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4. 유럽 각국과의 조약체결
  • 1) 한·영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1) 한·영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朝鮮과 英國의 접촉은 영국군함 프로비덴스(Providence)호가 1797년 元山 近海를 지나면서 원산만을 그 함장의 이름을 따서 브로우튼 만(Broughton Bay)이라고 명명할 만큼 일찍 시작되었다. 1861년 영국은 조선과의 관계수립을 모색하여 일본을 통해 釜山의 倭館貿易에 개입했으며, 부산에서 군대주둔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866년에는 청국정부에 조선과의 통상관계를 알선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독일인 오페르트(Oppert)를 渡韓시켜 조선정부와 협상을 주선토록 하기도 하였다.387)송정환,≪러시아의 조선침략사≫(汎友文庫 98, 1990), 32쪽.
한·영간의 초기 접촉에 관해서는 李瑄根,≪韓國史 最近世編≫(을유문화사, 1981), 746∼752쪽.

 1875년 일본군함 雲揚號가 강화도를 포격하면서 한일관계가 긴박해지자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H. Parkes)는 본국정부에 대해 전략적 요지인 巨文島(Port Hamilton)를 즉시 점령할 것과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할 것을 권고하였다.388)廣瀨靖子,<日淸戰爭前のィギソス極東政策の考察>(日本國際政治學會, 1974). 당시 일본은 조선이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하여 무역에 대한 전망을 비관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크스는 일본의 평가보다 조선을 훨씬 좋게 생각하였다.389)F. C. Jones, Foreign Diplomacy in Korea, 1866∼1894(Unpublished, Ph. D. Dissertation, Harvard University, 1935), p.159.

 그러나 영국의 對韓修交는 러시아와의 관계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아 영국정부는 自重論을 펴며 한동안 정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이유는 영국의 대한수교가 자칫 러시아의 조선 침략을 촉진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유럽의 한 강대국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려고 할 때 그 나라와 협력하여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은 당시 러시아와 터키간의 전쟁(1877)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390)위의 책 166쪽.

 1880년 伊梨문제로 인한 러·청간의 전쟁위협은 다시 조선을 주목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1881년 駐淸 英國公使 웨이드(Sir Thomas Wade)는 본국으로부터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청국이 협조를 해 줄 것인지를 청국정부에게 알아보도록 훈령을 받자 “러시아가 봄에 조선에서 어떤 항구를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는 전문을 보냈다.391)우철구,<19C 후반 영국의 對韓政策>(≪國史館論叢≫, 1993, 44), 58쪽. 웨이드는 “어떤 한 강대국, 특히 영국이 조선에 간섭한다는 것은 이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러시아의 공격을 촉진시키게 될 것” 이라고 생각했다.392)E. V. G. Kiernan, British Diplomacy in China, p.79. 뿐만 아니라 러·청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에 개입할 것으로 인식되었다.393)A. Chéradame, Le monde et la guerre russo-aponaise(Paris, 1996), p.74.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제2차 그래드스톤(Gladstone) 내각의 외상인 그랜빌(Granville)은 러시아의 조선병합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번에도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미국의 슈펠트(Shufeldt)제독의 사명을 지켜보는 입장을 택하였다.394)F. C. Jones, op.cit., p.232.

 영국은 조선과 국교관계를 수립하기 전에 이미 조선과 간접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영국의 면제품은 上海에서 나가사키(長崎)로 와서 부산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1877∼1878년 사이 부산에서 일본이 이룩한 거래액을 보면 1877년의 무역총액은 299,039圓(1圓은 1$에 해당)이었고, 일본의 수출액은 85,295圓 이었다. 그 수출품의 대부분은 영국제 상품이었다.395)F. C. Jones, ibid., p.165.

 또 1878년 전반기수입을 보면 일본상품에 대한 조선측의 수요는 下降을 나타냈으나 다른 외국 상품의 수요는 증가를 보였으며, 101,985圓의 총수입 가운데 69,663圓이 외국상품, 특히 영국의 면제품이었다.396)위와 같음. 영국의 對韓 직거래로서는 1883년 영국의 怡和洋行(Merrs. Jardine, Matheson & Co.)이 제물포에서 무역을 하였고 牛皮貿易 및 鑛務·船運事業에도 종사하였다.397)韓㳓劤,≪韓國開港期 商業硏究≫(一潮閣, 1970), 96쪽.

 한·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天津에 전해지자(1882. 5. 26) 당시 천진에 와있던 영국공사 웨이드는 즉시 李鴻章을 방문하여 조선과의 교섭을 알선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홍장은 영국이 한미조약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원한다면 협조할 것을 약속하고 조선에 체재중이던 馬建忠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웨이드공사는 아시아함대 사령관 윌스(George Ormumaney Willes)제독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神戶領事 아스톤(Aston)과 통역 모드(Maude)를 대동하고 군함 비질란트(The Virgilant)호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발하여 5월 27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5월 30일(음 4월 14일)에는 조선측 全權大官 趙寧夏, 副官 金弘集이 마건충과 함께 윌스를 찾아가 한영조약 속에 속방문제를 삽입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윌스는 본국정부의 훈령이 있어야 한다고 거절하였다. 따라서 양측은 한미조약의 경우처럼 照會로 대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윌스는 번역관이 上海에서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 조문을 정리한 후 조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월 5일 갑자기 天津 주재 프랑스 영사 딜롱(Dillon)이 군함을 타고 역시 청국정부의 소개장을 갖고 한국에 나타났다. 따라서 윌스는 프랑스에 뒤질까봐 서둘러 6월 6일 한·영 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였다.398)李光麟,≪韓國史講座≫Ⅴ 近代篇(一潮閣, 1981), 113쪽.

