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5. 개항의 역사적 의의
  • 2) 불평등조약체제의 수립과 그 영향

2) 불평등조약체제의 수립과 그 영향

 개항 직전의 조선사회는 농업·광업·수공업 등 산업 전부문에 걸쳐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나타나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萌芽的 형태에 머물렀을 뿐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개항은 외국 자본제 상품의 대량유입과 미곡을 비롯한 국내 1차 산품의 대량유출을 가져와 국내산업 전반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개항 이후는 외국상품의 침투에 대응하여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체계적인 육성책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체제 하에서 조선정부는 효율적인 국내산업 보호육성책을 마련할 수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자본주의적 성장이 미숙하였던 일본에 의하여 개항을 맞이하였고, 직접적으로 외압을 가하는 주체가 청·일 양국이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들 양국은 서구열강에 의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으며 근대로 급속한 이행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국내의 사회적 모순을 조선사회로 전가시킴으로써 자국 자본주의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하였다. 따라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 외압에는 순수한 경제적 침략보다는 주로 정치적·군사적 방식을 통한 폭력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한 청·일 양국의 원시적 축적형 외압에 직면하여 이른바 ‘이중의 외압’을 받게 되었다.449)梶村秀樹,<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帝國主義體制로의 移行>(≪開發途上經濟の硏究≫, 世界社, 1981);≪韓國近代經濟史硏究≫(사계절, 1983, 번역 수록).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같은 해 8월 조인된 조일수호조규부록·조일통상장정과 함께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세 항구의 개방·영사재판권에 의한 치외법권·일본화폐 유통권을 비롯하여 근대적 관세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무관세 무역까지 용인함으로써 일본의 무제한적 침탈을 보장해 주었다. 이후 조선은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청국 李鴻章의 권유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잇따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들 조약은 내용상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성격은 한결같이 불평등조약으로 최혜국조관을 매개로 하나의 연결된 체제를 이루면서 조선을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시키는 한편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탈을 촉진하였다.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조약은 무역에서 관세자주권과 수입10%, 수출5%의 관세율을 규정하고 조선의 곡물수출 금지권을 인정함으로써 일본과의 조약에 비해 조선에게 다소 유리한 측면도 있었지만, 강화도조약에는 없던 최혜국조관이 규정되는 등 여전히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최혜국조관은 타국과의 조약에서 체결된 조약상의 특혜를 균점할 수 있는 권리로 이후 조선이 다른 나라와 체결한 모든 조약에 이 조문이 첨가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모든 국가가 조선에서의 특권을 공유하게 하였다.

 한편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 청국은 정치적·군사적 압력을 가하며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하 조청장정)을 일방적으로 체결하였다. 서문에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라 규정한 이 장정을 통하여 청은 최초로 한성·양화진에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여행권(護照)을 소지한 경우 개항장 밖으로 통상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조선 연안에서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권리까지 얻게 되었다. 아울러 조선에서 독점적인 권리를 누리기 위해 이 장정의 내용을 타국이 균점할 수 없다고 선언했지만, 청의 일방적인 선언과 관계없이 조일통상조약 개정과 조영조약의 비준에 악영향을 미쳐 불평등조약체계의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450)李炳天,<開港期 外國商人의 侵入과 韓國商人의 對應>(서울大 박사학위논문, 1985), 28∼30쪽.

 1883년에는 일본과 종래의 통상장정을 개정한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하였다. 이 장정에서 조미조약에서 인정되었던 관세자주권이 부정되고, 수출 5%, 수입 8%를 기본으로 하는 협정관세로 전환되었다. 또한 조청수륙무역장정에서 인정되고, 조미조약에서는 수출품에 한하여 인정되었던 개항장 밖 과세는 일체 부정되었다. 또한 통상장정에 변칙적으로 최혜국조관을 삽입하여 조미조약과 조청장정에서 각각 승인된 연안해운·연안무역권을 획득하였다.

