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5. 개항의 역사적 의의
  • 3) 초기 개화정책의 추진배경과 그 성격

3) 초기 개화정책의 추진배경과 그 성격

 개항 초기 정부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악화된 대일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여전히 청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일본과의 구교를 회복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서구 국가들에 대한 개항은 고려되지 않았고, 서구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려는 태도 역시 갖춰져 있지 않았다.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최대의 정치·외교적인 현안은 강화도조약에 포함된 조항들을 매듭짓는 문제였다. 일본정부로서는 운요호사건이라는 최후 수단을 사용하여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면서 쇄국을 고집하던 조선을 개항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조약에 포함된 조항들 예를 들면 통상장정의 체결, 공사의 서울주둔문제와 부산 이외 2개 항구의 개방 등이 실현되어야 조약체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들은 메이지유신 이후 조·일 외교의 전개과정을 통해 볼 때 쉽사리 해결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 일본의 대조선정책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적극적으로 관료들을 일본에 초청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조선정부 또한 개항 이전과 달리 매우 적극적으로 일본의 정책을 수용하거나, 조선정부 독자적으로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강화도조약 체결 후 전권대신 신헌의 보고에 대해 고종은 다음과 같이 당면한 개혁정책의 방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신헌이 아뢰기를 ‘저들이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각국이 군사를 쓰는 때를 당하여 귀국의 산천이 매우 험한것으로는 싸우고 지키기에 넉넉하나 군비가 매우 허술하다 하며, 부국강병의 방법을 누누이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교린하는 성심에서 나온 듯하다. 우리 나라는 군사의 수효가 매우 모자란다’하였다(≪高宗實錄≫권 13, 고종 13년 2월 6일).

 고종은 조약체결 후 일본의 사절 파견 요청을 즉각적으로 수용하여 金綺秀를 修信使에 임명하여 도일하게 하였다. 수신사 파견을 결정한 조선정부의 목적은 개항을 강요하였던 일본에 대한 전반적인 정세파악의 필요성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군사력 부분에 관한 것이 최대의 관심이었다. 이러한 조선정부의 관심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항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일차적 원인이 일본의 무력시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의 수신사파견이 결정되자 일본은 수신사의 선편을 주선하는 외에 정부 부처사이에 협의를 거쳐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적인 개혁의 성과물들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를 선정하여 수신사의 일정을 마련하였다. 수신사의 일정은 일본정부시설에 대한 의례적인 방문 이외에 박물관 등 근대적인 제반시설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주요 대상은 군수산업 관련 시설과 육·해군의 군사훈련 상황을 보여주는 시설들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수신사 김기수는 조선측의 사정을 들어 일본측의 방문일정 대부분을 기피하였지만, 군사훈련만은 직접 참관하였다. 귀국 후 김기수가 고종에게 복명하는 과정에서도 양자의 대화 내용 중 상당부분이 일본의 군수산업과 군비증강 정책의 실상에 관한 것이었다.453)최덕수,<개화기 일본의 조선인 유학정책의 성격>(≪國史館論叢≫72, 1996).

 이와 같이 조선정부의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개화정책의 입안에 필요한 정보 유입의 통로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에 파견되었던 외교사절들의 보고였다.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대내외정책의 변화를 가져왔던 중요한 전기는 1880년에 파견되었던 수신사 김홍집의 보고에서 마련되었다.

 김기수의 파견이 신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한 儀禮的인 것이었던 것과는 달리 1880년 수신사 金弘集의 파견은 당시 한일간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인천개항 및 무관세조항개정과 상주 공사관 설치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수신사 김홍집과 그 수행원 일행은 김기수 사절단과 달리 일본 체재 중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홍집은 東京에 있는 동안 주일 청국공사 何如璋, 참찬관 黃遵憲 등과의 회담을 통해 세계의 대세와 조선외교의 진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때 황준헌은<朝鮮策略>을 통하여 조선외교의 방향으로 ‘親中國·結日本·聯美國’의 세력균형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선의 대일, 대미개방정책을 부추켰다. 아울러 그는 조선이 자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수호·통상하여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김홍집이 귀국하여 국왕 고종에게 바친 황준헌의<조선책략>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은 재야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양 국가들-특히 미국-과의 수교를 결심하는 한편 개화·자강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관제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880년 12월에는 서양 국가들과의 외교·통상에 대비하여 대외정책을 담당함과 동시에 국가의 재정·군사업무를 맡아볼 중추기구로서 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구는 청국의 總理各國事務衙門을 본딴 것이지만, 정부가 대외 개방을 통해 서구의 문화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도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과 다름없었다.