 그러나 영국정부는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6월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한 독일정부에게도 조약비준을 거부하게 하였다. 영국정부가 비준을 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이 개혁되는 대로 치외법권을 폐지한다는 약속을 영국이 해준 것으로, 이는 단지 영국과 조선간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청국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399)Kiernan, op.cit., pp.101∼102. 둘째, 관세와 톤(噸)稅의 율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영국은 최고 30%의 관세를 승인하였다. 셋째, 1842년 南京條約에서도 규정하지 않은 아편수입금지를 인정한 점과, 넷째, 마건충의 권고에 따라 조선측이 영국여왕의 칭호와 함께 인도황제라는 문구를 조약에 삽입하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영국여왕을 조선왕과 同列에, 그리고 청국황제보다 하위에 서게함으로써 영국여왕을 모독했다는 점을 구실로 삼았다.400)F. C. Jones, op.cit., p.313.

 한영조약이 아편수입금지와 高率의 관세를 규정한 내용이 알려지자 런던(London)의 상공회의소는 외무성 앞으로 항의문을 보내고 이러한 조약내용은 영국의 자유무역의 이익을 해친다고 반대하였다.401)F. C. Jones, ibid., p.348.
이광린, 앞의 책, 115쪽.
따라서 영국은 조약비준을 유보하고 나가사키 주재영사 아스톤을 한국에 파견하여 비준교환을 연기시킨 후 조약의 修正을 도모하였다.

 한편, 壬午軍亂의 처리문제로 조선정부가 파견한 朴泳孝·金玉均·閔泳翊 등 修信使 일행의 일본방문은 영국측에게 조약의 수정을 위한 협상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파크스와 아스톤 서기관은 1882년 10월 16일 민영익과의 회담을 위시하여 10월 23일과 11월 25일에는 박영효·김옥균 등과 일련의 회담을 가졌다. 이 때 파크스는 영국정부가 윌스조약의 모든 조건을 다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하였다.402)최문형,<韓英修交와 그 歷史的意義>(≪韓英修交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4), 56쪽. 이에 대해 박영효가 “만일 한국이 조약개정을 바란다면 이는 韓英 양국정부에 의해 직접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자, 영국은 조약수정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403)최문형, 위의 글, 57쪽. 당시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의 조선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구미세력을 끌여들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의도는 오히려 파크스에 의해 역이용당하였다.404)이광린, 앞의 책 116쪽.

 일단 영국측은 1883년 1월 9일 박영효 등이 귀국한 뒤 5월에 아스톤을 조선에 파견하여 한·영, 한·독 수호통상조약의 비준교환시기를 1883년 12월 3일 이내로 연기하기로 정정 조인하였다.405)이선근, 앞의 책 754쪽.

 그 후 駐淸公使로 전임된 파크스는 1883년 10월 27일(음 9월 27일) 全權大臣으로서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측 전권대신 민영목과 더불어 협상을 하였다. 이 때 조선측은 청국의 알선을 배제하고 영국측과 직접 협상하였다. 결국 개정된 한·영 수호통상조약은 1883년 11월 26일(음 10월 27일) 조인되었고,406)≪舊韓末條約彙纂≫中, 311쪽. 비준은 1884년 4월 28일 督辦交涉通商事務 金炳始와 영국측 전권 파크스 사이에 교환되었다.

 한영조약은 全文 13조의 한·영 수호통상조약과 부속통상장정 및 稅則章程 善後續約 3款들로 구성되었다. 한영조약을 한미조약과 비교하면 체제상으로는 한미조약을 모방하였으나 실질적인 권익면에서는 한일조약에 따라 영국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였다. 거중조정에 관한 부분에서 한미조약 제1조는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한다”고 한데 비해 한영조약에서는 “타협을 초래하기 위하여 조정에 노력한다”고 고쳤다. 치외법권의 경우 한미조약이 “日後에 조선의 법률과 재판절차를 수정 및 개정하여 미국의 것과 일치하게 되면 철폐한다”고 규정한 대신 한영조약은“영국신민이 조선에서 어떤 죄를 범하면 영국 재판당국은 영국법률에 준거하여 이를 재판하여 처벌한다”고 하였다(제3조). 또 영국군함은 개항장 여부를 불문하고 조선 국내 어디든지 정박할 수 있고, 또한 선원의 상륙을 허용할 것을 규정하였다(제8조).

 관세율은 윌스조약이 물품에 따라 10%에서 30%의 관세를 규정한 것을 5%에서 20%까지로 인하하고, 영국 수출무역의 大宗이던 綿製品은 7.5%로 정하였다. 조약의 유효기간은 한미조약의 경우 5년으로 규정한데 비해, 한영조약은 10년으로 하였다. 외교대표의 경우 駐淸公使인 파크스가 1884년 3월 7일(음 고종 21년 2월 10일) 朝鮮駐剳公使의 직까지 겸임하였으며 미국의 경우처럼 전권공사(Minister Plenipotentiary)를 서울에 파견하지 않고 아스톤을 총영사의 직위로 하여 서울에 상주시켰다.

 아편전쟁 이후 영국과 청국간에 南京條約(1842)이 체결된 이래 구미열강들이 동양의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체결한 修好通商條約은 불평등조약이었다. 불평등조약의 핵심내용은 바로 치외법권, 관세자주권 결여 및 최혜국조항(Most Favoured Nation's Claues)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19세기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 불평등조약을 법적 근거로 하여 상품을 교역하고 원료를 공급받도록 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윌스가 체결한 한영조약이 동양에 있어서 영국의 통상교역에 불이익을 가져오고 다른 나라와의 통상에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고려에서 이를 비준하지 않은 것은 불평등조약에 근거한 전형적인 자본주의 침략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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