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4. 유럽 각국과의 조약체결
  • 3) 한·러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3) 한·러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韓露 양국이 국경을 접하게 된 것은 1860년 露淸간에 체결된 北京條約에 의해서다. 1854년 이미 영흥만을 측량하고 조선에 대해 관심을 보이던 러시아는 국경을 접하게 된 이후 더욱 빈번하게 두만강을 넘어서 또는 海路를 통해 조선과의 통상수교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원군 집정하에서 쇄국정책으로 일관한 조선정부는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이 당시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기도는 不凍港獲得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러시아는 본국과 아시아領과의 연결이 육로교통의 험준한 장애 때문에 주로 해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부동항은 필수적이었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통한 진출이 좌절된 후 러시아는 일단 대마도를 고려했으나 영국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가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러시아측은 한반도 접근에 신중했다. 왜냐하면 영국과 청국이 강한 의혹의 눈길로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이 목적을 달성할 만큼 군사력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1888년까지 연해주 주둔병력은 常駐 코사크를 제외하고는 15만 명에 불과하였다.421)崔文衡,<韓露修交의 背景과 経緯>(≪韓露修交 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4), 59쪽. 또한 조선측의 러시아에 대한 공포증도 매우 컸다. 대원군 집정기간에 야기된 병인양요도 러시아의 수호·통상요구로 인해 야기되었다. 1876년 조선이 개국된 이후에도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공포감과 기피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영국의 사주를 받은 청국과 일본이 조선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두려워하도록 만듦으로서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갖도록 했기 때문이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이 日本使行 때 주일청국공사관 黃遵憲은 러시아의 탐욕과 침략성을 강조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하여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하여 ‘防俄’할 것을 권고하는<私擬朝鮮策略>을 그에게 주었다. 일본도 또한 기회있을 때마다 조선에 대해 防俄的 태도를 촉구하였다.422)禹澈九,<露·日 戰爭前 韓國의 北方關係(1898∼1903)>(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한국정치외교사학회논총≫6, 1989), 132쪽.

 그러나 조선이 러시아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나 양국이 근접할 수 있는 몇 가지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하나는 고종과 개화파인사들이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즉 조선이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점은 청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는 열망이었다. 그러한 열망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오자 구미세력을 끌어들여 세력균형을 이룸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미국·영국·독일뿐만 아니라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던 러시아·프랑스와도 수교를 해야 한다고 인식한 점이다.423)이광린,≪開化黨硏究≫(一潮閣, 1973), 45∼49쪽.
최문형, 앞의 글(1984), 66쪽.
게다가 고종이 가지고 있던 미국과 영국에 대한 기대도 실망으로 바뀌면서 친러방향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는 1883년 해관창설과 外部顧問의 임무를 띠고 조선정부에 초빙되어 온 묄렌도르프(P. G. von Möllendorff, 穆麟德)의 친러정책이다. 묄렌도르프는 이홍장이 추천·파견한 親淸인물로서 조선에서 일본세력의 성장을 견제하고 동시에 러시아 세력의 침투를 저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임한 후 친러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가 外部(總理衙門)의 고문으로 취임하여 느낀 것은 조선에 미치는 청·일의 정치적 세력이 너무 강대하여 그것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저해한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조선은 러시아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424)高柄翊,<穆麟德의 手記>(≪震檀學報≫24), 166∼167쪽. 그가 러시아세력을 조선에 끌어들인 데에는 그의 조국 독일로부터 권고를 받았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425)崔文衡, 앞의 글(1984), 68쪽. 여하튼 그는 적극적으로 한·러 수호통상조약을 추진하였다. 나아가 국왕에게 러시아 군사교관을 초빙토록 획책하였으며 그 대가로 元山灣을 러시아에 제공하는 밀약을 도모하기도 하였다.426)禹澈九, 앞의 글(1989), 133쪽.

 셋째, 閔泳翊을 중심으로 한 세력도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즉 遣美使節로서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온 민영익은 “러시아의 강대함이 경탄을 마지못 할 정도이며 조만간에 러시아의 세력이 한반도에도 미칠 것이니 조선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상책”이라고 건의하였다.427)林毅陸,≪金玉均傳≫(上) 昭和 19年, 282쪽.

 한·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청국주재 러시아공사는 즉시 이홍장에게 주선을 요청했으나 이홍장은 이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조선과의 조약체결의 임무를 맡은 천진 주재 러시아 영사 베베르(K. I. Carl Waeber)는 이홍장이 추천, 파견하는 묄렌도르프에 착안하고 그가 부임하기 전 벌써 그를 찾아가는 기민성을 발휘하였고,428)F. O. 17/900 No. 14. the most confidential, Grosvenor to Granvielle(Peking, November 25, 1882.) 마침내 그를 설득하여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이홍장이 파견한 묄렌도르프의 행동을 중시하였다.429)李瑄根, 앞의 책, 767쪽.

 조선정부는 外務督辦 金炳始를 전권에 임명하여 러시아전권 웨베르와 회담한 결과 1884년 7월 7일 13조로 된 한·러 수호통상조약과 3조의 부속통상장정·세칙·세칙장정 및 善後續約에 조인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1885년 10월 6일(음 고종 22년 8월 28일) 베베르는 러시아 대리공사겸 총영사의 자격으로 서울에 와서 10월 14일 外務督辦 金允植과 한러조약의 비준을 교환하였다. 조약의 체제와 내용은 한영조약과 비슷하며 영국의 경우처럼 러시아의 군함도 조선의 모든 항구에 자유롭게 입항하도록 규정하였고 조선영해의 측량, 海圖의 작성 등을 허여하였다. 치외법권 및 관세의 규정도 한영조약과 같았다.430)≪舊韓末條約彙纂≫下, 4∼42쪽.

 그 후 1888년 9월 20일(음 7월 13일)에는 韓露陸路通商章程이 체결되었고 그 결과 함경도의 慶興이 새로운 開市場으로 지정되었다. 이 때 한국측 전권은 趙秉式, 러시아측 전권은 베베르였다.431)≪高宗時代史≫三, 고종 25년 7월 13일,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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