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2) 개화파의 분화

2) 개화파의 분화

개화파는 개항 후 개화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중에 1881년(고종 18)까지는 수구파인 위정척사파의 공격에 대응하기에도 힘이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직 개화파 내부의 분화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갈등은 주로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개화파의 개화활동을 불안하게 보고 있던 유생들은 1880년 10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주일 청국대사관의 중국인 외교관 黃遵憲이 지어준≪朝鮮策略≫을 국왕에게 바치고 이 책이 필사되어 유생들에게 전해지자 전국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개화파와 정부의 개화정책을 비판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책략≫의 주요 내용은 가장 위험한 나라를 러시아로 보고 조선은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親中國·結日本·聯美國’할 것을 권고한 것이었다. 또한 이 책은 조선이 미국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을 적극 권고하면서, 야소교(신교)는 천주교와 뿌리는 같으나 당파가 달라 정치에 간여하지 않으므로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은근히 그 수용도 시사하였다.

이 책을 읽어 본 유생들은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하여 복명한 지 약 1개월 후부터≪조선책략≫을 규탄함과 동시에 이를 가져온 김홍집의 처벌과 개화정책 추진의 중단을 요구하는 위정척사 상소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881년(辛巳)에는 이른 봄부터<영남만인소>가 올라오고, 뒤이어 전국 유생들이 줄을 이어 상소를 올리면서≪조선책략≫을 규탄함과 동시에 개화파의 개화활동과 정부의 실정도 규탄했으므로 일년 내내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상소 형식을 빌린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 위에 대원군의 서자 李載先이 중심이 되어 위정척사파와 손잡고 정변을 일으켜서 국왕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정권을 수립하려는 음모까지 발각되어 정부·개화파 대 위정척사파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개화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개혁문제에 대하여 의견 차이가 나오는 경우에도 1881년까지는 서로 잘 협조하면서 개화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후에 온건개화파에 속하게 된 김윤식은 후에 급진개화파의 영수가 된 김옥균에 대하여 1881년 영선사파견 무렵까지 그들 사이의 공고한 단결과 협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처음에 古愚(김옥균)는 瓛齋(박규수)선생 문하에서 배워 宇內의 대세를 대개 깨닫고 일찍이 동지들과 더불어 國事를 근심하고 개탄했다. 辛巳년간 나는 領選使로 天津에 들어가고, 古愚 등은 동쪽으로 일본에 건너가 유람하면서 함께 扶國하기로 약속했었다(金允植,≪續陰晴史≫하, 부록 追補陰晴史, 577쪽 참조).

그러나 1882년 6월 9일(양력 7월 23일)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서 민비정권이 붕괴되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민비 수구파는 청국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청국의 북양대신 李鴻章 등은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함에 있어서 한림원 학사 張佩綸의 이른바<東征善後六策>이라는 건의안을 채택하여 이 기회에 청국군을 파견하여 서울에 상주시키면서 적극 간섭정책을 실시하고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청국은 이에 1882년 6월 27일 약 3,000명의 청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서울에 주둔시키고, 7월 7일에는 집권자이자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군함에 초청해 놓고는 그대로 납치하여 청국에 실어다가 保定府에 유폐하여 버렸다. 이에 청군의 작용으로 대원군정권은 붕괴되고 다시 민비정권이 재집권하게 된 것이었다.

청국은 민비정권을 다시 세워 원상복구를 해놓고서도 3,000명의 청국군을 철수시키지 아니하고 서울 복판에 주둔시킨 채 이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허명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하기 위한 적극 간섭정책을 집행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크게 침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 주둔한 청국의 장군 吳長慶과 젊은 장교 袁世凱는 조선조정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陳樹棠은 재정권을 장악해 갔으며, 이홍장이 파견한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穆麟德)는 새로 설립한 해관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외교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청국측은 뿐만 아니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조선 개화파의 개화활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활동이라고 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화파를 탄압하고 개화활동을 방해하였다. 조선 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에는 어떠한 개화정책을 실시하려 해도 청국측의 방해와 견제를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임오군란’에 의하여 한 번 정권이 붕괴되었다가 청국측의 구원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된 민비 수구파는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순종하여 조선의 독립이 청군에 의해 크게 침해되고 자주근대화가 저지되는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임오군란 이전에 제휴하여 등용했던 개화파에 대해서도 이제는 이를 경원시했으며, 도리어 청군과 야합하여 개화파를 견제하고 탄압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청국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얼마나 침해했는가의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청국은 임오군란을 진압한 직후에 민비정권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 동안 조선이 각국과 맺은 불평등 통상조약들 중에서도 가장 불평등하고 청국의 특권을 설정한<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1882년 8월 23일(양력 10월 4일) 체결토록 강요했으며, 그 전문에는 조선을 중국의 속방이라고 문자로 명시해 넣었다. 심지어 속국 조선은 중국과 ‘조약’·‘조규’의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면서 ‘章程’의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청국측이 일방적으로 초안을 작성한 무역장정의 승인을 강요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선포하였다. 재정고문 陳樹棠은 방자하게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귀절을 넣은 방문을 숭례문에 써 붙이기까지 하였다.033)≪尹致昊日記≫, 1883년 10월 5일.