 영국과는 이미 1882년에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조청장정의 체결을 지켜본 영국은 조약 비준을 일방적으로 거부하면서 조청장정에서 청이 획득한 것 이상의 특권을 요구하여 마침내 1883년 개정된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에서의 불평등조약체계는 그 형태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수출 5%, 수입 7.5%의 관세율을 기본으로 하는 협정관세 및 일체의 개항장 밖 과세의 부정, 연안무역권과 연안해운권, 최혜국 조항 등이 승인되었다. 이밖에도 영국은 거류지 밖 4km까지 외국인의 토지·가옥의 임차·구매권과 공장 등의 설립 자유와 조청장정에서 청의 독점으로 규정되었던 한성·양화진의 개방 및 개항장 밖 통상권을 획득했다. 특히 조청장정에서 조선산 상품 구매를 위해 독점적으로 규정되었던 개항장 밖 통상권은 구매·판매에 모두 적용되어 개항장 밖 40km까지 여행권없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문들은 그뒤 최혜국조관에 의해 열강에게 균점됨으로써 조선시장은 한성에서 벽촌에 이르기까지 외국상인에게 개방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조선의 조약체계는 청과 일본이 서구열강과 맺은 조약에 비하더라도 한층 더 불평등한 것이었다. 청국은 서구 열강에게 자유무역을 기초로 한 통상항의 개방과 거류지의 설치, 영사재판권, 협정관세, 최혜국 조항, 개항장 밖 통상권, 연안무역권·연안해운권, 해관관리권을 모두 인정해 주었고, 일본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관세율, 개항장 밖 통상권의 불인정, 연안무역권·연안해운권의 제한, 해관관리권을 확보하여 청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청이 각국과 맺은 불평등한 조항을 포함하여 개항장·개시장에서의 외국인의 토지·가옥소유 허가, 공장의 건설과 수도의 개시장화로 청보다 더 불리한 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청·일을 비롯한 열강이 정치·군사적 압력을 동원해 조약문을 자국에 유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경제적 침투를 더욱 강화해갔다.451)河元鎬,≪한국근대경제사연구≫(신서원, 1997), 18∼19쪽.

 조선정부의 적절한 국내산업 보호육성책이 없는 가운데 불평등조약체제를 기반으로 전개된 무역이 조선사회에 미친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조선산 쌀·콩 등 곡물이 주로 수출되고 자본제 면제품이 수입되는 수출입 무역구조가 점차 형성되어갔다. 미곡의 대량유출은 조선사회 내부에 식량부족으로 인한 미가등귀를 가져와 심각한 사회문제를 초래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의 발생은 직접적 원인인 관료들의 부패 이외에도 흉작과 미곡의 대일수출로 인한 식량부족에도 한 원인이 있었다.452)彭澤周,≪明治初期日韓淸關係の硏究≫(塙書房, 1969), 291∼292쪽.

 둘째로, 조선의 재래적 상품유통망이 해체되고 점차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통구조가 형성되어 갔다. 조선의 재래적 상품유통망은 지리상의 특성으로 인하여 크게 경상도 동해안과 강원도 영동지방·함경도를 연결하는 동해안 유통권과 전라도·경상도에서 한양·개성과 황해도·평안도를 연결하는 서해안 유통권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산에 이어 원산(1880), 인천(1883) 등 각지에 개항장이 설치되면서 재래의 상품유통망은 해체되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통망이 형성되었다.

 셋째로, 외국무역의 확대에 따른 유통량의 증가에 따라 점차 상품생산구조도 변화되어 갔다. 조선의 주된 수출품은 쌀과 콩 등의 곡물류였고 이들 물품은 대일수출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의 농업생산기반은 쌀과 콩의 단작화로 협소화되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 또한 자본제 면제품의 대량수입은 조선의 자급적 의료생산체계를 붕괴시켜 나갔다. 조선의 면포생산의 기본형태는 부녀자에 의한 농가부업적 가내수공업이었다. 그러나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비면작·비면업 지대를 배경으로 경상도·전라도의 면업 선진지역에서는 부농이 임노동자들을 선대제적으로 지배하여 면포를 대량생산하는 경영형태가 지배적이었고, 일부에서는 공장제 수공업적 경영형태도 출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외국산 자본제 면제품의 대량유입은 자본주의적 성장을 하고 있었던 농촌수공업의 발전 전망을 흐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경상도의 면포생산지역에서는 면작의 대두작으로의 전환이 광범위하게 나타났고, 전라도 지역은 紡絲와 織布과정은 생략된 채 농업생산물인 면화를 일본에 수출하여 일본방적공장의 원료를 공급하는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다. 요컨대 무역의 확대는 조선의 생산구조 자체의 변동을 가져와 조선을 일본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원료 공급지, 자본제 상품의 소비시장으로 자리잡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경제침탈에 대응하여 상권을 수호하려는 객주·여각 등 국내상인들에 의해 상회사가 설립되었고, 관료·상인자본이 중심이 되어 근대적 공장이 설립되기도 했지만, 정부의 체계적인 보호육성책과 금융기관이 부재한 가운데 불평등조약상의 제특권을 기반으로 하여 자국의 각종 금융지원까지 얻어 침탈해 들어오는 외국자본의 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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