖達公(樹聲)奏議≫6(臺灣:文海出版社),<朝鮮與美國議立和約事竣摺>.
宋炳基, 위의 책, 273∼274쪽.

 마건충은 조영조약의 체결(4월 21일, 양 6월 6일)을 주선하면서도 속방 조회에 유의하여 그것을 관철시켰다. 그는 또 호도를 떠나기 전날(4월 22일) 김홍집에게 조선이 앞으로 체결하는 수호통상조약에도 중국이 계속 간여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그가 밝힌 대로 청국은 조선의 조약체결에 계속 간여하였다. 그리하여 속방조회는 이행되었으며, 그 조회문은 조약문과 함께 북양아문과 예부로 이자되었다.382)宋炳基, 위의 책, 271∼273쪽.

 한편, 중국측의 견해와는 달리, 슈펠트는 속방조회가 특별한 정치적 의미나 구속력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점은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측은 속방조회에 포함되어 있는 서로 모순되는 두 내용, 즉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는 것과 내치·외교를 자주하여 왔다는 것 중 후자를 더 중시하고 존중하였던 것이다.383)奧平武彦, 앞의 책, 138∼141쪽.
宋炳基, 위의 책, 280쪽.

 이러한 미국측의 견해는, 고종 20년(1883), 4월(양 5월)에 초대 공사로 부임한 푸트(Foote, Lucius H.)편에 보내 온, 조선 국왕의 속방조회에 대한 아더(Arthur, Chester A.)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회답국서에 잘 나타나 있다.384)≪舊韓國外交文書 美案 1≫(高麗大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18∼19쪽.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는 미국 商民의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귀 군주가 내치 외교와 통상을 자주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국회는 조선과의 수호에 동의하였으며, 본인도 이를 비준하였다. 조선이 자주국이 아니라면 미국은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측에서 조미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은 국왕 고종이었다. 그리고 척족을 대표하는 閔泳翊(1860∼1914)과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 우리가 온건개화파라고 부르기도 하는 소장 관원들이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한편, 역관 이응준·변원규·이용숙, 개화승 이동인(중도 탈락)·탁정식 등이 청국측과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국왕이나 이 소장 관원들은 장차 있을지도 모를 러시아의 침략이라고 하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개화·자강정책도 추진하였지만, 미국 등과 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을 이룩함으로써 이에 대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385)宋炳基, 앞의 책, 281쪽.

 그러나 국왕이나 이 소장 관원들이 생각한 세력균형이란 전통적인 조청관계의 유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청국의 비호를 받는 가운데 미국 등과 조약을 체결하여 위기를 극복해 나가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청국측에서 속방문제를 거론하여도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386)가령 문의관 어윤중·이조연 등이 김윤식과 같이 4월(1882) 3일 津海關署에서 津海關道 주복과 筆談하는 가운데 어윤중이 “大敎大然 然中(魚允中)等雖愚 豈可不知此理 當以往日所言告之 頃往遊日本也 日人以獨立指本邦 中大言折之曰 爲自主則可 獨立則非也 有大淸焉 自來奉正朔修侯度 何可曰獨立 彼乃不復言 至謄於日報矣”라고 밝히고 있다(≪淸季中日韓關係史料≫2, 593쪽;金允埴,≪陰晴史≫, 133쪽). 그리하여 고종 19년(1882) 8월에 체결된<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前文에 ‘屬邦’을 명문화하는 데도 동의하였던 것이다.

<宋炳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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