진수당은 또한 한국인의 집을 강제로 사들이고자 하여 이에 항의한 조선 조정의 正言 李範晋을 청군의 군영에 잡아다가 어지러이 매를 때리는 만행까지도 자행하였다.034)≪尹致昊日記≫, 1884년 5월 28일. 또한 청국은 민비정부에 대하여 ‘무릇 외교에 관한 일은 일체를 청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으며, 청군 대장 오장경은 조선국왕 고종에게 맞대놓고 “내가 3천 군대를 거느리고 이 곳에 와 있으므로 매사에 皇朝(청국)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035)≪尹致昊日記≫, 1883년 10월 3일.고 협박하였다. 오장경은 고종에게 “내년 봄에는 청국의 군대가 증파될 것이다”036)≪尹致昊日記≫, 1883년 12월 4일.라고 위협하기도 하였다.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행패도 극심하였다. 하나의 예만 들면 청군들이 광통교 약국에서 무상으로 약품을 빼앗으려 하다가 약값을 요구하는 약국주인 최씨의 아들을 사살하고 최씨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하였다.037)≪尹致昊日記≫, 1884년 1월 3일. 조선정부에서 발행하는 개화파의 신문인≪漢城旬報≫가 이 사건을 보도하자, 청군은 이 사건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해서≪한성순보≫를 발행하는 통리기무아문의 博文局을 습격하기까지 하였다.038)≪漢城旬報≫10호, 1884년 1월 3일,<革兵犯罪>. 그러나 청군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민비정권은 이러한 청군의 만행에 대하여 항의조차 한 번 변변히 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임오군란 이후의 청국의 이러한 정책전환과 청군의 만행에 대하여 대응책을 놓고 1882년 8월부터는 개화파의 내부에서 현저하게 견해 차이가 노출되어, 개화파는 김옥균·박영교·홍영식·박영효·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파와 김윤식·어윤중·김홍집·박정양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개화파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화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이 특히 주목될 수 있다.

첫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의 적극적인 간섭정책에 대한 비판과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강조의 무게에 있어서 개화파 내부에 의견 차이가 노출되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세력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 적극 간섭정책을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며 조선에 대한 매우 큰 침략적 위협이라고 간주하여 이를 격렬하게 규탄했으며, 비록 개화파의 정적이었지만 대원군을 청국이 납치해 간 것을 조선의 주권을 유린한 만행이라고 통분해 하고 이를 격렬하게 규탄하였다. 김옥균은 이 무렵 청국의 조선 독립 침해에 대하여 그의 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자래로 청국이 자의로 (조선을) 屬國으로 생각해 온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조선)가 振作의 희망이 없는 것은 역시 여기에 원인이 없지 않다. 여기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覊絆을 撤退하고 특히 獨全自主之國을 수립하는 일이다. 독립을 바라면 정치와 외교를 불가불 自修自强해야 한다(金玉均,<朝鮮改革意見書>,≪金玉均全集≫, 110∼111쪽).

김옥균이 여기서 말한 ‘獨全自主之國’은 현대어로 번역하면 ‘완전 자주독립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김옥균은 청국이 조선에 대하여 속방화 적극 간섭정책을 쓰기 때문에 조선의 큰 발전의 희망이 없는 것이므로 조선에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청국의 멍에를 철퇴하고 완전 자주독립국을 수립하는 일이라고 강조한 것이었다.

김옥균의 동지인 서재필은 이 점에 대하여 김옥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 때 김옥균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청나라 세력을 꺾어 버리는 동시에 그에 추종하는 귀족들의 세력을 빼앗은 후에 우리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정치를 수립하자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고 실현의 최고 목적이었다.

더욱이 청나라에서 대원군을 납치하였다는 것은 우리로서 참을 수 없는 치욕이라고 하여 분개함을 참을 수가 없어 그 세력구축과 귀족타파의 깃발을 둘러메고 나서려 한 것이다(金道泰 編,≪徐載弼博士自敍傳≫, 首善社, 1949, 86∼87쪽).

서재필은 김옥균 등의 이 문제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김옥균은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 아래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수치를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중에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될까 주주야야로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徐載弼,<回顧甲申政變>;閔泰瑗,≪甲申政變과 金玉均≫, 82쪽).

