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파의 활동
  •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김옥균·박영효 등이 1879년 일본에 파견한 이동인의 활동의 결과로 조선 조정은 일본의 개화실태를 시찰하기 위하여 일본국정조사단(紳士遊覽團)을 1881년 1월 파견하였다.045) 鄭玉子,<紳士遊覽團考>(≪歷史學報≫27, 1965).
李光麟,<開化僧 李東仁>(앞의 책, 1973).
李用熙,<東仁僧의 行蹟(上)-金玉均派 開化黨의 形成에 沿하여->(≪서울大 國際問題硏究所論文集≫창간호, 1973).
許東賢,<朝士日本視察團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52, 1986).
당시에는 1881년 위정척사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으므로 시찰단의 朝士들은 모두 동래암행어사의 발령을 받고 비밀리에 동래에 집합하여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다.046)≪高宗實錄≫, 고종 18년 12월 14일.

시찰단의 구성은 12개 반으로 편성하여 그 책임자는 각각 朝士 12명으로 구성하고, 조사 1명에게 대체로 隨員 2명, 通事 1명, 하인 1명을 배치하여 1개 반을 5명으로 구성했으며 시찰단의 총 인원은 62명이었다(시찰단 12개 반의 구성은<표 2>참조).

朝 士 隨 員 通 事 下 人
趙準永
朴定陽
嚴世永
姜文馨
趙秉稷
閔種黙
李 永
沈相學
洪英植
魚允中
李元會
金鏞元
李鳳植 徐相直
王濟膺 李商在
嚴錫周 崔成大
姜晉馨 邊宅浩
安宗洙 兪箕煥
閔載厚 朴會植
李弼永 閔建鎬
兪鎭泰 李鍾彬
高永喜 咸洛基 全洛雲
兪吉濬 柳定秀 尹致昊 金亮漢
宋憲斌 沈宜永
孫鵬九
文順錫
金洛俊
徐文斗
金順伊
金基(箕)文(李章浩)
金福奎
林基(箕)弘
金永得(正植)
白福周
黃天彧
李壽萬
金大弘
崔允伊
李秀(壽)吉
朴春鳳(奉)
劉福(卜)伊
林錫奎
李正(貞)吉
金五文
尹相龍(商容)
鄭用(龍)石(錫)
金永根
金鴻達 李順吉
 

<표 2>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 일행 일람표

일본국정시찰단의 12개 반은 다음과 같이 시찰대상을 분담하여 정밀한 시찰을 하였다.

朴定陽(참판):내무성·농상성 閔種黙(승지):외무성 魚允中(교리):대장성 趙準永(참판):문부성 嚴世永(승지):사법성 姜文馨(승지):공부성 洪英植(참의):육군·체신 李 永(승지):세관 趙秉稷(승지):세관 李元會(부사):군사

일본국정시찰단의 파견은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각 부문에서 정밀한 視察報告書와 聞見事件錄이 작성 제출되어 장차 조선의 개화정책에 많은 참고자료를 수집하게 되었으며, 시찰단에 참가한 일행들 가운데 개화를 지지하는 인사들이 다수 나와 개화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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