 통리기무아문의 설치로 대변되는 이 시기 조선정부의 대내외개혁 정책의 기본목적과 성격은 산하 12개 司의 기능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이들 아문으로는 사대·교린·군무·변정·통상·군물·기계·선함·이용·전선·기연·어학사 등이 있었는데 이 중 사대사와 교린사는 각각 중국과 일본에 대한 외교를 담당하였고, 어학사와 전선사는 외교업무를 지원하였다. 또한 통상사와 이용사는 통상과 재정사무를, 그리고 변정·군무·군물·기계·선함·기연사 등은 국방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무비자강을 위한 무기구입과 관리 군사양성 등을 담당하는 기구였던 것이다.454)전해종,<통리기무아문 설치의 경위에 대하여>(≪역사학보≫17·18, 1962).
이광린,<통리기무아문의 조직과 기능>(≪학술원논문집≫26, 1987).

 실제로 통리기무아문은 종래의 5영을 무위영과 장어영 2영으로 개편·강화하였으며,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근대식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또한 주전·채광·홍삼 등을 관리함으로써 재정확보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할 사실은 1881년 통리기무아문에서 일본과 청국에 조사시찰단과 영선사를 각각 파견했다는 점이다.455)정옥자,<신사유람단고>(≪歷史學報≫27, 1965).
허동현,<1881년 조선조사 일본시찰단에 관한 일연구>(≪韓國史硏究≫52, 1986).

 事大使를 통한 대중국외교의 결실이 영선사 파견이었는데 주지하다시피 영선사는 무기제조학습을 위한 것이었고, 수신사 김홍집의 도일은 전후하여 조선정부가 일본으로부터 군함 구입등을 추진했다는 사실 등을 미루어볼 때, 이 시기 조선정부의 초기 개화정책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외교상황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제도개편과 군사력증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군사력 증강정책이 그 핵심이었다.

 이처럼 통리기무아문을 중심으로 개화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조미조약을 통해 서양 국가들과의 외교·통상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할 때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청국은 조미조약의 체결을 통해 조선에 대한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도모하려던 정책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청국은 무력으로 군란을 진압한 데 이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함으로써 양국간의 종속관계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조선의 내외정에 직접 간섭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 高宗은 개화정책의 추진의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기구의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임오군란 당시 폐지되었던 통리기무아문의 체제를 이어받아 임시로 淸國의 軍機處를 모방한 機務處를 설치하였다가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과 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편함으로써 정부조직은 기존의 의정부·6조체제와 신설된 양아문으로 이원화되었다. 이와 같이 청국식 제도의 형식을 본뜬 정치기구의 개편은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고종과 개화·자강정책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고자 했던 개화파, 그리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려던 청국의 의도가 맞아들어 이뤄진 것이었다.456)전미란,<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관한 연구>(≪梨大史苑≫24·25, 1990).
韓哲昊,<통리군국사무아문(1882∼1884)의 조직과 운영>(≪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

 특히 통리군국사무아문은 통리기무아문과 마찬가지로 국정전반의 주요사안을 통괄함과 아울러 개화·자강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기구였다. 무엇보다 이 아문 산하에 ‘부국강병’ 내지 ‘裕國利民’에 관계되는 기기국·전환국·蠶桑公司·農桑局 등이 설치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통리군국사무아문은 적극적으로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설립·수용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채 당면한 재정·군사문제를 처리하는 데 머무르고 말았다. 더욱이 이 아문은 점차 민씨척족세력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조성하는 중추적 정치기구로 변모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김옥균·박영효 등은 집권층인 민씨척족세력의 무능과 부패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정변 당시 그들이 통리군국사무아문을 폐지하고 오히려 전통적인 의정부의 권한을 재강화시켜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것은 이 아문이 민씨척족에 의해 전횡되었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은 비록 3일 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했다는 점, 국왕의 전제와 민씨척족의 국정간섭을 막고 내각제도에 의한 국정운영을 모색하였다는 점, 문벌 폐지와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평등사회를 지향했다는 점, 그리고 지조법 개정과 국가재정기반의 확립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려 했다는 점 등으로 인해 인민평등권을 지향한 최초 정치개혁운동으로 평가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항을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에서 점차 벗어나 개국 혹은 개화정책을 펼쳐나갔다. 조선정부는 초기에 서구 열강이 아니라 청국과 일본, 특히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서구의 선진제도와 문물의 우월성을 인식하고 수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이를 효율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사회체제의 개혁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또한 개화정책을 담당했던 정부의 관리 역시 국제정세와 제도 전반에 대해 철저한 이해와 이를 추진할 만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초기 개화정책은 정권을 유지하는 차원에 머물고 말았다. 더욱이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외압은 개화정책의 추진을 제한 혹은 좌절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崔德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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