개화파에 의하여 일본에 유학생으로 파견되었던 申重模는 당시 김옥균으로부터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다.

나는 원래 常漢이었으나 유길준의 愛顧에 의하여 일본에 건너가서 어학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당시 渡日한 20여 명 중에서 나를 비롯한 14명은 士官學校에서 1년 반 공부했으나, 그 후 金玉均이 일본에 와서 1주일에 1회씩 모이게 되어 누누히 相會하였다. 따라서 김옥균으로부터 들은 말에 의하면,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가이다. 어떠한 국가든지 독립한 연후에야 비로소 타국과 화친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은 오직 청국의 屬國이 되어 있는 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조선도 언젠가는 독립국가가 되어서 서양제국과 同列에 서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推案及鞫案≫, 大逆不道罪人喜貞等鞫案 중의 申重模의 供述, 亞細亞文化社版 30책, 588쪽).

김옥균 등이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항했으며, 청국의 종속화정책으로부터의 조선의 완전 독립쟁취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위의 자료들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에 비하여 김윤식·어윤중 등은 청국 체류중에 민비의 의뢰를 받고 이홍장에게 청군의 조선파병에 의한 임오군란의 진압 요청을 전달해 주었으며, 청국의 대원군 납치에도 방조적이었다. 김홍집도 청국의 적극 간섭정책과 대원군 납치에 대한 비판의 정도가 김옥균 등과 같이 강렬하지 못하였다. 조·청관계에 관련하여 자주독립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의 정도에서 개화파 내부에 현저한 견해 차이가 드러나 개화파 분화의 요인을 이룬 것이었다.

둘째,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는 범위와 속도에 대하여 개화파 내부에 견해 차이가 노출되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부문에서 모든 제도의 ‘대경장개혁’을 주장하는 ‘변법적 개화’를 주창하였다. 김옥균은 일본 자유당계 요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4백년 누적된 頑俗을 갑자기 변화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대세는 부득불 정부를 한 번 大更張改革을 한 연후에야 군권(독립권)을 높일 수 있고 민생을 보전할 수 있다”039) 金玉均,<朝鮮改革意見書>(≪金玉均全集≫, 109∼110쪽).고 하면서 “독립을 바라면 정치와 외교를 불가불 自修自强해야 하는데, 이 일은 지금의 정부 인물로서는 될 수 없으므로 군권(독립권)을 위태롭게 하고 권세만 탐내는 고식배들을 역시 불가불 한 번 소제할 수밖에 없다”040) 위와 같음(111쪽).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꿈이 국가의 모든 부문에서 급속히 개화를 성취하여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 같은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해서 기록하였다.

매 일요일이면 우리는 반드시 그(김옥균)를 築地 寓居로 심방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우리를 親弟와 같이 대접하며 숨김없고 남김없는 폐간 속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 주었다. 그는 祖國刷新에 대한 우리의 중차대한 임무를 말하는 동시에 나라에 돌아가 우리가 빛나는 대공훈을 세울 것을 믿어 마지아니하였다. 그리고 그는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英國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 나라를 亞細亞의 佛蘭西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또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김씨의 말을 신뢰하고 우리의 전도에 무엇이 닥쳐오든지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徐載弼,<回顧甲申政變>,≪甲申政變과 金玉均≫, 84∼85쪽).

한편 당시에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의 수용에는 마찬가지로 적극적이었으나, 사회제도의 대개혁에는 매우 소극적이어서 아직도 東道西器論的 성격이 강했으며, 개화의 속도도 점진적인 것을 선호하였다.041) 尹致昊,<風雨二十年一韓末政客의 回顧談>(≪東亞日報≫, 1930년 1월 12일).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온건개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셋째, 개화독립정책을 단행하기 위한 권력 장악의 방법에 대하여 개화파 내부에 견해 차이가 내재하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는 자주독립과 대경장개혁의 단행을 위한 권력 장악의 방법에 있어서는 ‘權道’의 사용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 때문에 ‘정변’의 방법을 기회 있을 때마다 중시하였다.

김옥균은 대경장개혁 단행의 두 개의 방법으로 일찍이 ‘평화행사의 방법’과 ‘무력행사의 방법’을 구분하여 강조한 바 있다.042) 金玉均,<朝鮮改革意見書>(≪金玉均全集≫, 111∼112쪽) 참조. 김옥균에 의하면 평화행사의 방법이란 국왕의 칙령을 빌어서 평화적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개혁사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한편 무력행사의 방법은 국왕의 密意에 의탁하면서 무력을 사용하여 정변이나 혁명을 일으켜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급진적으로 개혁사업을 신속히 단행하는 방법이다.

서재필은 김옥균이 개화를 ① 구미형과 ② 일본형으로 나누어 보면서, 구미형은 수세기(수백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룩된 것인데 비하여 일본형은 한 세대에 이룩한 것인데, 조선은 뒤늦게 개화를 하려는 것이므로 김옥균이 단기형인 일본형을 선택하여 이를 성취하려고 정변의 방법도 생각한 것이었다고 설명하였다.

그(김옥균)는 歐美의 문명이 일조일석의 것이 아니고 열국간 경쟁적 노력에 의한 점진 결과로 幾多 世紀를 요한 것이었는데, 일본은 한 代 동안에 그것을 달성한 양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 일본을 모델로 청하여 백방으로 분주하였던 것이다(徐載弼,<回顧甲申政變>,≪甲申政變과 金玉均≫, 82쪽).

한편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 온건개화파는 아무리 대경장개혁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권도로서의 ‘정변’의 방법은 찬성하지 않았으며, 세력을 길러 국왕의 자발적 임명에 의거한 정권 장악의 방법을 추구하는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주로 이상과 같은 요인으로 말미암아 초기 개화파는 1882년 후반부터 1884년 사이에 김옥균·홍영식·박영교·박영효·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와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화파로 분화하게 되었다.

1882년∼1884년 당시 국내 정치세력의 분화와 그 중요 인물 및 정치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의<표 1>과 같다.

  정치세력당파 중요 인물 정치적 특징
급진개화파
(개화당)
劉鴻基, 金玉均, 洪英植,
朴泳敎, 朴泳孝, 徐光範,
柳相五, 徐載弼, 尹雄烈,
尹致昊, 邊樹(燧),
朴齊絅 그 밖의 다수
◦변법적 개화 및 국정 전반에 걸친 대
경장혁신을 추구
◦청국의 적극 간섭정책과 속방화정책
에 적극 저항
◦개변의 방법도 불사
◦주로 선각적 청년 지식인층으로 구성
◦조정의 중간 관직에 다수 진출
온건개화파
(중간파)
金綺秀, 金弘集, 金允植,
魚允中, 朴定陽, 金晩植,
金仁植, 姜文馨, 李 永,
申箕善, 李元會, 趙秉鎬
그 밖의 다수
◦東道西器論的 개화를 추구
◦점진적 개화를 추구
◦정변의 방법에 불찬성
◦주로 장년층 중심의 구성
◦조정의 고위 관직에 다수 진출
민비수구파
(집권파)
閔 妃, 閔台鎬, 閔謙鎬,
閔應植, 閔泳翊, 閔丙奭,
閔泳穆, 閔種黙, 趙寧夏,
韓圭稷, 李祖淵, 尹泰駿
그 밖의 다수
◦守舊를 원칙적으로 추구했으나 불가피
할 때는 開化를 승인
◦임오군란 후에는 親淸事大정책을 추구
◦閔氏戚族을 중심으로 구성
◦주로 노년·장년층이 중심
◦조정의 최고권력과 관직을 점유한 집
권파임
대원군수구파 興宣大院君(李昰應),
李載元, 李載完, 李載冕,
李載先, 洪淳馨, 鄭顯德,
申應朝, 李景夏, 韓聖根,
李載純
그 밖의 다수
◦守舊를 원칙으로 추구
◦왕권의 강화, 宗社의 구습보전을 추구
◦청에 대해서는 의례적 사대외교만 하
고, 실질적으로는 자주를 추구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여 종친과 그 세
력으로 구성
◦임오군란 때 1개월간 집권했으나 그
이후에는 실권
위정척사파
(재야유림
수구파)
 
金平黙, 崔益鉉, 柳麟錫,
李晩孫, 白樂寬, 梁憲洙,
申 㰔, 洪在鶴, 奇宇萬,
韓洪烈, 高定柱, 金鎭淳
그 밖의 다수
◦철저한 守舊와 위정척사를 이론적 실
천적으로 고수
◦명과 중국에는 사대적이며, 淸에는 중
립적 외교지지
◦일본과 서양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배척
◦서원과 향교를 근거지로 한 유림세력
으로 구성
◦평상시에는 조정의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재야세력으로 존재

<표 1>1882∼84년의 조선 정치세력과 당파의 분화

위의<표 1>에서 ①과 ②의 정치세력과 파당이 개화파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이고, ③④⑤의 정치세력이 수구파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위의 표는 ①의 정치세력에 접근할수록 더욱 개화적이고, ⑤의 정치세력에 접근할수록 더욱 수구적인 정파의 분류표이다.

1884년의 갑신정변은 위의 표의 5개 정치세력·정파 중에서 ①의 급진개화파가 청군과 ③의 민비 수구파정권에 대항하여 일으킨 정치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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